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選의 추억
1.
소소한 일상을 가지고 떠드는 것이 점점 번거롭게 느껴지는 건.... 인정하긴 싫어도 확실히 나이 탓인 것 같다. 좋고 싫음을 뚜렷하게 밝히는 게 스트레스 해소에는 좋을 망정 살아가는 덴 득될 것도 없을 뿐 아니라 뒤돌아보면 경망스러운 짓이었다는 걸 깨닫기도 하면서 자제해야겠다는 다짐... 그것이 반복되면서 아예 好不好마저도 모호해지는 게 바로 노인증상 아니겠나.
좋게 말하자면 인생의 연륜이 가져다준 지혜요 나쁘게 말하자면 노회해지는 것이지.
지혜가 됐든 꾀가 됐든 간에 그 결과 열정이 식어가고 감수성도 둔화되고 유머감각마저 소멸되어가면 내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런 표정도 없는 잿빛 눈동자만 껌뻑껌뻑 하겠지.
입 다물고 살았던 요즈음을 되돌아보니 뭘 하고 살았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일상적인 일들 말고도 예전 같으면 수닷거리로 삼을 만한 순간들이 꽤 있었건만 메마른 침묵과 함께 날아가버린 것이다.
나이 오십이면 어른임이 분명하지만 처신이나 체면보다는 나의 감성, 나의 이벤트, 나의 세계가 (아직은) 더 중요한 철딱서니 아짐씨는... 다시 경망스러운 수다의 세계로 복귀하기로 한다. '공개일기를 쓰다니, 넌 참 대담해' 하는 어느 벗의 조신한 눈길을 뒤로한 채... ㅎㅎㅎ
2.
오늘은 대통령 선거일이니 대선 얘길 한번 해볼까?
이번 선거는 '꼭 당선됐으면....' 하는 후보가 없기 때문에 그다지 기대도 흥분도 없다.
87년 대선 이후로는 주욱 그랬다.
87년 대선은 민주화항쟁을 이끌어온 역량을 모아 군부독재정치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에... 나름 온몸과 마음으로 참여했던 선거였다. 내가 투표권을 행사할 나이가 되었을 때 신군부가 나의 권리를 빼앗았기 때문에, 87년 대선은 내 생애 첫 대통령선거이기도 했다.
당시 '민주화운동' 진영의 한 단체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동료들과 함께 '공명선거감시단'(아마도 평민당측 선거관리인원 신분을 얻지 않았나 싶다)에 참여하여 투표 당일 투표소에서 부정선거를 감시하는 활동을 하였다. 지금은 안양천변의 공원으로 말끔하게 개발된 광명시 하안동 뚝방동네의 한 투표소였다. 나를 포함한 감시단원 일부는 투표소 안으로 들어갔고 대부분은 골목골목을 돌며 투표소 주변에서 자행된다는 매표행위를 감시하고 있었다.
순찰을 돌고 있는 것은 우리뿐이 아니었다. 공안정국의 백골단도 투표소 주변에 진을 치고 우리 같은 '불순분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오후 네 시쯤 드디어 사고가 났다.
투표소 안에 있느라고 상황은 보지 못했지만 기표용지 여러 장을 들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실랑이를 하던 감시단원이 백골단에 잡혀 봉고차에 실려갔다고 한다. 끝에 쇠갈쿠리를 매단 몽둥이에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며 끌려갔단다. 나쁜 소식은 그뿐 아니었다. 멀지 않은 구로구청 투표소에서도 부정의 의혹이 있는 투표함을 보전하기 위해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고 했다.
투표가 끝난 뒤 사람들은 부정선거 시비가 일어난 구로구청으로 '투표함을 사수하러' 몰려갔지만 여섯살박이 아이를 탁아소에 맡겨둔 엄마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개표상황과 구로구청 상황은 밤이 새도록 끝나지 않았고 TV를 켜놓은 채 앉았다 섰다 누웠다 하며 밤을 하얗게 밝혔는데....
아, 악몽이 따로 없었다... 믿기 어려웠다. 새벽녘에 든 깜빡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건
합창 '희망의 나라로'를 배경으로 만면에 웃음을 띄며 손을 흔들고 있는 노태우의 모습...
그리고는 92년 대선....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며 겨울을 났던 사람들이 노선투쟁으로 사분오열하며 드러낸
박약한 정치역량을 원망하고, 정치권력 앞에서 변질되어가는 과거 '동지'들의 모습에 실망했던...
97년과 2002년 대선 때는 중국에 있어 참여하지도 못했지만 이미 나는 정치라는 넘에 대한 기대는 환상이라고 여길 만큼 냉소적으로 변해 있었다.
3.
급기야 2007년 대선에서는 안 될 게 뻔한 후보에게 투표하기에 이르렀다. 아니, 표는 찍지만 그가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 역시 준비 안 된 대통령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대통령 꿈이라도 꾸려면 우리나라에선 어디고 지역기반이 있어야 한다. 자기 기반이 없으면 기반이 있는 후보에게 묻어가면서 그 후보의 정책과 비전을 추동해내면 안 되나? 실제로 어떤 속사정 때문에 그리 못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정치력 부족을 충분히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아무리 훌륭한 비전이 있고 아무리 깨끗하고 아무리 현명해도 정치력이 부족하면 말짱 꽝이다. 노무현 대통령 보면 모르겠나?
다만 이번 선거를 계기로 그가 몰고온 신선한 바람이 정치권 구석구석에 확산되길 바랄 뿐이다.
일찍 볼일 보러 나가는 아들넘 때문에 아침 7시도 되기 전에 세 식구 나란히 투표장으로 출동....
허나 슬프게도 이 범생이 가족이 17대 대선일에 갖는 관심은 고작 '후보별 득표율점치기 게임' 정도다.
명박이가 싫지만 내가 싫어도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니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누구처럼 '국민이 노망났다'고 가슴을 치고 싶은 기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국민의 뜻'을 무시하는 것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주관적이고 오만한 태도 아닌가(석고대죄도 부족하거늘...).
제발 정치들 좀 잘 해라. 냉냉한 나를 좀 감동시켜다오!!
5년 후엔 기대와 흥분 속에서 18대 대선을 맞고 싶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