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적으로 노는 법
최열정씨가 자유의 몸이 된 지 어느새 보름이 지났다.
회사에 몸 담고 있을 때는 주말도 휴일도 모르고 새벽에 나가면 자정이 다 되어 돌아오느라고
제대로 된 휴식이 뭔지 사람 사는 세상이 어떤 건지 도통 담쌓고 살아왔기에 당분간은 좀 쉬려니 했다.
본인 말로도 두 달은 쉬겠다고 했고...
그래서 올 여름에 혼자 떠나려던 남미여행 계획(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짐 꾸리느라고 분주했을 꺼다)을 취소하고 남편의 취향과 나의 취향을 절충하여 유럽 쪽으로 행선지를 바꾸었다. 저가항공과 유레일과 숙소가 묶인 한 달짜리 자유여행 패키지에 눈독 들여놓고 루트 짜고... 예약이 필요한 유레일 구간 리스트까지 좌악 뽑아놓고.... 남편하고 같이 가니 푸조 리스 쪽으로 바꿔볼까, 이런 즐거운 상상까지 곁들이며 떠날 날짜 받기만 기다렸는데......
사직서가 수리된 그 다음날 바로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자기가 계획하고 있는 일에 큰 도움이 될 만한 친구가 함께 일하자고 부른 것이다. 당장 뛰어가더니 혼자 들기에도 무거운 서류보따리를 다섯 덩어리나 들고 왔다. 못말린다 정말.....
'발령'이 나기까지 한 달 정도 기다려야 하니 조금 쉬어가도 좋으련만 이 양반, 당장 컴퓨터방에 자기 책상 하나 더 끼워달라고 조른다. 심상찮다. 이게 바로 새로운 불이 붙기 시작할 때의 조짐이다(이럴 땐 유럽 아니라 어딜 끌고가더라도 몸만 끌고가는 거지 정신까진 못 데려간다).
구하기도 처분하기도 번거로운 잠깐 쓸 책상.... 넓지 않은 집에 자리 잡으려면 이것저것 들어내는 대공사를 벌여야 하는데.... 집으로 일 끌고 오지 말랬지! 하고 악처 흉내를 냈더니만 다니던 회사로 보따리를 끌고갔다. 책상 하나 내달라고 했단다. 그리고는 매일 출퇴근이다. 집에서 빈둥거린 날은 딱 하루.
이제 여유를 갖고 살겠다더니.... 뭐가 변했나?
그래도 자유의 몸이라고, 자기만의 routine을 만들어 나름대로 즐기는 게 달라졌다면 달라진 점인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 냉수마찰 하고 여섯시 반이면 집을 나섰다가 오후 여섯시엔 집에 들어온다.
뒷산에 가서 한 시간 반 정도 운동하고 저녁 먹은 뒤에 아홉시 뉴스를 보고 한 시간 정도 영어회화 연습, 그리고는 영화채널 이리저리 돌리다 열두 시에 잠자리에 든다. 모든 일은 정시에 이루어진다. ㅡ.ㅡ
"좋아?" 물어보면 "좋아! 너무좋아." 그런다.(어디 이런 광고카피가 있던데...)
정작 본인의 생활보다 더 크게 달라진 건 내 생활이다.
이제 아침과 저녁을 집에서 먹으니 더이상 '대충밥상'으로는 버틸 수가 없다. 게다가 방학을 맞아 아들넘까지 집에 있으니 식탁이 다소나마 풍성하지 않을 도리가 없고....그러다보니 일주일에 한 번 가던 마트를 요즘은 이삼일에 한 번씩은 들락거리게 된다. 그래도 '오늘저녁 반찬'에 대한 궁리는 늘 쉽지 않은 숙제다. 주부 25년차 경력에.... 그동안 얼마나 살림을 엉터리로 했으면....
그뿐인가? 일주일에 한 번 청소기 돌려두면 일주일 내내 말짱하던 집안이 요즘은 이틀만 지나면 폭탄맞은 집으로 변한다. 게다가 예전엔 눈에 띄지도 않던 싱크대 얼룩이나 창틀 먼지가 왜 이제와서 자꾸 눈에 들어오느냐 말이다. 살림이란 게 하면 할수록 일이 더 많아지는 법이니 가능한 아는척을 삼갈 일이다. ^^
남편이 퇴근하고 나면 내 생활은 완전히 남편의 사이클 속으로 말려들어간다.
산에도 함께 가야 하고 저녁상도 차려줘야 하고 치우고 나면 영어회화 훈련조교가 되어야 한다.
원체 한국말도 어눌한 남편이 남의 나라 말까지 하려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렵기는 중국말도 마찬가지였겠지만 窮卽通이라고.... 발음도 문법도 엉망이지만 나름 유창한데
영어는 거의 입 밖에 내본 적이 없는 말이니 이제와서 밝은 하늘 아래 내놓고 바람 쐬어주기도 만만치 않다.
대학 들어가느라고 쌓아둔 어휘며 문법실력은 선생인 나마저 놀래킬 지경인데 그 1%도 못써먹고 있다니.... 지금 남편이 나랑 연습하는 건 고작 중2 교과서 수준의 substitution drill 이건만, 20분만 시키면 뒷골이 땡긴다며 담배 찾으러 간다. ㅎㅎ
그래도 시작한 지 열흘 정도 지나니 발음도 꽤 교정이 되고 문장 중간에 끊는 시간도 줄어들고 자연스럽게 intonation을 타기까지 하니 조교로서 적지 않은 보람을 느낀다. 꾸준히 석 달만 도와줄 생각이다.
신선한 아침운동이 저녁운동으로 바뀌었고
'살림'에 하루의 절반은 빼앗겼고
아침 저녁밥 챙겨야 하니 몇박며칠 돌아다니는 자유도 반납해야 할 듯 하고
월급도 대략 2/3 정도 뺐길 것 같고
컴퓨터도 절반은 뺐겼고(요건 아들넘에게...)
에구... 내 신세야. 이제서야 남편과 애들 뒷바라지에 묶인 보통 아줌마 자리로 돌아온 모양이다. ^^
두고 봅시다 열정씨
당신이 열정적으로 놀면 나는 더 열정적으로 놀 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