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기관 습격사건 1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간부들의 구속과 노동조합 탄압에 대항해 일어난 구로동맹파업사건으로 8개월 가량 징역을 살다가 집행유예로 나온 남편이.... 출감 후 일주일 만에 다시 잡혀갔다.
이건 완전히 덤테기였다. 당시 수배중이었던 박노해(시인)와 심상정(현재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을 잡는다고 급습했던 집에 갔다가 그 집에 모여 있던 사람들과 함께 잡혀 간 것이다. 이런 걸 보고 똥물이 튀었다고 하지.
그런데 이 체포작전에 동원된 것은 민간인 수사 권한도 없는 군 수사기관.... 보안사 요원들이었다.
워낙 한번 나갔다 하면 며칠씩 안 들어오는 게 예사였던 그시절의 남편과 아내였기에 사나흘 소식이 없어도 무소식이 뭐 별소식인가 하고 심상하게 지내던 내가 불안해지기 시작한 건 지인으로부터... 불온유인물을 찍어주다 군 수사기관에 잡혀가 고문당한 인쇄소 주인의 얘길 듣고서부터였다. 그 불온유인물이란 게 다름 아닌 '서울노동운동연합' http://k.daum.net/qna/openknowledge/view.html?category_id=DDD&qid=3LHbJ&q=%BC%AD%B3%EB%B7%C3 의 기관지 '서노련 신문'이었고, 남편이 집을 나갈 때 얘기는 안 했어도 눈치로, 만나러 가는 사람이 그 일과 관련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허나 산지사방으로 수소문을 할 수도 없었다. 혹시라도 남편이 그 일에 연루되어 잡혀간 게 아니라면 공연히 공안기관의 의심을 살 수도 있는 일....일단 집에서 기다릴 수밖에.
소문이 날까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그저 전화기만 노려보는 하루하루.... 나의 육감은 분명히 남편이 군 수사기관에 잡혀 있다는데 속수무책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고.... 일각이 여삼추 같은 갑갑함 속에서 신경이 바짝바짝 타들어갈 지경이었다.
당시 내가 간사로 활동하고 있던 '민주화실천 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진)를 통해 최근에 실종된 가족들을 찾고 있는 사람들과 연락이 닿았다. 우리는 군 수사기관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끌려가 뭇매를 맞다 삼일만에 풀려난 인쇄소 주인을 만나, 옆방에 있던 사람들이 서노련 사람들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허나 한밤중에 눈 가리고 끌려갔다 풀려났기 때문에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단다. 우리는 우선 문정동에 있는 국군보안사령부를 찾아가보기로 했다.
군인 출신 대통령의 철권통치 하에 있었으니 당시 '보안사'란 존재는 공안기관 가운데 가히 지존이라 할 만한 무시무시한 곳. 그렇지만 그들의 행위는 엄연한 불법.....우리에게 그들을 공격할 무기는 오직 '불법 구금에 대한 항거'라는 정당성 하나뿐이었지만 겁을 먹고 뒷걸음질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를 타고도 한참을 들어가는 깊은 숲속에 육중한 철문이 버티고 있었다.
보초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우리는 단숨에 철문 쇠창살을 붙들고 기어올라가며 "불법 구금자 석방하라!"고 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라고 해봐야 동네 파출소조차 가본 적 없고 남들 싸우는 것만 봐도 벌벌 떨 듯한 환갑 지난 어머니들과 신혼의 새댁들 스무 명 남짓..... 헌데 어디서 그런 용기들이 나오는지 우리 자신들조차 우리의 돌변한 모습에 놀랄 지경이었다. 이 외침이 저 안 어딘가에 있을 가족들에게 힘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필사적으로 만들었을 게다.
순식간에 군인들 한 소대가 몰려와 철문에 들러붙은 우리를 떼어내고 차에 싣기까지 채 10분도 안 걸렸다. 성남시 외곽 어느 도로에 버려진 우리는 안 끌려나려고 발버둥치다 옷도 다 찢기고 머리채도 헝클어지고 팔다리 여기저기에 피멍까지 든 몰골이었다.
하지만 이 하나마나해 보이는 싸움은 분명히 의미가 있었다. 버스에 실려가면서 우리를 호송하던 군인들로부터 이곳에 우리 가족들이 구금되어 있다는 단서를 확실히 얻을 수 있었는데, 그렇다면 장소를 들킨 그들은 분명히 구금자들을 민간 수사기관으로 이동시킬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거기가 어디가 됐든 군 수사기관보다 추적하기 쉬울 것이며 고문수사에도 일정하게 제동이 걸리지 않겠나.
어떤 루트로 알게 되었는지 지금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우리는 구금자들이 그곳에 있다가 우리의 싸움을 계기로 다른 수사기관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최근에 공안사범들을 주로 연행해간다는 장안동 대공분실 쪽으로 가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