여행일기/아시아(중국 외)

Mabuhay! 2 : 바기오로

張萬玉 2007. 4. 15. 15:12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고 겁을 먹으면 접시물에도 빠져죽는다고...

깜빡잠이나마 잠시 눈을 붙였더니 제정신이 돌아온 모양이다. 지난밤 나를 떨게 만들었던 위기(?) 상황들의 진짜모습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부랑자 소굴처럼 으슥하게 느껴졌던 길은 수많은 인파가 들끓는 번잡한 큰길이고, 하나같이 나를 먹잇감으로 노리고 있는 듯 느껴졌던 사람들은 대도시에서의 힘겨운 생존을 위해 부지런히 하루를 여는 마닐라의 보통시민들이다. 지저분하고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상식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위험한 정글은 분명 아닌 것이다. 자, 정신 차리고 힘내자꾸나!       

 

무거운 가방을 두고 나갈 수 있어 숙소는 좋은 것이다. 급한 마음에 세수도 생략하고 서둘러 빅토리아 라이너로 향한다.*1) 에그머니, 그런데 터미널이 인산인해....인구 많은 중국만 그런 줄 알았더니 필리핀도 만만치 않네 그려...(나중에 알고 보니 늘 그런 것이 아니고 부활절 휴가를 맞아 고향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거란다).

어느 줄에 가 붙어야 표를 구할 수 있을지 엄두가 안 나 넋을 잃고 있다가 '에라 모르겠다 익스큐즈미'를 연발하며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전진.....가까스로 매표소 창구에 당도하여 물어보니 바기오 가는 표는 오후 3시 30분 것밖에 없고 그것도 달랑 네 자리 남았단다. 줄 선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는 순서대로 탈 수 있는 일반버스였고 에어컨버스의 경우 예매를 하려면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거였다. 것도 모르고 공연히 엉뚱한 줄에 서서 오전시간을 허비할 뻔했네. 목마르면 우짰든 삽질해서 우물을 파야 한다.

 

바기오행 표를 손에 넣고 나니 좀 여유가 생긴다(360페소).

숙소에서 나가야 하는 12시까지는 다섯 시간... 좋다, 좌절하지 말고 부지런히 움직여 또 한껀 올려보세!

시간이 돈이니..... 대중교통이니 뭐니 따질 계재가 아니다. 택시에 올라 인트라무로스! 외치고 "미터 꺾으세요" 한마디 덧붙이는 거 잊지 않는다.(꼭 해야 한다) 다행히 이 기사는 과묵하다.

 

파사이 시티를 벗어나니 마닐라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시원한 야자수와 널찍하고 깨끗한 대로, 높이 솟은 국제적인 풍모의 빌딩들, 고급 맨션들....이것이 진정 마닐라란 말이냐?      

15분쯤 달렸을까? 택시는 내가 책에서 보아둔 말라테, 마비니 거리를 지나 바다가 보이는 마닐라만을 끼고 달리다가 고풍한 성당 앞에 나를 내려준다(110페소, 팁 20페소). 

 

인트라무로스(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펌)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지역에 있던 옛 성채도시.

스페인어로 '성벽 안'이라는 뜻의 인트라무로스라는 이름은 1571년 직후 스페인의 정복자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가 파시그 강 어귀에 요새도시를 건설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곳은 공식적으로는 멕시코시티에 있던 누에바에스파냐(뉴스페인) 부왕의 관할 아래 있었으며, 17, 18세기에는 스페인인들이 새로이 이곳을 정복함으로써 지금의 필리핀의 수도로서 번영했다.
원래 6m 두께였던 성벽 안의 면적은 0.59㎢로 마닐라 대성당, 산티아고 요새, 산아우구스틴 교회, 마닐라시립대학교 등과 이 시기의 유적들을 포함하고 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 성채 주변의 인구가 점차 늘어나 1905년에 성채 주위에 있던 참호가 매립되었으며 스페인의 영향이 뚜렷한 식민지 시기의 건물들이 헐리고 대신 정부관청들이 들어섰다. 1944년 미군의 폭격으로 완전히 부서진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시작된 재건작업은 매우 늦게 진행되었다.
말레이 및 미국의 영향으로 이질화된 주변지역과 이 지역을 뚜렷이 구별해주는 5각형 성벽, 7개의 문, 작은 광장들 등의 복구작업은 1980년대초까지도 계속되었다. 
 
인트라무로스 입구 쪽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마닐라 대성당은 마침 수난절을 맞아 미사를 드리러 온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사진을 많이 찍기었는데 영 건질 것이 없어 하나만 올린다. 양이 안 차시는 분은 다른 분이 찍으신 근사한 사진을 감상하시기 바란다. http://mini.raycanvas.com/blog/31
 

 

성당 앞에는 요깃꺼리를 파는 상인들로 바글바글...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산 아구스틴 교회(세계문화유산). 마닐라 성당 바로 뒤에 있다.

 

 

성당 문 안 지키고 순두부장사와 잡담하는 어린 복사들. 

 

 

산 아구스틴 성당 근처 골목에 바로 필리핀대학 

 

자, 산티아고 요새로 가는 길목의 동네구경이나 하실까요?

 

근사한 빌딩과 맨션이 늘어서있는 지역 바로 옆골목 풍경이다. 

 

 

마약하는 사람들은 절대 늙지 않는다. 왜냐, 늙기 전에 죽거든.... 

 

 

영문자로 썼으되 무슨 얘긴지 도통 알아볼 수는 벽화..그래도 그림은 재밌군.

 

 

호호... 대단히 경제적인 양계시설이네요.

 

 

설마 저기가 돼지 축사? 잠깐 똥 뉘러 나온 거겠죠?

 

잠시 후 산티아고 요새 도착.

500여 년의 풍상을 겪은 벽돌과 검은 이끼가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상념에 잠기게 한다. 마침 오가는 이도 없고 보슬비까지 촉촉하게 내리니 나그네의 바쁜 발걸음도 여기서는 잠시 멈출 수밖에....     

 

성벽 위로 올라가려면 이 문을 통과한다. 

 

뱅글뱅글 돌아 올라가보면

 

발 아래로 보이는 곳이 지하감옥이란다.

누가 누굴 가뒀던 걸까. 땅도 뺏기고 원치않는 노역에다가 말 안들으면 갇히기까지.... 정말 억울했겠다.

 

 

 

근사해, 근사해!!

보슬비까지 내리니 내 마음은 그 옛날의 풍경 속으로 한없이 침잠해들어가지만.... 

 

 

발 아래는 골프장...  

 

성벽을 한바퀴 돌아 내려오니 다 무너진 옛건물들 앞에서 조각상(훗날 만들어진 듯) 몇이 날 반겨준다.

 

자, 이제 리잘공원 쪽으로 가보세.

걷다 보니 길 옆에 스페인풍의 으리으리한 저택이 보이는데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아, 혹시 여기가 이멜다가 살던 '까사 마닐라?'

어디서 표를 파나 기웃거렸더니 오늘은 공휴일이라 관람을 안 하는데 이왕 왔으니 잠깐 들어와도 좋단다. 이게 웬 떡? 하고 들어갔는데 카메라 셔터 몇번 누르고 나니 이제 그만 나가란다. ㅡ.ㅡ

 

 

 

 

 

 

넓게 펼쳐진 리살공원... 근데 어째 리살공원 사진이 없다.

분명히 나도 남들처럼 호세 리살 박사의 동상 사진 찍었는디? 

대신 필리핀 국립박물관 사진...

 

 

이제 슬슬 돌아갈 시간.

리잘공원을 나와 마닐라 베이 쪽으로 방향을 잡아 거기서 택시를 타려는데.... 어딘가에서 방향감각을 잃었다. 걷고 걷고 걸어도 툭 터진 바다풍경은커녕 낯선 건물들만 계속 나타난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여?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니 마닐라만까지는 너무 멀단다.

론리플래닛도 안 들고 왔고.... 대강 방향을 물어보니 LRT*2) united nation역이 가까울 것 같아 그럼 그리로 가서 경전철을 한번 타볼까 하고 계속 걷는다.  

 

이 동네 수도 사정이 안 좋은가보다. 공동수도에서 물을 긷는 사람들

 

수난절 행사인가보다. 일단의 신자들이 줄을 지어 걷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 모두 맨발이다.

 

순례자들에게 말도 붙일겸 해서 뻔히 보이는 전철역을 앞에 두고도 전철역이 어디냐고 물어보니

아, 이게 웬일! 부활절 휴일이라 전철이 안 다닌단다. 럴쑤럴쑤이럴쑤!!

갑자기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가 도무지 더 못 걷겠다.목이나 좀 축이자 하고 세븐일레븐에 들어갔는데 바기오에서 기다릴 언니 생각이 난다. 전화를 어떻게 해야 하나?

아가씨에게 물어보니 장거리 전화는 전화카드를 사란다. 100페소 주고 전화카드를 샀는데 도무지 IDD 카드를 쓸 수 있는 공중전화가 보이질 않는다. 눈에 띄는대로 병원에도 들어가 물어보고 YMCA에 들어가 물어봐도 없다. 결국 파출소까지 가서 물어본 결과 펄 마닐라 호텔로 들어갔더니 황공하옵게도 엘리베이터 걸이 전화기가 있는 8층까지 모셔다준다. 전화 한 통 걸고 내려오며 생각해보니 이럴 때 엘리베이터 아가씨에게 팁을 좀 주었어야 했나 싶다. 허둥지둥 하다 보니 도무지 스타일이 안 사는군. ㅋㅋ

 

전철이 안 되니 할수없이 다시 택시를 부른다. 어느새 체크아웃 시간이 임박했다.

택시에 올라 '오로라 스트릿! 윌슨호텔!' 하고 외쳤는데....

오, 어젯밤 상영되었던 불운의 드라마,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건가. 택시는 내가 왔던 거리와 영 다른 곳으로 내달린다. 사람좋게 생긴 기사는 어디서 왔느냐부터 시작하더니 묻지도 않은 필리핀 정치 얘기, 자기 고향 얘기, 애들 얘길 주워섬기느라 신이 나서 (짬짬이 핸들 놓고 두 손으로 제스처까지 써가며) 수다를 떠는데 거기다 대고 안면 바꾸어 '너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거니?' 따지기도 어려워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며 창밖에 눈을 들이박고 있는데.... 

 

엑? 택시는 어느새 완전 호화동네로 접어든다. 그린힐 빌리지인가 뭔가....

"다 왔어. 이 길이 오로라 스트릿이야. 저기 윌슨 호텔 보이지?"

어흐흑, 울고 싶어라! 

"여기 아니란 말야. 파사이 시티 빅토리아 라이너 근처라구. 너 오로라 스트릿 몰라?"

'아, 파사이?" 하더니 "그렇지, 거기도 오로라 스트릿이지. 오로라 스트릿이 얼마나 긴 길인데 그래. 진작 파사이라고 말하지. 너 빅토리아 라이너 가면 네가 묵은 호텔 찾을 수 있어?"

그래도 이녀석은 양심적인 것 같다. 그만해도 다행이다.

체크아웃 시간 다 됐다고 발을 동동 구르니 택시는 쌔앵 달려 드디어 내가 아는 거리로 접어든다. 

 

에궁, 윌슨이 아니고 윈스턴이다. 호텔 담벼락에 쓴 Winston이라는 글씨모양이 골프용품 메이커 윌슨 것과 똑같이 생겨서 착각을 한 모양이다. 요금은 갈 때의 두 배가 나왔다.

누굴 탓하리. 할매가 더듬더듬 서울구경 하다 생긴 일을..... 덕분에 마닐라 일주 한번 잘했구만.

 

방으로 돌아간 시간이 11시 20분. 그러고 보니 지금껏 세수도 안 하고 아침도 안먹고 마냥 미친*처럼 돌아쳤다. 기진맥진하여 침대에 큰댓자로 쓰러졌지만 바로 몸을 일으켜야 하는 신세. 체크아웃해야지.

그런데.... 터미널에 들어서보니 이제 겨우 11시다.

정신이 없다 보니 한국시간을 알려주는 내 손목시계 말을 믿었던 거다.

3시 30분까지는 4시간 반이나 남았다. 띠용~

그러나 큰가방까지 끌고나온 주제에 어디로 또 이동해서 어떻게 또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도무지 엄두가 안 나 터미널에 진을 치고 앉아서 사람구경이나 실컷 하기로 한다.

 

마침 바기오행 버스를 기다리는 대합실 왼쪽에 에어컨 빵빵해 보이는 휴게실*3)이 보이길래 그리로 들어갔다. 콜라와 도넛(합이 70페소) 하나 시켜놓고 앉아 있는데 한국사람임이 분명한 말끔한 모녀가 대합실로 들어온다. 평소 같으면 눈인사나 하고 말았겠지만 고독하고 힘겨운 행군의 끝에 만난 동포가 어찌나 반갑던지.

바기오에서 국제학교를 다니고 있는 딸네미 뒷바라지하러 온 지 6개월 정도 되었는데 부활절 방학을 맞아 마닐라에 놀러왔고, 어젯밤 내가 그리도 찾아헤매었던 찜질방에서 개운하게 밤을 지냈단다. ㅎㅎ

어젯밤의 모험담을 털어놓으니 놀라기도 하고 재밌어하기도 하면서 바기오에 오면 꼭 한번 만나잔다. 

(다소 지나치게 반가워하는 나를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한 시간 넘게 벗해준 성희 엄마...정말 고마웠어요. 큰 힘이 되었거든요. ^^ )   

 

이그~ 이쁜 녀석.... 덥고 지겹다고 떼쓸만도 한데 잘도 참는다. 

드디어 바기오행 3시 30분발 버스 도착 

현대가 만든 버스다. 에어컨이 빵빵해서 얼어죽는다는 썰이 있어 얇은 담요까지 준비했지만...

실제로는 가디간 하나 정도 걸치면 된다. 

 

 

중도에 있는 빅토리 라이너 휴게소. 아마도 각 버스회사마다 휴게소가 다른 듯.

짐작컨대 빅토리 라이너 휴게소가 최고인 것 같다.  

 

장장 7시간 대장정의 마지막 한시간은 완벽한 S라인의 산길.

고산마을 바기오에 도착하기 위해 굽이굽이 낑낑낑낑 올라가기를 한 시간여...

드디어 버스는 바기오 빅토리아 라이너 터미널에 도착했다.

 

*1) 마닐라의 장거리 버스 터미널 : 파사이와 쿠바오 지역에 모여 있다. '모여 있다'라고 함은 버스회사가

     다르면 터미널도 다르기 때문인데 어쨌든 5분~10분 정도의 거리를 두고 '모여' 있다. 행선지에 따라

     운행하는 회사도 달라지니 원하는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기준으로 버스터미널을 선택해야 한다. 

*2) MRT와 LRT : 마닐라에는 두 개의 지상철 노선이 있는데 한국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 마카티나 케손

    시티는 MRT를,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거리인 말라떼 지구나 마닐라만은 LRT를 이용하며 이 두 라인

    은 EDSA에서 만난다(환승역). 마닐라의 지상철은 지독한 교통정체를 피할 겸 한번 타볼만은 하지만

    그리 권하고 싶지는 않다. 표를 사려면 긴 줄을 서야 하고 내리고 타기 위해 걷기도 많이 걸어야 한다.

    사람이 많기 때문에 특히 짐이 많은 경우는 말리고 싶다.   

*3) 빅토리 라이너가 제공하는 Econotel : 늦게 도착하는 비행기를 타고 와서 이튿날 바로 빅토리 라이너

     를 이용하실 분들, 혹은 새벽 비행기나 빅토리 라이너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전날 밤 대기해야 하

     시는 분들은 빅토리 라이너가 제공하는 저렴하고 깨끗한 숙소를 이용해보시면 어떨까 한다.

     빅토리 라이너 터미널이라면 어디든지 있는 이 모텔은 5시간 정도 사용하는 데 500페소이며

     economy room(아마도 도미토리 형식일 듯)의 경우도 355페소이다. 1785페소짜리와 1385페소짜리

     디럭스(?)룸도 있다. 아침도 주고 온수샤워도 되고.... extra person에 대해서는 450페소를 추가한다.

     이걸 진작 알았더라면 첫날밤에 그 쇼를 안 해도 됐을 거인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