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아시아(중국 외)

Mabuhay 8-1 : 냉정과 열정 사이 2

張萬玉 2007. 4. 26. 23:57

둘만 남게 되니 Victor는 눈에 띄게 다정해졌다. 

늘 마주앉았었는데 이젠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안그래도 소곤소곤하는 사람인데 이젠 상체를 내쪽으로 기울여 아예 속삭이듯 한다. 눈길이 마주치기라도 할까봐 접시에 코를 박고 열심히 숟가락질만 하는 나....

이러다 진짜 사고 나겠네. 암만해도 내가 나서서 이 상황을 정리해야겠다. Victor가 실수하기 전에.... 혹은 나의 만용이 분별없이 튀쳐나오기 전에....  

 

밥 다 먹으면 얘길 해야지... 결심을 하고 있는데 조용하던 리조트가 갑자기 시끌벅적해졌다.

승용차들이 줄지어 들어오더니 실크드레스와 실크셔츠를 떨쳐입은 선남선녀들을 한없이 내려놓는다.

어라, 리조트 2층으로 올라가는 여자들은 또 뭘까? 결혼식 피로연을 하러 왔나?

어제밤에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깜깜한 해변 쪽에서 "You Raise me Up"을 합창하는 소리가 되풀이해서 나길래 '에구, 어느 대학생들이 MT를 왔나보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마 오늘의 이 시끌벅적 이벤트와 관련이 있는 건가보다.    

 

그들 중 몇몇이 우리가 밥 먹고 있는 옆자리로 와 앉더니 커피를 주문한다. 부자간으로 보이는 두 사람은 퍼프대디와 청소년 시절의 마이클 잭슨 같다. 혹시 결혼식이냐고 물어보니 30분 후에 Pavilion Hall에서 자기 부모님 결혼 50주년 기념식이 열릴 예정이란다. 관광객이냐고 어디서 왔느냐고 묻더니 당신도 정중히 초대한단다. 이게 웬 떡! 볼꺼리도 볼꺼리지만 Victor와의 어색한 시간이 편치 않았던 나에게 이 이벤트는 구세주나 다름없다. 후다닥 모드 전환이다.. 얍!!      

 

 

 

똑딱이 카메라가 제공하는 어설픈 동영상.

촬영의 촬짜도 편집의 편짜도 몰라 엉망진창이지만, 분위기를 전하는 데는 동영상이 나을 것 같아서... 

 

자녀를 열둘이나 두었다는 이 내외는 올해 68세의 동갑내기인데 보아하니 예사 필리핀 가정은 아닌 것 같다. 미국인 사위를 얻은 것도 그렇고 이틀간 계속된다는 연회에 초대한 하객이 줄잡아 100명은 되는 듯하니 보통의 재력은 아니겠다.

예식은 영어와 따갈로그어로 진행되었는데 무슨 축가가 그렇게 많은지.... 무슨 축사가 또 그렇게 많은지.. 동영상을 찍다 찍다 지루해서 결국은 식장 밖으로 삐져나온 아이들만 잔뜩 찍었다. ^^

 

예식 중에 소나기가 한바탕 내렸다. 호주에서는 비오는 날 결혼하면 행운이 함께한다고 좋아한단다.

이미 다복하게 50년을 살아온 이 커플에게 얼마나 더한 행운이 함께할까마는....식장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만은 쥑이게 낭만적이다. 암만해도 내 마음에도 바람이 든겨.

 

어느새 오후 4시다. 내일은 아침 일찍 떠날 예정이니 이제 바다에 들어갈 기회는 없겠구다 싶어 다시 바다에 들어갔더니 소나기가 휩쓸고 지나간 후라 흙탕물이다. 낮에 갔던 옆집 해변까지 갔다오려고 했는데 물이 컴컴하니 수영할 기분이 안 난다. 옆에서 깔깔거리고 노는 꽃같은 아가씨들에 합류하여 실컷 물장난이나 쳐야지.

 

그런데 이 아가씨들 여간내기가 아니다. 대학생이 둘, 댄서가 둘, 백수가 둘인데 미모뿐 아니라 말솜씨도 예사롭지가 않다. 왜 네 보이프렌드는(Victor를 지칭함) 안 들어오느냐고 해서 보이프렌드가 아니라 여행하면서 동행하게 된 사람이라고 하니까 그럼 자기 소개해줘도 되느냐네 그려. 내게 스물세 살 된 아들이 있다고 하니까 이메일 주소 물어보고 난리가 났다. 물론 장난이겠지만.... 휴~ 무서운 츠자들... ^^

(인근 수빅과 앙헬레스는 봄을 파는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다. 필리핀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필리핀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고 웹서핑을 하다 보니 '필리핀'이라는 검색어에 딸려나오는 포스팅 중 상당부분이 소위 '바바에'라 불리는 매춘여성 얘기를 하고 있더군)

 

 

또 이 지역에는 미군이 철수할 때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필리핀에 눌러앉아서 젊은 필리핀 여성들과 새로운 가정을 꾸린 퇴역군인들도 적지 않아 우리나라 사람들의 보수적인 눈으로 볼 때 부적절해(!) 보이는 커플들이 흔히 눈에 띈다. 허나 이건 매춘과는 다른 얘기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필리핀 여성들과 결혼하세요'에 해당되거나 재력 보고 신랑감을 찾는 소위 양갓집 규수들의 결혼풍속과도 일맥상통하는....서로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는 상부상조의 미풍양속이지.

 

시니칼하다고? 아니, 이건 진심이다. 본국에 돌아가도 찬밥신세 면치 못할 것 같은 머리 허옇게 센 노인들이 (대화할 때 들어보면 어떤 이에게는 아직도 Sir, Sir 하는 게 여태 군대물이 덜 빠진 것 같다.) 좋았던 시절에 듣던 탐 존스를 벗삼아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세계의 조폭' 멤버에 대한 혐오보다는 '운명의 손에 이끌려 낯선 땅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더 느껴진다. 

젊은시절의 추억이 어린 아름다운 필리핀에서 쓸쓸한 노후를 벗해주는 주는 젊은 아가씨와 그의 친정식구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인생... '좋지 아니한가' 

 

해가 지는 줄도 모르게 (예상대로 이 해변엔 선셋도 없었다.) 어둠이 다가들고 해변의 레스토랑에는 값싼 로맨스를 자극하는 old pop이 흐른다. 이미 산 미구엘로 얼근해진 Victor의 화제는 내가 묻지도 않은 사적인 영역(서양사람들 사이에서는 '실례되는 질문'으로 치부되는 나이, 결혼여부 등등)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고 있다. 아들 얘기(결혼한 적은 없지만 자기 엄마랑 사는 열여섯살짜리 아들이 있단다), 예전에 사귀었던 중국 여자친구 얘기, 일.일.일....일밖에 몰랐던 젊은시절에 대한 회한과 이제 돌아가면 확실한 모드전환을 요구할 치열한 일터, 혼자라는 삭막함을 잊기 위해 운동에 몰두한다는 얘기....

마음놓고 감정이입을 할 수 없다면.... 적어도 그에게 마음 한구석이라도 자리를 내어줄 수 없다면 더 이상 이런 얘길 나누고 있으면 안 된다. 어색하고 민망한 일이지만 암만해도 낮에 접어버린 얘길 해야겠다.

 

'빅터, 지금 너와 내가 이렇게 마주 앉아 술 마시고 있는 상황이 한국여자들로서는 꽤 이상한(unusual) 상황이라는 거.... 너 아니?"

빅터의 눈꼬리가 보일듯 말듯 샐쭉해진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너는 결혼한 여자니까. 그런데 많이 불편하니?"

"아니 불편하다기보다는.... 이런 상황에 대한 다른 관점도 있다는 걸 네가 좀 알고 있었으면 해서..."

"여행을 하면서 혼자 다니는 젊은 여자들은 꽤 봤지만 네 나이 또래 여자들이 혼자 다니는 건 처음 봤거든. 그래서 나는 한눈에 네가 평범치 않은 (unusual) 사람일 꺼라고 생각했지. 함께 지내는 동안 네가 열린 마음의 소유자라는 걸 알게 됐고, 너와 있으면 즐거울 것 같았고... 네가 불편할 꺼라는 생각 한번도 안 해봤어. 네 마음을 내가 몰랐던 건가?"

 

결국 그랬군. 혼자 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페로몬이 되었던 건가.

 

"근데 넌 참 독특하다. 이왕이면 젊고 예쁜 여자에게 접근하지 그랬니"

"너는 독특한 친화력(intimacy)을 느끼게 해." (이건 확실한 칭찬이군...^^)

 "우리가 여행의 좋은 동반자로서 좋은 시간을 갖고 있긴 하지만... 나는 유부녀고 게다가 한국의 유부녀라는 사실을 외면하기 어려워. 너 혹시 공자라고 아니? 한국사람들의 의식에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그 양반 말씀이, 부녀자는 오로지 한 남자만 쳐다봐야 하며 일곱살이 된 남녀는 같은 자리에도 앉으면 안 된다고 했지. 나도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의식적으로는 내가 알아서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스스로 내 행동을 감시하게 돼. 그래서 내가 지금 불편한가봐."

 

빅터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쓴웃음인지 비웃음인지 이해하겠다는 미소인지 알 수 없는....

 

"무슨 얘긴지 알아들었어. 그리고 얘기해줘서 고맙다. 공자 얘기는 나도 들어서 알고 있지만 중국은 문화대혁명으로 완전히 사라졌다는데 한국이 아직도 그의 말에 영향을 받고 있다니... 놀랍구나. 자기 배우자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것은 서양에서나 동양에서나 똑같이 중시하는 윤리지만 한국에는 그보다 더 강하게 요구되는 뭔가가 있는 것 같군. 자, 우리 그런 얘긴 그만하고 나가서 다운타운 구경이나 할까? "

 

하려던 얘기들을 다 털어놨는데도 미진한 이 기분. 손에 쥐고 있던 장난감을 놓아버린 허전함 같은 걸까?

그래도 얘기하길 잘 했다. 잘했어 만옥아. 

리조트를 나와 요란한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관광지의 밤길을 걷는다. 어쩌면 꼭 잡고 걸었을 수도 있는 서로의 손이 걷다가 부딪혀 스파크가 일어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