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이 이야기 2 -- 나의 땅콩이
늦철이 들어서, 기를 쓰고 공부하지 않으면 앞날이 막막하다는 것을 깨닫고 매일 새벽 다섯시에 등교하던 시절이 있었다. 새벽 어둠이 걷히지 않은 때에 같이 등교하여 함께 공부짝이 되면서 시야에 들어온 친구 S.... 알고보니 중학교도 동창이다. 그것도 전교석차 10등 안에 들던 애였는데 동창인줄도 모르고 있었다니....
공부는 무지하게 잘했지만 반 아이들 사이에서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아이.
표정도 없고 말도 없고 친구도 없고... 점심시간이고 쉬는시간이고 짬만 나면 책에 눈을 박고 뗄 줄 모르는 지독한 공부벌레,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가수 이름 하나도 모르고 사는 외계인 같은 아이...
걔는 일찌감치 아이들에게서 제껴진 아이였다. 짝조차도 그 애가 어디 사는지 모를 정도였으니까.
활달한 나는 널린 게 친구였지만 그 애에게 유일하게 학교에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었던 듯하다. 그렇다고 그 점까지 마음을 쓸 정도로 내가 철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
조금 가까워졌어도 말수가 적은 건 여전했다. 하지만 외로웠던 그 아이는 둘만 남아 공부짝이 되어주는 나에게 나름대로는 속내를 조금 내보였던 것 같다. 얼굴이 뽀얗고 해서 잘사는 집 딸인 줄 알았는데 뒤늦게야 짐작하게 되었다. 부모님 모두 벌이가 없었고, 그래서 주변의 도움으로 간신히 꾸려가는 살림이었다는 걸...
아이들이 자기를 공부밖에 모른다고 왕따시키는 데 대해 열등감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라고, 답답한 자신이 자기도 싫다고 했다.
자기는 중학교 때부터 ‘*氏 장학금’으로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를 계속 다니려면 공부를 잘 해야 하는데... 자기는 워낙 머리가 나빠서 남들 세 번에 외울 걸 자기는 한 열번쯤 해야 외워진다... 학교 공부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기 때문에 자기는 아무 생각도 안 한다고.... 그래서 애들이 자기를 싫어하는 것 같은데 어쩔 수 없다고 했다.
함께 붙어다니며 공부하던 때가 고1 후반이었는데 2학년이 되면서 반이 갈리고 그애와는 복도에서 어쩌다 마주치곤 했다. 고2가 되어 딴짓 하던 애들도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하니 그애의 열심은 예전처럼 빛을 발하지 못하는지....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 입에서 오르내리는 전교석차 등수에서 그애 이름이 점점 사라져갔으니까.
그럭저럭 대학입시 때가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애는 나와 같은 대학에 원서를 내게 되었다. 각자 벌어 각자 먹어야 했던 집안 형편상 대학에 가고 싶은 자식은 나름대로 길을 찾아야 했고 우리 육남매는 모두 자기 힘 닿는 대로 자기 방식으로 그 현실에 순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등록금이 싼 국립대학에 가든지, 예비고사 성적보다 낮은 학교의 장학생 선발시험을 보든지 두 가지뿐.... 그러다 보니 형편이 어려웠던 그 애와 내가 같은 대학에서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4년장학생 선발인원은 단 한 사람뿐.
결과는 내가 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그 친구는 5급공무원 시험을 쳐서 동사무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같이 입학시험을 보러 갔던 사이였기에 입학 후 두어 번 학보를 보내주었다. 나도 그 친구로부터 편지 한장 받기도 했지만 도대체가 무슨 얘긴지 짐작도 못하게 모호하게 쓴 편지라서 그저 "이그, 답답이!" 핀잔 한마디 던지고는 잊어버렸고...
그로부터 1년 후 뜻밖에 엉뚱한 곳에서 그 애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알려준 친구도 다른 친구에게 들었다고 했다. 아무도 집도 전화번호도 모르니 확인해볼 방법도 막연했다. 그 애의 마지막길은 누가 보내주었을까... 세상에, 유서 한 장도 남기지 않고 가버렸단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대학진학이라는 목표가 좌절되고, 한참 친구관계를 배울 나이에 폐쇄된 자기영역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기에.... 아마 직장생활도 학교생활처럼 그렇게 힘겨웠는지 모르겠다. 그애에게서 받았던 알 수 없는 편지 생각도 나고.... 그 애의 자살에 나도 책임이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한동안 무거웠다.
만화 땅콩이가 그 애 생각을 일깨워 한동안 가슴이 먹먹하였던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