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중남미

Argentina6 - 민수네

張萬玉 2008. 8. 23. 14:58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하던 날 딱 하루 자고 숙소를 옮겼다.

재주껏 2층침대로 올라가고 재주껏 따뜻하게 자라던 첫날의 무성의는 이튿날도 아침부터 계속됐다.   

아침을 제공하는 호스텔이라 당연히 아침을 먹으려고 내려가니 (그것도 8시나 돼서) 밥 먹으러 온 사람은커녕 스탭도 없고 식탁 바로 앞 바닥에서 금발의 선남선녀가 꼭 끌어안은 채 꿈나라 여행중이다. 

잠시 후 나타난 스탭이 나를 한번 더 놀라게 한다. 밥 안 주냐니까 엉, 너 밥 먹을꺼야? 하는 거다.

당연하지, 준다면서? 했더니 '네가 먹겠다면' 주지... 그러더니 마른 바게트빵 조금 썰고 레체 데 둘쎄(땅콩버터처럼 생겼는데 캬라멜 맛이다)와 1회용 버터 하나 놓아주고 커피 한잔, 그거 준비하는데 20분도 더 걸렸다. 앞에서 사람이 밥을 먹고 있는데 단꿈에 취한 선남선녀는 여전히 미동도 없고.....

아마 친구가 있었다면 씨익 웃고 지나칠 수 있을 정도의 무례였지만 혼자여서였을까, 순간 삐졌다.

그래, 밤샘음주하고 해가 중천에 걸리도록 잠에 취해 있는 호스텔.... 어울리지 않는 early bird는 이쯤에서 사라져주지. 여기 아니면 내가 잘 데 없을라고?

 

엊그제 이과수에서 마주쳤던 한국청년이 권해준 민박집 주소를 들고 지하철에 올랐다. 볼리바르광장에서 A선으로 갈아타 Alberti역에서 하차, 내리막 쪽으로 조금 걷다가 좌회전하여 200미터 정도 들어가니 '민수네'라고 써붙인 작은 글씨가 보였다(여행노트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주소도.... 죄송). 얏호! 나도 이제 우리 동포 만나서 우리말도 실컷 떠들고 남부럽지 않게 쌀밥에 김치 배 터지게 먹을 꺼야.     

 

민수네 들어가는 골목. 한글 쪽지(간판이 아님)를 발견하려면 한 집 한 집 초인종 부근을 잘 살펴야 한다.

 

'민수네' 거실.

 

벨을 울리니 키도 크고 코도 큰 서양 청년이 나왔다. 

한국인 민박집이지만 현지인을 매니저로 고용했나 했는데 알고 보니 쥔 아주머니의 큰아들이다.

 

대개 한국인 민박은 식사를 한국식으로 제공해주고 한글 인터넷도 사용할 수 있고 고급 여행정보도 제공받을 수 있고 무엇보다도 쌀쌀맞은 동네에서 지친 마음을 한국식 人情으로 달랠 수 있다는 큰 장점에도 불구하고 보통 호스텔보다 두 배 가까이 비싸기 마련이라서 주머니가 가벼운 배낭여행자들(혹은 해외에 나와서까지 한국식 찾지 않겠다는 자주파 여행자들)이 비켜가는 곳이다.

그러나 '민수네'는 가격이나 서비스 면에서 보통 호스텔과 다를 바 없다. 아침 불포함 25페소(여행노트를 잃어버려서 정확히는 모르겠다)에 더운물 잘 나오고 침대 깨끗하고 한글 인터넷 쓸 수 있고 부엌도 쓸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호스텔들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장점은 근처에 한국식품점이 있어서 라면, 김치, 쌀, 김, 고추장 등등 집 떠나면 貴物이 되는 한국식품들을 손쉽게 구해 실컷 해먹을 수 있다는 것. 

 

'민수네' 식당.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부엌이 있다.

여느 호스텔처럼 자기가 구매한 식품들은 비닐봉지에 싸서 이름을 써서 냉장고나 선반에 보관한다.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조기구이 냄새가 고소하게 코끝을 자극한다.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꼬마가 맛있게 밥을 먹고 있었다. 꼬마의 수저 위에 얹힌 윤기 자르르 도는 흰 쌀밥과 노르스름한 조기 살점! 뺏어라도 먹고 싶었지만 어른 체면에 그럴 순 없고.... 바로 식품점으로 직행하여 몇 가지 챙겨왔다. 

헌데 너무 오랜만에 '매운맛'을 톡톡이 보여줬나? 남부럽지 않게 신라면에 김치 죽죽 찢어먹고는 다음날까지 흰죽만 먹어야 했다. ㅜ.ㅜ

 

천장 높고 오래된 마루가 삐걱거리는 콜로니얼 건물이 운치는 있지만... 단점은 너무 어둡다는 것이다.

 

성수기가 아니라 그런지 빈 침대가 좀 있었다.

내 룸메이트는 탱고를 배우러 온 삼십 대 아가씨와 우루과이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휴가를 내어 부에노스로 놀러왔다는 여대생...그러나 탱고 아가씨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내가 머무는 내내 침대에서 요양중이었고 여대생은 부에노스에 친구가 있어서 그런지 딱 두 번 잠깐 얼굴을 보았을 뿐이다.  

 

  

식당과 더불어 사랑방 구실을 톡톡이 했던 뒷베란다의 고양이집 앞마당

 

저녁이 되자 '민수 어머니'가 오셨다. 13세에 이민을 온 교민 1세대. 나보다 연배이신데 말투며 스타일이며 행동이며 사고방식까지 나보다 더 젊으신 것 같다. 독일계 아르헨티나인을 만나 결혼해서 3남을 두었는데 '민수'가 막내아들이란다. 큰아들 아리엘과 둘째아들..(아, 이름이 뭐였더라?)이 교대로 민박집 운영을 거들어준다고 했다. 민수는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니 한국에 있단다. 유학 갔나요? 물어보니....

 

인물사진  바로 이 김민수였다. 2006년과 2007년 아시아 남자농구 선수권대회에서 국가대표를 

                                 지냈던 SK 소속의 프로 농구선수.... 나는 모르지만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다.    

 

최연소 배낭족 한규, 씩씩하고 소탈한 한규엄마 '멜라니아줌마'와 기발하면서도 듬직한 한규아빠 '덩헌'씨.

 

각각 대기업과 유명 포탈에서 일하던 유능한 맞벌이 부부는, 함께 있고 싶어서 결혼했지만 오히려 함께 있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여유없는 생활 속에서 회의를 거듭하던 끝에 '이 쳇바퀴에서 벗어나서도 살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2년간의 유예기간을 갖고 있는 중이란다. 막 걸음마를 뗀 아이를 데리고 미국에서 자동차를 빌려 시작한 '길 위의 삶'은 멕시코로 이어졌고, 길고 긴 남미대륙을 횡단하여 아르헨티나의 남단 파타고니아를 돌아 아르헨티나에서 계속되고 있다. 한규 아빠는 아직도 아르헨티나 여행에 대한 색다른 꿈을 꾸고 있으니, 그것은 자동차로 달려갔던 파타고니아를 이번엔 말을 타고 가보는 것이다.

 

한규 얘길 빼놓을 수 없지. 꼬마가 거친 여행길에 적응을 잘 하는지 궁금했지만 곧 물어보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민박집에서 제일 바쁜 인물이거든.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물에 가든 산에 가든 사람들로 시끌벅적하든 상관없다. 어디 데려다놔도 자기 앉을 자리와 놀꺼리는 확실하게 확보하는 깜찍한 녀석, 가끔 어른 같은 말투로 우리를 웃겨준다. ("나 오늘은 좀 쉬어야겠어. 게임이나 좀 하면서......" ㅋㅋㅋ)  

 

내가 떠나던 날 한규네도 빨레르모 지구로 떠났는데, 아르헨티나에서는 한번 '살아보려고' 민박집을 준비하고 있다더니 본격적으로 준비에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내가 돌아온 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입성한 친구가 한규네 민박집에서 묵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자신에게 맞는 삶을 찾아 치열하게 살고 있는 젊은 부부의 모습이 너무 좋아보였고 한편 부럽기도 했다. (for more information..... http://cafe.naver.com/nammisarang/809 )

 

나와 같은 날 '민수네' 입소한 태권도 커플.

패기가 넘치는 멋진 청년들이다. 함께 탱고 공연을 보러 갔었다.

세계 곳곳에서 한국과 태권도를 선양하고 있는 선배님들 덕분에 짬짬이 시간을 쪼개 견문을 넓히고 있다고 한다. 이번 여행도 두어 주 만에 리마에서 파타고니아까지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섭렵하고 돌아가는 길이란다.

 

홍대앞 클럽 밴드에서 베이스를 연주하는 그녀.

차분해 보이지만 열정과 대담함을 품고 있는 멋쟁이다. 짧았지만 죽이 척척 맞았던.. 인상적인 만남이었다. 

 

화가 총각. 유머러스하고 독특한 데다 겸손하기까지.... 

그가 빨고 있는 것처럼 연출한 공갈젖꼭지(헉, 이거 금칙어에 걸리는 거 아닌가? 공식 이름을 몰라서리..)는 사진 왼쪽 장발 총각의 세 살박이 조카가 혼자 여행하는 삼촌을 불쌍히 여겨 외로울 때 사용하라고 제 애장품을 내어준 것이란다. ^^   

 

음... 이분은 인터넷 검색에 이름 석 자를 치면 주르르... 뜨는 유명인사시다. 생업은 광고 디자이너이지만 암만해도 사진가, 혹은 작가로 굳어지지 않을까 싶다. 

 

한 직장에 2년 이상 있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2년에 한번씩 사표를 쓰고 재충전해왔단다. (이거 아무나 못한다. 언제라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이 많기에 가능한 일일것이고, 더불어 업종 자체가 끊임없는 감각의 업그레이드를 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정말 부러운 행운아다.)

하하, 그런데 알고보니 생판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여행 떠나기 전에 동행을 구하려고 시도하다가 나처럼 사전동행 구하는 글을 보고 방문했던 블러그 주인장이었다. http://blog.naver.com/maldive9 

사진 솜씨나 글 솜씨는 직접 확인하시면 되니 여기서 뭐라뭐라 설명하는 건 사족이 될 테고.... 아무튼 藝氣가 흘러넘쳐 입만 열면 그대로 글이 되고 그림이 되는 사람과 함께 와인잔을 기울일 수 있었던 것도 내 넘치는 人福 중 하나였겠다.   

 

이틀 밤을 내리 마셨다. 수퍼마켓에서 사온 gato negro에 낭만을 칵테일하여....

 

이 시간 이 장소에는 우연히도 로맨티스트들이 다 모였다. 무용가, 편집장, 화가, 모험가, 사진가....

한올을 다투는 감각의 직물들을 짜는 장인들간의 대화는 입회와 경청 만으로도 짜릿하다.    

화제는 태풍이 휩쓸고 간 스리랑카 어촌마을의 일주일로부터 숙소 창문을 열면 바로 천국이 펼쳐지는 다즐링의 아침으로, 남미여행에서 절대절대 빼놓을 수 없다는 파타고니아로, 구덩이를 파놓고 여행객들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무서운 이웃들 때문에 유일하게 버티던 호스텔이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는 베네수엘라로 종횡무진 하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비련의 영화배우 이은주 얘기로, 군대 시절의 포복절도할 에피소드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게 만드는 MB 얘기로.... 도무지 끝이 없다. 밤 열한 시면 침대로 직행하는 나도 매일 새벽 두세 시를 훌쩍 넘기고 말았다.

  

베란다에서 숙소 앞 골목을 찍어보다 우연히 잡힌..... 전혀 낯설지 않은 모습의 노부부.   

어딜 가려고 대기중이신가요? 저도 내일은 보고타로 떠난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온 편지

 

(중략) 

여행은 아직 계속되고 있습니다. 보고타 이후 리마~쿠스코~푸노~코파카바나~라파즈~팜파스 투어~라파즈~코챠밤바~포토시~우유니투어~칠레 산 페드로~산티아고~멘도사~부에노스아이엘스~이과수.....

현재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고 이제 우루과이, 파타고니아, 브라질 등의 여정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기상조건이 불안정하여 파타고니아행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르헨티나 공군 비행기인 라데항공편조차 선뜻 나서지 못합니다. 버스편은 눈이 한번 내리면 자동차가 묻힐 정도로 내리기 때문에 엄청 고생한다고 하고...

파타고니아가 쉽지 않으니 대신 브라질 리오 이파네마로 가서 보사노바의 창시자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흔적이라도 느끼고 올까 생각중인데, 이곳에 있는 후배들이 골프나 치면서 쉬다가 돌아가라고 해서 일단 우루과이 몬테비데오는 돌아본 후에 목요일에 골프장에 나가보고 맘에 들면 그럴까도 생각중입니다. 하여튼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점으로 하여 집으로 가기 전까지 지낼 생각입니다.

리마에서부터 한인 군단이 형성되어 적을 때는 5인, 많을 �는 10인에 달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며 다녔습니다. 어린 이스라엘 애들한테 기죽지 않고, 숙박비와 투어비용도 만족스럽게 깎고,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물론 나는 최연장자였습니다. 라파즈에서 볼리바이 팜파스 투어에 나섰고, 그곳에서 50회 생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생일 기념으로 처음으로 50볼리비아노 주고 파마를 하고, 핑크돌고래가 노니는 강에 뛰어들어 수영도 하고... 그렇게 발악을 하면서 내 나이가 50이라니... 수없이 되뇌어 보았습니다.

보고타 이후로 계속 고산지대에 지낸 것이 무척 힘들어, 젊은 친구들과는 코차밤바에서 헤어져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산타 바바라를 거쳐 체 게바라 최후의 장소 까지 가본다고 하던데, 저도 마음 같아선 동행하고 싶었지만 빨리 고산지대를 벗어나고 싶어서 혼자 되기로 마음 먹고 우유니로 갔습니다. 비포장에 엄청 추웠지만... 풀 한포기, 구름 한점 없는 활량한 형형색색의 지형들을 보면서 다른 별에 온듯했던 2박 3일...

칠레는 볼리바아에 비해서는 문명국이지만, 스페인 식민 도시 흔적에 대해서도 흥미를 잃었고... 사람들은 돈독 올라 있고... 3일을 보내고 바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직행했습니다.

체 게바라 �문에 아르헨티나로 이민온지 19년 된 후배가 있어서 덕분에 다른 동문들과 연락이 닿아 4명이 동문회를 열었지요. 고기와 와인... 지난 일주일 동안 주식이었습니다. 맛있습니다. 그동안의 허기를 고기로 채우려나 봅니다. 그리고 심심하면 한식당으로 가서 속을 달래고... 오늘도 여행중에 만난 사람들 소집해서 한식당에서 소주한잔 하기로 했습니다.

한 때 세계 6위의 강국이었던 이민의 나라 아르헨티나, 이민자들이 느꼈을 향수, 이를 반영하는 축구와 탱고로 대표되는 문화... 지금도 트럭 물류 노동자들이 파업 중이지만 거의 무상에 가까운 교육과 의료 등의 사회주의적 시스템, 그러면서도 엄청 심한 빈부격차...등등 느끼는 것이 많습니다. 아르헨티나는 남미라기보다는 유럽의 느낌이 강합니다. 그런데 패션을 비롯한 소비수준을 들여다 보면 짝퉁이란 느낌이 들지요. 그시절의 가리봉 패션 같은....

이제 50입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 사람을 보는 관점에서 큰 실수를 하지 않을 나이가 됐지요. 습도가 높아 뼛골이 시리고, 연일 계속되는 흐린 날씨는 고기와 와인을 찾도록 부추기고, 고기를 엄청 먹어대며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섹스와 탱고와 축구에 몰입하는 이곳 사람들을 보면서, 나의 지나온 삶과 전혀 다른 유형의 이들의 삶을 조금씩 이해해 가고 있습니다. 특히 사람들 사이에 교감과 소통 방식... (나는 그동안 너무 언어, 논리에 집착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눈빛, 호흡, 몸짓, 춤과 노래, 몸이 원하는 소통방식 등등.... 제게는 이런 것들이 무척 새롭게 느껴집니다.

종종 블로그에 들러서 글을 보고 있습니다. 여행정보도 유용하지요. 저는 그런 것들이 잘 정리가 안됩니다. 저는 50의 정서... 그것에 너무 몰입해서 �론 우울하고, 부러운 시선으로 다른 유형의 삶에 대하여 바라보다가 정신을 빼앗겨버리나 봅니다. 
형님께 안부 전해주십시오. 건강하시고.... 사람 사이에 언어와 논리 이외의 소통방식에 대하여 충분히 느끼시는 여행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 겨울, 흐리고 뼛골이 시린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고기와 와인을 앞에 놓고 ET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