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젖은 얘기들
남자는 태어나서 딱 세 번 운다(울어야 한다)는 얘기는 남자는 잔정에 마음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가부장적인 규범이기도 하지만, 뒤집어보면 생래적으로(혹은 사회적으로 길들여진 나머지) 여자에 비해 잔정이 없기 때문에 이런 주장도 가능하지 않은가 싶다. 다소 논쟁적인 이런 전제로 말문을 여는 것은 (이런 논쟁은 현재 나의 관심 밖이다) 아마도 나는 남자의 성정을 더 많이 가지고 태어난 게 아닌가 싶은 미심쩍음을 한번 파헤쳐보고 싶어서다.
여자의 눈물은 무기라고도 한다.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수분을 여자들은 눈가에 지니고 있단 뜻이지.
예전에 어떤 연예프로에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눈물연기를 잘 하는 연예인들 앞에서 한 사람이 구슬프게 우는데.... 입에서 나오는 얘기는 말도 안 되는 우스갯소리다. 그런데 실험에 참가한 연예인들의 십중팔구가 눈물을 흘리는 웃지 못할 장면을 연출했다. 심지어 얘기가 끝나고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하는데도 울음을 그치지 못해 흑흑 흐느끼는 연예인도 있었다.
감정 잡고 연기를 하는 건 연예인들뿐이 아니다. 내 주변에도 눈물쇼가 가능한 사람들이 여럿 있다.
언젠가 내가 블로그에 썼던 시외할머니를 기억하시는지. 그 양반이 돌아가신 후 장례를 치를 때 그 할머니를 내다버리기도 했던 큰며느리가 왔는데(할머니가 우리집에 오신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골목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울렸다. 한동안 할머니 시신 앞에서 손수건이 젖도록 눈물을 흘리던 이 양반, 우는 순서가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듯이 다른 얼굴이 되어 이 참견 저 참견 하더군.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의도적으로 울음부터 터뜨리는 영악한 아이도 많이 보았다.
흠..... 이 정도로 나의 눈물없음을 자백할 준비를 마치자.
나는 눈물이 매우 적다.
사람들은 흔히 눈물없는 사람을 인정없는 사람과 동일시한다. 이기적이고 매정하고 감수성 메마르고 인간미 없는 사람.... 그게 바로 눈물없는 사람이다. 심지어는 '피'까지 없다고들 한다.
나... 피. 있다. ㅡ.ㅡ
눈물도 있긴 하다. 하지만 매우 적다. 눈가를 뜨끈하게 적시다 멈춘다.
대신 가슴에 깊고 뻐근한 통증을 느낀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의 눈물은 속상하거나 억울할 때 터져나오고
슬픔이나 同情(같은마음)을 느낄 때는 눈물이 아니라 통증이 온다. 가슴... 가끔은 콧등에.
얼마나 눈물이 없느냐 하면.... 내가 눈물 흘렸던 때를 꼽으라면 다 꼽을 수 있을 정도다.
어렸을 때도 울었던 기억은 없다. 설마 전혀 없진 않았겠지만 기억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걸 보면 심각하게 울었던 적은 별로 없었지 싶다. 사춘기 때나 대학생 때도 전혀 안 울진 않았을 테지만.... 아마도 반항심 혹은 의협심이 발동했지만 그것으로 넘을 수 없는 완강한 힘 때문에 울었을 게다. 슬플 때가 아니라 억울하거나 분할 때 말이다.
첫사랑을 잃고 삼박사일을 울고 또 울었던 일이 내 '눈물'의 첫번째 기억이다.
아마 분하고 안타까워서 울었을 것이다. 상실에 대한 감정을 슬픔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지만...
두번째로 기억나는 눈물은 아이를 낳고 3주간 산구완을 해주시던 친정엄마가 집으로 가신 날 밤..
남편도 옆에 있고 사랑스런 아이도 곁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건만 그땐 그 누구도 필요없었다. 무작정 엄마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엄마 잃은 아이처럼 화장실에 숨어 엉엉 울었다. 영문 모르는 남편은 날 달래느라고 쩔쩔매고....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가 없다. ㅎㅎ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 엄마에게 그때 얘길 하니 엄마 말씀, "얘, 난 네 큰오빠 낳고 나서 달보고 울었단다" 하시더군. 아마 산후우울증이 아니었나 싶다.
세번째는 불법구금된 남편을 찾아 군수사기관을 돌아다니며 터뜨렸던 분노의 눈물...
이 얘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네번째 눈물로 넘어가자.
역시 군사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0년대 중반 얘기다. 3년 가까이 징역을 살았는데도 남편은 여전히 가족의 곁에 있을 수 없었다. 집 앞에는 늘 형사가 진을 치고 있었고 심지어 아이를 데리고 시장에 가는 내 뒤까지 따라다녔으니...... 아직 공안기관 몰래 할 일이 있었던 남편은 바람결에나 간간 소식을 전할 뿐 얼굴 본 지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날 당시 온양이었던 친정으로 우리 모자를 보러 오겠다는 전갈이 날아와, 아이를 들쳐업고 미행이 있나 살피고 또 살피며 온양으로 내려갔다.
이 얼마만에 차지하는 남편이냐. 우리는 친정부모님을 모시고 대천 해수욕장으로 놀러갔다.
허나 짧은 반가움 후 나는 다시 남편을 놓치고 말았다. 몸은 곁에 있어도 혼은 딴 데 가 있으니....
모처럼의 만남을 망치지 않으려고 억눌러왔던 실망과 원망의 감정은 서울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수원 가까이 오자 이제 자긴 내릴 테니 집에 잘 들어가라면서 주섬주섬 준비를 하는 것이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둘이 같이 있다가 마치 버림받은 여자처럼 혼자 아이 업고 짐보따리 들고 집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처량맞던지.... 게다가 모처럼 함께 있는 시간조차 딴생각에 팔려 꼭 덜미 잡힌 강아지처럼 마지못해 움직이던 모습까지 겹치자 얼마나 야속한지 가슴을 찢어질 것 같았다.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돌린 채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이런 식으로 운 것도 난생 처음이다)
눈물이 희박한 여자가 우니 그 돌 같은 양반도 어쩔줄을 모르고 주저앉더군. 기차는 어느새 수원을 지나쳐 나와 아들이 내려야 하는 영등포역에 도착했건만... 남편은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아이 업은 내 뒤를 터덜터덜 따라온다.
맹세컨대 그때의 눈물은 남편을 집으로 끌고 오려고 의도된 것이 절대 아니었다. ^^
이제 다섯번째 눈물인가?
솔직이 눈물이 적은 나는 '부모님을 비롯해서 가까운 사람들이 돌아가셨을 때 눈물이 안 나오면 어쩌나'....이런 민망한 걱정을 해본 적도 있다. 헌데 엄마의 임종 때... (마침 병실엔 나 혼자였다) 얼음장처럼 차가워져가는 엄마의 손을 잡고 있으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가슴 통증을 견딜 수 없어서 몸부림을 치는데 눈물이 폭포수처럼 터져나왔다. 전혀 예상 못한 일이었다. 언니가 쫓아들어오고 의사가 들어오니 곧 울음이 잦아들었다. 짧지만 격렬한 순간이었다. 입관을 할 때나 영결식을 할 때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무덤에 흙을 던져넣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조금 흘러나왔지만 아마 엄마 때문에 흘린 눈물은 임종 때 흘린 게 거의 전부였던 것 같다. 지금도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싸아 해지고, 좋은 것을 보면 엄마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눈물이 나지는 않는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고 한다면 할말 없지만....어쨌든 내게 생.리.적.으로 수분이 특별히 부족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렇게 냉정(!)한 나지만 자식넘 때문에는 퍽 여러 번 울었다.
별것도 아닌 한 마디에 야속해서 울기도 하고, 엄마 노릇 제대로 못해줬던 그 시절을 돌아보며 울기도 하고, 너무나 당연한 개체분열을 예감하며 울기도 했다. 바보 같지만 어쩔 수 없다. 다 엄마 된 죄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원체 부족한 수분조차 점점 말라들어가는 것 같다.
슬픔보다는 기쁨에 더 민감하여 남들이 지나쳐버리는 평범한 일에서도 재미와 행복을 잽싸게 캐치하는 사람인데 기쁨의 감수성 마저도 점점 둔감해져가는 걸 느낀다. 하물며 원래 부족한 눈물샘이야.....
남편은 남자지만 나보다 눈물이 많았다. 연속극에서 母子가 붙들고 울면 눈시울에 눈물이 넘쳐 멋적게 쓱 닦기 일쑤였는데 이 양반도 늙어가면서 메말라가는지, 아니면 세상사에 달통을 했는지 그저 그윽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 모습 속에서 바삭바삭 말라가는 나를 느끼니 슬그머니 눈물이 나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