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xico9 - Palanque1
로니는 오늘 수미데로 계곡 갔다가 밤에 빨렝께로 갈 테니 정글 팰리스에서 꼭 만나잔다. 혹시 방이 없으면 다른 곳에 방을 잡더라도 메모 남겨두라고 확인에 또 확인이다. 스케줄이 어긋날 때마다 주고받는 농담 ("call me!") 한 마디 남겨놓고 나 먼저 숙소를 나왔다.
이곳으로 올 때 도착했던 아우또부스 터미널로 가려다가 길 건너 사선 방향에도 뭐가 하나 보이길래 가보니 '아우또부스 익스프레스'라는 이름의 또 다른 터미널이 있다. 아우또부스 터미널로 들어오는 버스들보다 허름한 버스들이 서 있길래 더 싸겠구나 싶어 물어보니 80페소란다(아우또부스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버스들은 130페소). 시간은 30분밖에 차이 안 난다. 그럼 당연히 여기서 타야지.
점심으로 먹을 사과와 도넛, 물 한 병 사들고 버스에 올랐다. 예정 출발시간보다 20분 정도 늦게 출발했지만 어차피 오늘 안으로는 도착할 테니 상관없다. 터미널에서 만난 독일인 남매와 노닥거리다 보니 어느새 버스는 아름다운 산길로 접어들었다.
눈부시다고 해야 하겠다. 노란꽃 보라꽃이 여기저기 색색으로 수를 놓고 있는 산비탈의 싱싱한 초지에 소들이 돌아다니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듯 맨발에 가방 멘 꼬마가 돼지들을 쫓아다닌다. 이곳에선 사람조차도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산비탈을 깎아 닦은 터에 송판으로 지은 집 마당에서 어린 엄마가 기어다니는 딸네미 붙들고 머리 빗기느라 애를 쓰고 있다. 집 뒤로는 산봉우리들이 우람하게 병풍을 쳤고 집 앞마당엔 초록빛 융단이 깔렸다. 드넓은 구름바다...영락없는 필리핀 코딜레라 산맥의 어느 마을이다.
산을 넘으니 Ococinco. 자파티스타 공동체 푯말도 보이고 그들의 깃발이 펄럭이는 병원도 보이고 초등학교 벽에도 정의* 평화 * 빵을 원한다는 구호가 기세좋게 적혀 있다. 밭에서 일하고 있는 순해 보이는 농부들을 새삼스레 바라본다. 과연 이들이 그 싸움을 겪고 숨어들어온 사람들이란 말인가?
군데군데 총 든 정부군이 서 있긴 하지만 동네 아저씨들이 공원에 놀러나온 듯 무심한 분위기다. 허나 밤이면 게릴라가 가끔 출몰하고 작은 총격전도 벌어지는 살벌한 지역이란다.
이제 길은 울창한 정글 속으로 들어간다.
이 길을 밤버스로 오겠다고? 절대 비추다. 빨랑께는 이 길을 보기 위해서라도 꼭 와야 한다.
Agua Azul과의 갈림길을 지나니 가게들이 나타난다. 이 동네 전통복장은 흰 바탕에 붉은 꽃무늬다.
3시간 30분 경과. 터미널에 도착하니 길 건너에서 꼴렉티보(합승) 택시가 엘 판첸!을 외친다.
10페소 내고 올라앉았다. 10분쯤 달려가니...
빨렝께의 숙소 그리고 정글
정글 속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걸어들어가니 정글 팰리스 리셉션이 나타난다.
숙소는 리셉션에서도 더 걸어들어가야 한다.
밤 늦게나 도착할 꺼라던 로니와 로베르트가 먼저 와 있다. 수미데로 계곡 안 가기로 하고 버스 터미널에 갔는데 암만 찾아도 없더라고, 어디서 뭘 타고 왔느냐고 궁금해 하는데 끝까지 얘기 안해줬다. ^^
로니가 산끄리스또발에서 먹다 남은 식량을 몽땅 들고 와 다 먹어치워야 한다고 해서 케찹 뿌린 소시지로 속 채운 빵을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엘 판첸 지역의 숙소들은 모두 방갈로 형식이다. 부엌도 없고 매점도 없고(물 한 병이라도 센트로로 나가든지 레스토랑에서 비싸게 사야 한다) 시설도 그저그렇지만 가격이 싸고 무엇보다 정글 분위기가 물씬 풍겨 여행의 정취를 돋궈준다. 로니는 들떠서 새소리, 벌레소리 녹음한다고 어두운 숲속을 누비고 있다.
샤워하고 한 잔 하러 레스토랑 구역으로.....
대충 이런 분위기
이런 곳에 라이브가 빠질 수 없지... 주로 Bob Marley풍의 음악들이다.
여기선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다. 웃통을 벗어도 맨발로 다녀도...
데낄라 시음 중. 소금을 핥은 다음 데킬라를 마시고 라임을 핥는다.
원래는 소금을 손등이 아니라 함께 마시는 연인의 쇄골 우물에 놓아야 하는 거라는데...
남자 쇄골 쪽에 우물이 있나? ^^
다들 조금씩 취했다. 축축한 정글의 어둠이 알콜만큼이나 뜨겁다.
안주 삼아 피자 하나 주문하자고 해서 내가 버섯 들어간 게 어떠냐고 했더니 '버섯이 필요해?' 하면서 로베르트가 박장대소한다. 오전에 인근 숲속을 돌아다니다가 버섯 캐는 히피들을 만났다는 거다. 이 지역에는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버섯을 즐기려고 여행온 애들이 많다나. 독일의 유명한 밴드가 쓴 곡 중에도 '버섯을 먹을 때~ 어쩌구' 하는 노래가 있을 정도로 잘 알려진 버섯이란다. 그렇게 그 버섯 먹고 싶으면 소심하게 피자에나 뿌려먹지 말고 내일 유적지 갈 때 가방 하나 메고 나가라, 가격이 꽤 센 편이니 팔아서 여행비용에 보탤 수도 있을 것이다...하고 놀려댄다. (이후로 우리의 농담에 '너 버섯 먹었냐?'가 추가되었다.)
범생이처럼 보이는 로니에게도 방탕(!)하던 시절이 있었다. 클럽에 드나들고 약도 먹고.... 결국 음주운전으로 대형사고를 치고 정신을 차렸는데 그 전과기록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고도 좋은 직장 얻기가 쉽지 않아 별볼일 없는 직장에 다니며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어머니의 격려로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지금은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있는데, 철없던 시절에 혹독한 수업료를 치른 덕분에 오히려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단다. (어쩐지 제 또래들에 비해 어른스러워 보인다 했더니...)
한국사람 개 먹지? 하면서 자기 애견이라는 주먹 만한 스피츠를 보여주는 로베르트.
또 결혼 안 해준다고 코를 물어뜯은 여자친구 얘기 시작이다. 2년째 동거중이고 뒤늦게 시작한 그녀의 학비도 전액 대주고 있고 세상에서 그녀 말고 다른 여자를 생각해본 적도 없다면서 결혼할 생각은 없다니....그래서 일주일에 두어번씩 코를 물어뜯기면서도 꿋꿋하게 버티고 있단다. 너 그러다 그 여자 놓친다, 하니까 상관없단다. 그 코 물어뜯는 버릇은 절대 못고치기 때문에 딴 남자 만나도 화가 나면 또 물어뜯을 것이고 그거 참아줄 남자는 자기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자기에게 돌아올 꺼라고 웃지도 않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보여주는 그녀의 사진은 단정한 흰 바바리코트에 검은테 안경을 쓴 40대 초반의 지적인 여성. ㅎㅎ
사적인 얘기는 잘 안 하는 서양애들이 이렇게 흉금을 터놓는 건...
데낄라 때문이었을까 어둠 속에서 고즈너기 우짖는 새소리 때문이었을까.
정글의 밤길을 밝혀주는 작은 등불
우리 옆집
황소개구리닷! (두꺼빈가?)
방 안에서 도마뱀을 세 마리나 만났다.
원숭이도 출몰하여 시끄럽게 짖어댄다
볕은 좋은데 빨래는 잘 안 마른다
빨렝께 유적지
일곱 시인데도 레스토랑이 문을 안 여니... 산끄리스또발에서 챙겨온 지겨운 빵 하나씩 나눠먹고 유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뜨거워지기 전에 돌아올 셈이었다.
물을 샀는데 큰병 밖에 없어서 낑낑 들고 가다 유스호스텔 건너편 꽃이 많이 핀 나무 뒤에 숨겨두었다.
벌써 따가워진 햇살을 등지고 걷는데 땀에 줄줄 흘러내린다. 이제 겨우 아침 여덟 신데 이리 더우니 클났다.
2킬로 정도 걸으니 오른쪽에 박물관이 있고 길에는 차단막대가 내려져 있다.지나가려면 20페소 내란다.
여기서부터 1킬로 이상 걸어야 한다. 차들이 계속 올라가며 타고 가라고 외친다. 길은 어느새 오르막으로 변해 있지만 이쪽은 그늘이 시원하게 드리워져 걸을 만하다.
아침운동 코스로 딱이야! 하며 열심히 걷는다. 언젠가부터 로니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정문에 도착하니 로베르트가 이제 자기는 돌아간단다. 자기는 3주 전에 여기 왔었다고.... 그럼 새벽부터 힘들게 여길 왜 왔냐니까 운동 삼아 왔단다. 그럼 빨렝께엔? 로니 따라 왔단다. 아무튼 연구대상이다.
입장료를 아까 낸 줄 알았더니 정문에서 48페소를 또 받는다. 앞에서 받은 20페소는 이 빨렝께 정글지역 관리비라나.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 진초록 풀밭과 잿빛 신전들....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로니랑 찢어졌다 만났다 하면서 2시간 정도 유적지를 헤맸다. 처음에 영어가이드가 있는 팀을 살금살금 따라다녔는데 그러다간 다리 끊어지겠다 싶어서(유적이 오죽 많아야 말이지...) 템플 II 뒤로 난 오솔길에 숨어 그늘을 즐겼다. 난 유적보다 숲에 더 끌리는 것 같다. 로니도 궁전 뒤쪽 그늘에 앉아 책 읽기 시작. 자기는 배만 안 고프면 하루종일 있을 거니까 놀다가 먼저 내려가란다. 나는 벌써 배가 고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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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를 나온 시각은 11시. 오던 길 되짚어 오는데 박물관 건너편에 후문이 보인다. 엥? 후문이 있었어?
입구를 지키는 아저씨에게 사용했던 표를 보여주고 후문으로 들어가보니... 우와, 여긴 더 멋지네!
그늘진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정다운 시냇물과 작은 폭포가 나온다. 숲 냄새도 더 진하다.
Agua Azul이나 Misol Ha에 따로 갈 필요가 있나. 여기가 Agua Azul(푸른 물)이지.
내려오는 길에 인터넷에서 본 마야벨 간판이 보이길래 궁금해서 들어가보니 아름다운 캠핑장이다.
단체로 캠핑을 왔는지 멕시코 고등학생들이 텐트를 치고 캠핑카도 여러 대 세워져 있다. 아유, 이런 데도 있었네, 여기서 묵을껄.... 하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는데 상냥한 아줌마가 어디 묵고 있냐고 말을 건다.
미국 마인주에서 왔다는 수수해 보이는 아줌마 트레이시.....커피 한잔 하겠냔다.
좋아라 따라가서 수다 떨다가 저녁 초대를 받았다. 오늘 저녁에 파티가 있는데 재료는 이것저것 있으니 와서 한국음식 한번 해보란다. 내 친구가 둘이 더 있다니까 환영한다고 같이 오란다. 이게 웬 떡?
조카와 교대로 운전하며 미국 마인州 에서부터 끌고내려왔다는 트레이시의 van
캐나다 할아버지가 직접 개조했다는 승합차 내부. 침대와 싱크대, 냉장고...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아유, 깨물어버릴 수도 없고...
최연소 캠핑족
캠핑장 한쪽에 제법 넓은 수영장도 있다.
물론 이 캠핑장에는 도미토리도 있는데 가격은 엘 판친 쪽 숙소보다 살짝 비싸다.
비누방울 놀이에 푹 빠진 엄마와 아이들... (뒷편 얘기의 주인공들이니 눈여겨보실 것)
나랑 인사 나누기 전에 찍어서 몰랐는데 이제 보니 트레이시가 자기 차 뒤에 앉아 있군 그래.
숙소로 돌아와보니 로니는 아직 안 돌아왔고 로베르트만 침대에서 뒹굴고 있다. 엊저녁부터 시작된 배탈이 나아지는 기미가 없어 점심도 안 먹었다네. 그래도 저녁 초대에는 가겠단다. ㅎㅎ
그냥 얻어먹을 수 없으니 우리는 맥주나 사가기로 하고 센트로에 나가려는데 버스가 없다. 한참을 기다리다 지나가는 자동차를 히치했다. 까쎄드랄 호텔에 지배인으로 근무하는 아저씨 차다.
맥주 10캔 사고 내일 플로레스 갈 때 아침으로 먹을 간식도 좀 사고 수박도 한 통 샀다. 돌아와 쪼개보니 어찌나 달고 맛있던지. 한나절 땡볕에 타들어가던 몸이 되살아났다.
트레이시와 약속한 다섯 시가 다 되어가는데 로베르트는 다시 배가 아프기 시작해서 못가겠다고 하고 로니는 도대체 어딜 갔나. 휴대폰이라도 있으면 그리로 직접 오라고 할 텐데....
할 수 없이 그 무거운 맥주짐을 짊어지고 혼자 마야벨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