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gentina7 - To Bogota
보고타행 비행기에 오르기까지 진땀 깨나 흘렸다.
우선 체크아웃할 때부터 조짐이 좋지 않았다. 숙박비를 계산하는데 10페소를 더 내란다. 체크아웃 시간이 열두 시인데 지금이 두 시니까 오버타임에 대한 것을 치러야 한다는 거다.
아차, 이 집에도 체크아웃 시간이 있었구나. 집처럼 너무 편하게 지내다 보니 기본적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실 언제 나가든지 짐 싸놓고 숙박비만 제시간에 계산했다면 상관없었을 텐데... 완전히 나사가 풀려버린 게야.
누굴 탓하랴마는... 그래도 겨우 두 시간 늦었다고 추가요금을 내라니...
10페소면 4달러도 안 되는 돈이니 따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만 야박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쫀쫀해진 데는 사실 이유가 있었다. 출국을 앞두게 되면 떠날 나라의 돈이 남아돌지 않도록 추가로 현금인출을 안 하고 버티는데, 얼마나 남았느냐에 따라 단돈 몇 달러 지출에도 신경을 써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주인아주머니나 그동안 낯을 익힌 큰아들이 있었으면 좀 봐달라고 애교나 한번 떨어보겠지만 상대는 한국말은커녕 영어도 잘 못하는 낯선 둘째아들..... 별 수 있나, 야속한 기분을 꾹꾹 누르며 추가요금을 치렀다. 아침에 한규네가 체크아웃할 때 아직은 엄마와 한침대를 쓰는 다섯살박이 한규 몫으로 1인 숙박비를 제대로 물리는 걸 보고 한국인 민박이라지만 한국식 민박은 아니다... 생각했었는데 내 경우도 '얄짤'없군.
사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상식으로 통하는 규정을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뭉갠다면 참 밉상이겠다. 이해는 하지만 타향이라 그런지 은근히 심정이 상했다.
두번째 난감 역시 돈 문제였다.
공항까지 가는 택시요금이 20페소라고 들었는데 미터기는 진즉에 20페소를 넘어버렸고, 공항에 도착하니 48페소에서 멈춘다. 여기에 톨게이트비까지 포함하여 60페소, 약 20달러 정도를 내야 한다. 내게 알려준 사람이 아마 20달러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현지화가 아니라 달러로 계산을 한다)
'택시비 20페소'로 정해둔 계산서가 완전히 빵꾸났다. 원래 계산대로라면 30페소 정도가 남아 공항에서 우아하게 군것질을 하는 것으로 아르헨티나 페소를 소진하는 건데.... 단돈 14페소가 모자라 비상금 50달러를 내고 100페소 가까운 아르헨티나 페소를 잔돈으로 받았다. 공항사용료는 달러로만 받는다고 하니 막판에 생긴 이 막대(!)한 잔돈을 어쩌면 좋을꼬. 수수료 손해보며 재환전 하든지 그게 억울하면 뭐라도 사서 소진해야 한다. 배낭족 수칙에 따라 아끼고 아끼던 달러가 손가락 사이로 허무하게 빠져나가는 순간이다.
세번째 난감.... 이게 대박이었다.
보딩 티켓을 받으려니 항공사 직원이 '보고타에서 나가는 비행기 티켓'을 보잔다. 그건 아직 안 샀다고 하니까 그게 있어야 보고타 들어가는 비행기의 보딩 티켓을 줄 수 있다네. 어차피 나가는 티켓이 없으면 입국심사에서 걸리게 되니 비행스케줄을 바꾸든지 여기서 보고타 출국 티켓을 끊으란다.
보고타 들어가서의 일은 당신들이랑 상관 없잖아, 걸리더라도 내가 걸리는 건데? 하고 항의했더니 항공사 간에 무슨 협약인가 있어서 규정상 출국티켓이 없으면 입국티켓도 못 내어주게 되어 있다고 딱 자른다.
아니, 그럼 내가 보고타에서 버스로 에콰도르에 입국할 꺼라면? 하고 따지니 눈길도 안 주고 외친다. "Next!"
와, 스팀 오른다. 진퇴양난이네..
항공권을 어디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100~300달러가 왔다갔다 한다는 건 과테말라에서 파나마시티에서, 그리고 이곳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생생하게 배운 바 있다. 가격비교고 뭐고는 둘째쳐놓고 아직 보고타에 얼마나 체류할지, 어디로 갈지 계획도 정확하게 안 세우고 있는데 이렇게 갑자기 쳐들어오면 날더러 어쩌라구.
그렇다고 뒷통수 맞고 나온 민수네로 돌아가? 아침에 이사람 저사람 찐하게 인사 끝내고 나온 집으로?
얼이 빠져 우두커니 서 있다가 마음을 추스렸다. 그래, 마음 비우자. 항공권 못박고 스케줄을 거기에 맞추자. 어차피 기간도 별로 없잖아?
원래 계획에 의하면 콜롬비아의 다음 행선지는 멕시코 깐꾼임이 분명하지만, 콜롬비아 내에서의 행로에 따라 보고타에서 바로 날아갈지, 아니면 메데진 거쳐 트루보나 까르따헤나까지 올라가서 배를 타고 중미로 넘어갈지는 확정짓지 못한 상태였다. 어쩔 수 없지, 여러 생각 말고 그냥 깐꾼으로 날아가자.... 하고는 항공편을 물어보니 세상에나, 700달러가 넘는다.
다시 창구 뒤로 빠져서 곰곰 궁리하다가 건성으로 쿠바행 가격을 물어봤다. 쿠바에 갈 생각이었다기보다는 너무 비싼 깐꾼의 대안으로서 막연하게 찍어본 거였다. 언젠가 콜롬비아에서 깐꾼 들어갈 때 직접 가는 것보다 쿠바를 경유하는 편이 싸다는 얘기가 얼핏 들은 기억이 나길래....
어라, 483불이란다. 그래, 이걸로 가자! 쿠바에서 깐꾼 나가는 것까지 하면 어차피 비슷하지만(쿠바 - 깐꾼 200달러) 이왕 같은 가격이면 쿠바 들러보지. 내 언제 다시 이 동네에 오겠나.
사실 쿠바는 가고 싶었지만 짧은 기간, 짧은 비용 때문에 (파타고니아, 브라질과 함께) 엄두를 내지 않았던 곳이다. 운명이 뒷바람을 넣어주니 스쳐가는 인연이나마 쿠바와도 한번 인연을 맺어보세. (오, 놀라워라 나의 순발력, 추진력.... 혹은 경솔함..ㅜ.ㅜ)
어렵사리 마음을 정한 다음에도 진행은 쉽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공항 내 모든 ATM기가 내 카드를 뱉어내는 것이다. 탑승 시간은 다가오고....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혹시나... 해서 복대 안에 있던 비상용 신용카드를 꺼내들었다. 바로 사흘 전 보고타 가는 항공권을 끊을 때 인터넷으로 결제가 도무지 안 되어 포기했던 카드다.
헉, 아무 문제 없이 스윽 긁히네? 여행사에서 현금 주고 비싼 표 사게 만들더니 지금 되는 건 또 뭐냐!
뜬금없는 쿠바행 티켓 손에 들고 진땀 뻘뻘 흘리며 간신히 탑승시간 맞췄다. 민수네서 삐지는 바람에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출발했기에 망정이지 쿠바행 티켓 사놓고 보고타행 티켓 버릴 뻔했다.
리마를 경유하여 보고타로 들어가니 시계바늘이 2시간 뒤로 갔다 1시간 앞으로 갔다... 도무지 시간을 종잡을 수가 없다. 뒤죽박죽 길어진 비행시간만큼 갑갑하고 혼란스러운 비행이었다. 앞서 벌어졌던 세 가지 난감함도 모자라 한 가지가 더 보태졌기 때문이다.
여행노트 제3권이 사라졌다.
아르헨티나 들어서면서 시작된 노트라 메모 내용이 그리 많진 않지만... 이과수에서 만난 칼과 민수네서 만난 친구들 연락처들은 복원 불가능이다. 당장 오늘밤에 찾아갈 태양여관 연락처도 거기 적어놓은 것 같은데....
울고 싶은데 뺨 때린다고 옆자리에 앉은 아르헨티나 영감이 자꾸만 치근덕거린다. 초청강연차 베네수엘라에 가는 대학교수라는데 먼저 말을 걸길래 예의상 몇 마디 했더니 노골적으로 작업모드 전환이다. 영어도 못하면서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려 드는데 황당하기도 하고 어찌나 짜증이 나는지.... 자는 척도 해보고 짐짓 사무적으로 굴어봤지만 소용없다. 혼자 얘기하고 혼자 껄껄 웃고.... 아르헨티나에서 나가는 길이라고 분명히 말했건만 명함까지 주면서 다시 아르헨티나에 오면 자기랑 꼭 탱고 한번 추잔다. 어이 상실... 동양여자가 만만해?
보고타 공항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였다.
다행히 론리 뒷표지에도 태양여관(Posada del Sol) 주소를 적어뒀더군.
공항이 환율이 나쁘다고 해서 일단 50달러만 환전을 하고 공항 밖으로 나오니 택시가 줄을 섰다.
콜롬비아 택시는 미터기를 사용하고 바가지가 별로 없다고 들었길래 안심하고 탔다. 18,000페소 나왔는데 심야에 안전하게 데려다준 것만 해도 고마워 2만 페소(20달러 정도) 내고 거스름을 받지 않았다. 나의 목적지는
No 56-23, Bogota, 일명 태양여관(Posada del Sol)
http://cafe.daum.net/bogota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각인데 태양여관은 대낮이다. 침대같은 소파에 이불까지 덮고, '이보다 더 편할 순 없다' 자세로 DVD를 보던 예닐곱 명의 시커먼 총각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꽂힌다.
태양여관에서의 나날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