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花樣年華

이 꼬마의 이중생활

張萬玉 2004. 11. 10. 15:32

동네에서 이처럼 깨가 쏟아지게 잘 놀던 친구들과.... 학교에 가면 굳바이다. 한마디로 노는 물이 달랐던 것이다.

 

우리 동네 아이들 대부분은 학교에서는 공부도 못하고 준비물도 안 챙겨오고 무엇보다도 기성회비가 몇 달치씩 밀려 있는 천덕꾸러기들... 나는 선생님의 위임을 받아 그 애들을 닦달해야 하는 학급임원의 입장... 숙제검사를 하거나 떠드는 애들 이름 적어서 청소시키고, 기성회비 몇 달 이상 밀려 있는 애들 집으로 돌려보내고(어쩌라고오~)

 

내가 학교에서 어울리는 아이들은 주로 학급 임원이나 우등생들... (맹세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다) 학교 마치고 돌아오면 다시 그 천덕꾸러기들과 어울려 밤 늦게까지 놀고... 학교에서 노는 업타운 애들 집에는 자주 놀러다녔지만 그 애들을 집에 데려온 적은 한번도 없다. 어떻게 나의 그런 이중생활이 가능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당시 나의 그런 박쥐스러운 행각은 새나 짐승, 어느 쪽의 비난도 받지 않고 무사히 6년간 지속되었다.    


공부는 뛰어난 편은 아니고 그저 반에서 3등 안팎 정도였지만 각종 교내외 백일장을 휩쓸어 전교조회 시간에 자주 이름이 거명됨으로써 교내 유명인사 명부에 이름 석자 올리고 어깨에 힘깨나 주고 다니던 그 시절이 어쩌면 내 생애 최고의 시절이었는지도 모르겠다(ㅎㅎ 소싯적에 안 그런 사람 있냐고 웃지 마세요. 누구에게나 추억은 즐거운 거죠)

 

음악도 나의 초등학교 시절을 풍요롭게 해준 고마운 벗이다.

3년 내리 합창단 활동을 했는데 집에 와서도 파트연습을 따로 하는 등 아주 열성적이었다. 소프라노 메조 앨토의 모든 파트를 지금도 악보로 그리라면 다 그려낼 수 있다. 5학년 때 풍금을 못치는 담임선생님을 대신하고 싶어서 방과 후에 혼자 남아 ‘도미솔’과 ‘도솔미솔’ 반주로 교과서의 곡들을 죄다 연습한 후에 선생님께 반주하겠다고 청해 1년 내내 음악시간에 풍금 앞에 앉기도 하고... (지금 보니 참 못말리는 극성이었군)

 

내 생애 세번째로 찍은 사진이 여기 있다.그 시절의 영화(!)를 말해주는...


5학년 때인가? 어린이신문에서 주관한 육여사 방문팀에 뽑혀 수송/경복국민학교 전교회장과 함께 청와대에 갔었다(당시 나는 **초등학교 전교어린이회 부회장). 기운 스타킹 신고 찌든 흰색 폴라티에 낡은 잠바스커트 입고.... 옷을 빌려라도 입고 싶었지만 엄마가 반대해서 약간은 주눅이 든 채로 갔는데 내 차림이 얼마나 초라했던지, 회견을 마치고 청와대를 나오는데 여직원 하나가 쫓아나오며 영부인이 주시는 거라며 해바라기 꽃잎처럼 눈부시게 노란 스웨터 두 벌을 쥐어주더군. 그 옷은 중학교 1학년 때까지 닳아빠지도록 입었다.

 

뭔가 맛있는 걸 먹겠지 기대를 잔뜩 하고 갔는데 막상 나오는 걸 보니 청와대 약수라는 자랑이 곁들여진 물 한컵.. 그때의 그 실망이란...(하지만 다행히도 나중에 아이스크림과 컵케익이 나와 맛있게 먹었다. ㅎㅎ) 그때 우리를 인솔한 미남 기자는 나중에 커서 보니 어딘가 일간지 부장급으로 일하고 있더라.


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늘 배가 고팠고 영양결핍으로 노란 얼굴에 빼빼 마른 남루한 옷차림, 그러나 기가 펄펄 살아 늘 노래를 부르면서 종종걸음으로 교내를 휘젓고 다니던 명랑소녀... 가난 때문에 슬프거나 비참했던 기억은 거의 없다. 아마 막내였기 때문에 가난의 충격이 아래로 내려오며 많이 완화되었던 것인지...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먹고 입는 것이 아니라....운운” 하던 엄마의 세뇌 때문이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