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아시아(중국 외)

Mabuhay! 2-1 : 길 위에서의 생각들

張萬玉 2007. 4. 17. 07:28

내가 어제 여행기에서 벌써 바기오에 도착시켰나?

아니, 그럴 순 없다. 어제 바기오로 오는 여정의 느낌을 마저 실어야 하는데...

할수없지. 터미널을 벗어난 버스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못말리는 수다쟁이..)

이 꼭지는 나만을 위한 블러깅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 지루한 독자들은 건너뛰시도록. ^^

 

복잡한 파사이시티를 벗어난 버스는 외곽순환도로를 달리면서 또다른 마닐라의 얼굴을 보여준다.

아침에 보았던 격조있고 우아한 마카티 빌라촌과는 또 다른 얼굴이다. 다국적기업들의 상품광고판과 알록달록한 상가들의 모습에서 서양풍의 발랄함이 넘쳐난다. 상하이 시내 같기도 하고 방콕 같기도 하고...

하긴... 자본주의식 개발이 도착할 종착역의 모습은 결국 인터내셔널하지 않겠나. 세계의 대도시들과 비교해 조금은 완고해 보이는 우리나라의 다운타운들도 근래 들어 상당히 국제적인 분위기를 내고 있는 마당에.... 그러니 자본주의적 호강의 맛을 보기 위해서라면 굳이 다른 나라로 갈 필요는 없겠다.

후진국에서 외국 관광객을 위해 마련한 서비스들은 대개 그 나라 부유층들이 향유하는 서비스이기 마련이다. 그러니 그 나라 보통사람들이 살고 삶의 진짜 속살 맛을 보려면 절대 그 루트를 따라가면 안 된다. 그것은 각각 다른 속살 위에 입힌 당의정 껍데기의 맛일 뿐. 

 

 

사진은 바기오에서 찍은 것으로 본문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음 

 

톨게이트를 지난 버스가 달리는 길은 이제 드넓은 들판길이다. 알록달록 양철지붕을 얹은 농가들이 점점이 보일 뿐 가도가도 푸른 초원과 드넓은 논..... 한쪽은 벼를 베었는데 한쪽에서는 모내기를 하고 있다.

머나먼 지평선 끝에서는 풍성한 흰구름이 피어오르고 하늘빛은 꿈처럼 고운 옥색이다.

7시간의 버스여행이 괴로움이라고 누가 그랬나. 버스 창문을 통해 만나는 필리핀의 다양한 표정이야말로 내 여행의 소중한 부분이다. 논스톱으로 달리는 버스에 올라탔으니 마음이 멈추는 곳에 내려 잠깐의 눈맞춤이라도 하지 못하는 게 아쉽긴 해도(사진찍기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한컷 건지기도 쉽지 않다) 새롭게 다가서는 필리핀 농촌의 모습은 사뭇 내 마음을 들뜨게 한다.  

 

어디로 떠났든 여행의 초반부에는 모든것이 어설프고 약간의 후회를 동반한 짜증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일단 나의 shelter가 생기고 그 주변에 포진한 물건들과 낯을 익히고 그 땅의 이름들을 익히고 방향을 익히고 나면 솔솔 정이 들게 되고 탐험을 할 마음이 솟아오르게 되고... 마침내 떠날 날이 가까워지면 마음 한구석이 베어져 나가는 아릿함까지 느끼게 된다. 필리핀의 경우도 그러하다. 인터넷 사이트와 론리 플래닛으로 익혔던(외워도 자꾸 까먹게 되는) 낯선 지명들이 이제는 무슨 생명체이기나 한 것처럼 내게 손을 내밀고 슬슬 어깨동무를 해오기 시작한다. 이 느낌이 난 너무 좋다. 마치 연애에 처음 빠질 때의 뜨거움 같은 이 맹목적인 솟구침....    

 

마음 같아서는 아무데서나 내려 저 벌판 끝까지 가보고 싶다. 저 벌판 끝에는 나의 살던 고향처럼 가난하지만 꽃피는 마을들이 있겠지. 소박하고 행복한 학교도 있을 것이고 마을회관도 있을 것이다. 미군들이 버리고 간 마을들은, 필리핀 민중운동사에 나오는 코코넛이며 사탕수수 플랜테이션들은 지금 과연 어떤 모습들일까?

 

부유층의 삶이 인터내셔널이라면 빈곤층의 삶 역시 인터내셔널이다. 부족한 상하수도 시설에 쓰레기 처리마저 쉽지 않은 슬럼가, 재개발의 칼날을 피해 산동네나 개천변으로 모여드는 판자집들, 시클로 혹은 트리시클, 싫어할 줄 알면서도 기를 쓰고 들러붙어야 하는 호객행위, 구걸.... 그들이라고 어디 자존심이 없겠는가. 다만 생계의 위협이 자존심을 앞질렀을 뿐이다.

 

이 사진 역시 본문 내용과 관계없음

 

잘사는 나라의 관광객들이 거지근성 혹은 게으름으로 쉽사리 매도해버리기 쉬운 국민성(사실은 사회적 윤리의식)이란 것조차도 그 나라가 처한 경제적인 여건과 더불어 변화하는 것이며 그러한 변화의 메카니즘 역시 어느 국가나 민족을 막론하고 공통적이다. 우리 나라에도 그러한 시절이 있었고 심지어 미국이나 유럽에서조차도 초기 자본주의 시절에 그러하였으며 내가 경험한 상하이 사람들의 변화 역시 그러하다. 일정 정도의 民富가 담보되지 않고는 (법이나 캠페인 만으로는) 세우기 어려운 게 개인의 자존감이며 사회적인 자존감이다. 그런 점에서 보더라도 필리핀에서도 정치를 바로 세우는 일이 필리핀 국민들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일 텐데 곧 다가올 선거를 대하는 필리핀 국민들의 시선은 냉소적이기만 하다. 돈을 벌기 위해서 정치를 하며 정치인이 되고 나면 부자가 되는 메카니즘 역시 국제적인 진실인가?            

 

마닐라 시티 뒷골목

 

수빅을 지나니 산페르난도 시티...

라 유니온주의 산페르난도와는 同名異地(왼쪽 혹은 오른쪽 어딘가에 바다가 있겠지?)

다시 앙헬레스를 지나 딸락에 이르니 본격적으로 마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떤 마을은 알록달록한 함석지붕을 얹고 창틀에도 고운 칠을 하여 유럽의 어느 마을 같고 어떤 마을은 초가를 얹어 캄보디아의 농촌 같다. 참 이상하다. 같은 들녘 같은 구름이라 해도 웬지 필리핀의 농촌은 중국의 농촌보다 더 아름답고 풍성해 보인다. 물이 많은 나라라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사람의 손을 거친 무엇인가가 자연환경에 마감재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집짓는 재료는 별수없이 흙벽돌과 함석지붕 내지 초가지붕이지만 무뚝뚝한 중국 농가와는 달리 필리핀의 농가는 나름대로 아기자기한 단장을 했다. 색깔감각도 대단하고 스페인 풍의 문틀과 창문장식도 퍽 멋스럽다.(혹시 내 안목이 서양물을 먹은 탓인가?)   

 

앗, 갑자기 십자가 지고 가는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난다. 한참 후에 또 한떼의 무리...

이 사진은 본문내용과 관계있지만.... 버스 창문을 통해 후다닥 찍느라고 사진이 시원찮음

 

이번에는 십자가를 진 사람에게 눈만 내놓도록 된 복면을 뒤집어씌웠다. 퍽 섬찟한 광경이다. 

해마다 부활절이 되면 이 일대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행을 몸소 체험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이 행사를 보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관광객 내지는 순례자들이 몰려든다고 하던데 아마 그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가보다. 듣기로, 십자가에 매달려 양손에 못을 박거나 피를 흘릴 정도로 채찍질을 당하겠다고 자원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는데.... 그게 신앙적으로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로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종교인이 아니니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바티칸은 마땅히 이 야만적인 자해행위를 중단시켜야 하지 않겠나?

 

농가들이 사라지고 갑자기 호화별장 같은 것이 나타난다. 마운틴 시온 메모리얼... ?

리조트인 줄 알았더니 공원묘지 아니면 무슨 기념관인 모양이다. 짙은 녹음에 둘러싸여 멋져 보인다.

그리고는 다시 시골마을... 카톨릭 교회는 어디나 아름답고 정갈한 모습이다. 

우리의 장거리 버스는 이제 마을버스로 바뀌어 자주 길가에 서서 그 동네 사는 사람들을 내려주기 시작한다. 바리바리 싸들고 고향을 찾은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마중나온 가족들의 환영을 받는 모습을 보니 괜히 내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걸린다.

 

차가 잠시 정차해 있는 사이에 아버지와 십대로 보이는 아들이 불놀이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고기 구워먹으려고 불을 피우는 건지 쓰레기를 태우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아무튼 참 보기 좋다.

사실이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내 눈에는 집안일 잘 거들고 동생 잘 돌보는 어른스러운 아들처럼 보인다.

우리 나라에서 저 나이때의 청소년이 공부나 취업은 뒷전으로 한 채 집안일만 잘 거두면 아마도 집안의 천덕꾸러기나 걱정꺼리가 되지 않을까? 자식을 낳으면 자라는 것을 보며 즐거워야 하는데 왜 우리네는 자식이 커갈수록 걱정과 한숨만 느는 걸까. 공부를 잘하네 못하네, 이 학원보다 저 학원이 낫네 마네, 유학밖에 길이 없네 어쩌네.... 대학을 들어가면 들어간 대로 취업이 되네 마네... 

출세 안 하고 자연스럽게... 가족과 함께 저렇게 살면 큰일 나는가?

 

이제 바기오까지는 두 시간 정도 남았다. 바깥은 완전히 어둠에 싸여 아무것도 안 보이니 슬슬 졸음이 몰려든다. 깜빡 졸다 보니 옆자리에 앉았던 아가씨가 사라졌다. 어디서 내렸지? 특별히 귀찮아하는 눈치가 안 보이면 무조건 말을 거는 나지만 이번에는 창밖 구경하느라고 사탕까지 나누어주던 호의적인 아가씨를 인사도  없이 보내버렸군. 어쨌든 발냄새 날까봐 벗고 싶은 것을 꾹 참았던 신발을 벗어버리고 넓어진 자리를 이용하여 다리까지 쭈욱 뻗어본다.

마지막 한 시간, 버스는 이리저리 쏠리는 꼬부랑길을 힘겹게 기어올라간다. 7시간의 장시간 버스여행이 지겨워지기 시작할 무렵 드디어 발 아래로 바기오 시티의 불빛이 보석처럼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