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陽光燦爛的日子

D- 15 : 포도밭 그 아지매

張萬玉 2007. 9. 14. 09:56

14일째의 체중계량 : 변동없음

15일째의 체중계량 : 100g 증가(감량 누계 2.4kg)

짧은 그간의 체험을 종합해본 결과... 식사와 운동이 체중에 미치는 효과는 그 다음날, 혹은 그 다음다음날 나타나는 듯. 이틀 방심한 결과를 곧바로 체중에 반영시키는 저 야멸참이라니...

경각심을 갖고 더 정확히 추진하라는 신체의 엄중한 메시지에 따라 오늘도 빡센 프로그램 하나 돌려야겠다. 

다이어트 2주차. 이젠 식사습관도 운동도 본궤도에 오른 듯하다.

하여 매일 되풀이되는 다이어트 다이어리는 읽는 사람 생각해서 비공개서랍에 넣어두고 일주일에 한 번, 혹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의미있는 변화가 있을 때나 꺼내놓을까 한다.

 

어제는 영동군 황간면에 다녀왔다. 그곳엔 야무딱진 내 동생 '대추나무집 싯째며느리'가 살고 있다.

http://blog.daum.net/kkkll63

상순씨는 기억할랑가 모르겠지만 포도수확 때 한번 품팔러 가마던 약속은 내가 오래 전부터 실실 흘린 바 있다. 작년 그맘때는 우리 이사가 겹쳐 불발로 끝났지만 올해는 꼭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더군다나 올해 수확기에는 시어버님까지 입원을 하셨다니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테고.... 가을은 성큼 다가온다고 하고 주말에는 비까지 내린단다. 이번 주 안엔 어쨌든 다녀와야지 벼르는 마음은 꼭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날 안절부절하게 만들었다.  

 

원래는 일손을 두어 명 더 델꼬 갈 요량으로 금요일을 D-day로 잡아놨는데 여의치 않게 되자

더 망설일 것도 없이 집을 나섰다. 마침 남편도 출장중이라 혼자 눈뜬 아침이었다.

일하는 사람이 모양 보랴? 눈꼽만 떼고 추리닝 바람으로 서둘러 나선 시각이 아침 여섯 시 반... 

도착하면 아마 열 시가 다 될 텐데 촌에서 그 시간이면 이미 굵직하게 한따까리 마쳤을 시각이니, 일하러 왔다고 하기도 참 낯뜨겁겠다. 오히려 바쁜데 안 오니만 못한 손님이 되는 건 아닐까?

허나 함박웃음 가득 뛰어나오는 상순씨를 보니 반기는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봐, 오길 잘했잖아..^^

 

마당 한 구석에 쳐놓은 차일 아래에는 손질과 포장을 기다리는 포도상자가 수북이 쌓여 있고 단내 맡고 몰려든 초파리와 진동하는 포도향기 속에서 팔순을 넘기신 시어머님이 포도송이와 씨름하고 계신다.

무쇠팔 무쇠다리 밖에 내놓을 게 없으니 나는 힘쓰는 일을 시켜달라고 했지만 이 일이 더 급하다고 포도수술부터 하란다. (내 힘을 얕본 게 틀림없다. ^^ ) 어르신 앞에서 블러그 얘길 하랴? 일단 목장갑 끼고 수술가위 찾아들고 작업 시작이다. 하루해가 짧다.

 

터진 알들을 찾아 잘라내고 휴지로 과즙을 깨끗이 닦아주라는 미션이 떨어졌는데

내 앞에 놓인 바구니에서 한넘을 꺼내들어 수술을 시작해보니 아이고, 터진 알갱이가 한둘이 아니다.

보이는 대로 잘라내고 나니 치아가 다 빠진 할머니 같다. 이것저것 다 빼면 뭐 팔 게 있다고 이렇게 깔끔시리 잘라내나 그래.... 비록 옆구리가 터진 넘들이지만 이넘들도 어릴 적부터 거름주고 순 치고 봉지 씌우는 정성어린 손길을 하나도 빠짐없이 요구했던 넘들인데.... 그 정성 어쩌라고 이리 허무하게 보내버리나?

 

안타까운 마음에 검수를 하는 상순씨 눈을 피해 웬만한 넘은 살그머니 내보내고 있는데 상순씨가 내 작업바구니를 보더니 배꼽을 잡는다.

"아이고, 지금 하고 계신 건 너무 많이 터져서 포도액즙 짜려고 빼놓은 거예요"

애고,  어쩐지 너무 많이 터졌더라......

삽질로 십수 분 날렸다. ^^

 

"깨진 알갱이에서 나온 과즙이 묻으면 다른 알갱이들까지 다 쩍쩍 갈라져요. 그러니 아끼지 말고 싹 다 잘라내야 해요. 속에 숨어 있는 넘이 없는지도 꼼꼼하게 살펴야 하구요."

이제서야 포도 수술의 개념을 이해한 만옥이, 작업에 속도를 붙여본다. 그러면서 어느새 우리는 블러그 이바구로 접어들고 있다. 활달한 상순씨가 어머님을 자기 페이스로 끌어들인 것인지 어머님이 원래 화통하신지는 모르겠지만(아마도 전자? ^^) 안 듣는 척 하시는 시어머님도 가끔 입시울에 웃음을 머금으신다. 

늘 그녀의 글을 읽으며 나와 유전자가 상당히 비슷한 인간이 또 있구나 생각해왔는데 과연 상순씨와는 너무나 잘 통한다. 오전작업 내내 끊임없이 이어지는 두 여자의 대화에 어머님은 속으로 혀를 차셨을 꺼다. 돌아올 때 "어머니, 시끄러워서 혼나셨죠?" 하니 아무 말씀 없이 빙그레 미소만 지으시던걸. ㅡ.ㅡ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어느새 두 시다. 점심준비하느라고 왔다갔다 하는 상순씨를 보고 있자니 꼭 나를 보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십 년 모시던 시외할머니로부터 "쟈가 쌀 갖고 나가면 바로 밥상 들어와." 하는, 칭찬인지 꾸중인지 모를 소리를 듣곤 했는데....후다닥 후다닥 해내놓는 양이 �케 대견스러운지. ^^

 

시어른들을 모시고 산다는 건 정말 쉽지 않다. 어르신들에게 잘 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것보다 어려운 건 어르신들에게 인정받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기꺼이 넘겨주시는 실권(?)을 장악하고(남편이나 아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일정하게 자신의 공간을 확보한다는 건 보통 내공으로 되는 게 아니지.

그렇다고 지혜와 배짱으로만 모든 걸 다 이룰 수 있나? 상순씨도 까라지려는 자신을 일으켜세우려고 무지하게 노력하고 있는 거 내 다 안다. 연로한 어르신 수발하랴 뻣뻣한 고스방 비위 맞추랴 농사 지으랴 집안 대소사로부터 마을일에 이르기까지 해결사 노릇 하랴... 어찌 고달프지 않겠나.어찌 답답하지 않겠나. (그녀도 한성깔 하는데 말이다. ㅎㅎㅎ)

 

그래도 그녀는 짬짬이 지어낸다. 고운 그림도 지어내고 보석같은 글도 지어낸다. 그녀의 삶 속에서 연단되어 태어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지어낸 흔적이 역력한 그것들을 통해 나는 또다른 나를 본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리.

 

아, 뭐야.... 옆길로 샜다. (나. 과열상태.. ㅎㅎㅎ)

점심을 먹고 드디어 포도밭으로 갔다.

포도밭 그 아지매는 늠름하게 헬멧을 쓰고 나는 살짝 겁에 질린 채 그녀의 등 뒤에 달라붙어서.... ^^ 

 

남들 짓는 절반 밖에 안 짓는다지만 여자 혼자 짓기에는 그래도 너른 포도밭...

아직도 흰 봉지가 즐비하다. '남국의 햇살이 이틀 모자라' 2/5 밖에 못 땄단다. 

포도봉지를 열어 아직 붉은기가 도는 넘들은 내일을 기약하고 완전히 검어진 녀석들만 따라는데

내 눈에 저 정도면 되지 않나 싶은 녀석들도 상순씨 눈에는 불합격이다. 한 녀석 치마 속 들여다보고 갸우뚱, 다른녀석 치마 들쳐보고 갸우뚱.... 한참을 삽질하다 감 잡았다.

내가 과일가게에 가서 포도를 고른다고 생각하면 간단한걸 그랬네.

슬슬 작업속도를 올리고 있는데 벌써 다섯시란다. 가위질 50번이나 했나? 나 오늘 뭐하러 온 거?

(앞글 댓글에 속모르는 쿨와이즈님이 허리 안 아프냐고 물으셨지만... 허리 아플 새도 없이 끝났다.)

 

사실 내 속셈 중에는 늦게까지 일하고 상순씨 저녁수발 끝나길 기다려 찜질방으로 빼돌릴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는데(누울 자릴 보고 다릴 뻗어야지, 이 철없는 아줌마야....) 어차피 올라갈 길이라면 그만 정리해야 한다. 내년에 순 지를 때 와서 제대로 놉 구실 해주지.

돌아가는 길은 서울요금소까지 뻥 뚤려 있었다. 오랜만에 120 놓고 쭈욱 달리는 맛이 최고였다.

솔직이 어제 나는 드라이브를 즐기러 간 건지도 모른다. ㅡ.,ㅡ ;;

 

상순씨, 고마웠어요. 

품 같지도 않은 품 팔았다고 품값까지 받고... 덕분에 김치냉장고가 터질 지경이지만

그보다도 더 고마운 건 활짝 반겨준 상순씨 마음이에요.

 

아, 그리고 원이님...

가는 길목에 배달해드린 건데 택배료가 너무 후해서 입이 찢어지네요. 

그 샌드위치 얼마나 맛있던지... 다이어트라는 사실을 잊고 두 쪽이나 먹을뻔 했다죠.

기회가 되면 또 배달해드리고 싶군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