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중남미

Mexico12 - Tulum

張萬玉 2008. 9. 23. 09:09

배낭을 리셉션에 맡겨두고 뚤룸행 버스에 올랐다. 얜쿤(晏坤)과 동행이었다.

오늘 치첸이샤로 갈 계획이라더니 갑자기 나를 따라나섰다. 뚤룸에도 치첸이샤 가는 버스가 있으니 반나절만 놀고 가겠단다. 드디어 내가 마음에 들었나보다. ^^

 

처음에 그녀는 낯을 가렸다. 나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호스텔 사람들에게 눈길 한번 안 안 주고 계속 노트북만 끼고 있었다. 내가 차이니즈? 하고 말을 걸었을 때도 노우, 홍콩! 하고 쌀쌀맞게 대답하던 그녀.

그러나 내가 중국에서 9년 살았기 때문에 외국에서 중국사람 만나면 고향사람 만난 것 같다면서 보통화 할 줄 아냐고 물으니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게다가 나도 혼자라는 얘길 듣더니 태도가 확실히 달라졌다.

 중남미 8개월째. 은행에 다녔는데 다른 일을 하려고 직장을 그만두었고, 새 직장에 들어가기 전에 1년 정도 쉬고 싶어서 여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나와는 반대로 남미부터 올라와 이제 과테말라로 갈 예정이고 한 달 후에 파리를 거쳐 홍콩으로 돌아간단다.

 

얼굴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소녀 같은데 결혼 10년차의 기혼여성이란다. 놀래라!

나는 늙었으니 그렇다 쳐도 당신네 부부는 아직 젊은데....

남들이 나에게 하는 질문(혼자 여행을 다니면 남편이 싫어하지 않느냐는)을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는데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 보니 굳이 물을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엄한 부모님 밑에서 순종적으로 자라다가 대학생이 되면서 자기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한 그녀는 그로 인해 아버지와 불화가 심했다고 한다. 그런데 남편을 만나면서 서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화목하게 살아가는지 서서히 배우게 되었고, 남편으로 인해 오히려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아졌단다. 그녀의 남편은 정말 이해심이 많고 유연한 사람인 것 같다. 

 

그녀가 틈만 나면 노트북을 끼고 사는 것도 남편과의 채팅 때문이라는 거 보면, 똑같이 '마누라 혼자 여행 보내는 남편'이라 해도 내 남편과 그녀 남편의 마누라에 대한 관심의 품질 간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듯. ^^

남편도 남편이지만 그녀 역시 대단하다. 인생이라는 戰場에서 자기가 취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는 여전사 같다고나 할까. 

 

깐꾼에서 뚤룸까지는 버스로 2시간 정도.

계속 해안도로를 끼고 달린다. 마치 우리나라 7번국도처럼....

달리는 동안 관광 포인트임을 알리는 간판들을 계속 지나친다. 그 유명한 까르멘 데 쁠라야를 비롯하여 읽기도 어려운 이름들, X-Caret(스까렛), Xel-Ha(셀하), X-note(스노떼).... 멕시코 동남부 해안 관광지도에 나타난 그 관광지들 사진은 '환타스틱' 자체였다. 내가 뚤룸을 선택한 게 잘한 일인지 회의하게 만들 정도로...  

 

 깐꾼 숙소에서 연결해준 뚤룸의 이 숙소도 Weary Traveler Hostel.

웬 고단한 여행자들이 그리 많은지 숙소가 꽉 차서 최근에 오픈했다는 별채에 들었다.

잠은 거기서 자고 밥은 여기 와서 먹어야 한단다. 밥도 밥이고 재미있어 보이는 본채에 와서 놀려면 큰 길을 건너와야 하지만 쉬고 싶을 때는 오히려 조용하고 한가한 별채에서 확실히 쉴 수 있으니 오히려 잘됐다.

 

어머니와 함께 호스텔을 운영한다는, 친절하고 유머러스한 쥔장.

아침에는 저기 쌓아놓은 달걀로 그 옆에 있는 철판에서 오믈렛을 만들어 먹으면 된다.

(물론 커피나 빵, 잼과 버터도 원하는 대로 갖다 먹으면 된다)  

 

 이 넓은 야외식탁에서...    

  

낮에는 여기서 낮잠을 자거나 빨래를 해널거나....  

 

포켓볼 치거나 공짜 인터넷을 하거나(물론 한글은 볼 수도 쓸 수도 없지만).....  

 

소액의 참가비를 내고 바베큐 파티에 참가할 수 있다. 

 

오는 길에 보았던 여러 마을들로 떠나는 투어 서비스도 제공된다. 주로 바이크 투어 아니면 스킨 스쿠바..

 

자전거도 못 타고 스쿠바도 못하는 나는 그냥이라도 따라가볼까 하다가 참았다. 그러기엔 너무 비싸....

이곳에 온 사람들 중 다이빙을 즐기러 온 사람들이 절반은 되는 것 같다. 특히 마야 시대에 생성된 동굴을 따라가는 X-note(세노떼) 투어는 그들의 필수 코스. (한번 다이빙에 150달러, 장비 빌리는 비용 별도) 

민물호수로 다이빙 해 들어가서 45미터까지 내려가면 해수와 만나는 지점이 나오고 거기서 바닷속 동굴을 통과하여  빛 한 줄기 보이지 않는 50미터까지 내려간단다. 부러워서 한숨이 다 나올 지경이다.

 

같은 방에 배정된 일본총각 다까, 영국 아가씨 비키, 얜쿤과 함께 점심을 먹고 뚤룸 유적지에 갔다.

해변(뚤룸도 해변이지만 여기서 '비치'라고 부르는 곳은 호텔들이 들어서 있는 다른 해변을 말한다)까지는 호스텔에서 나눠주는 팔찌를 착용하고 무료 셔틀버스(아홉시, 열두 시... 돌아오는 시간은 저녁 다섯 시)를 이용할 수 있지만.... 뚤룸까지는 택시를 타야 한다.

시내버스는 못봤고.. 깐꾼 쪽으로 올라가는 장거리 버스를 타고 가다 내려도 되는 듯.

 

쟤가 도대체 사람이냐 인간이냐..

 

얘야, 차라리 본격적으로 맛사지를 해라..

 

아이들을 데리고 정처없이 떠도는 부모들을 많이 봤다. 

임어당은 아이들이 어릴 때 너무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 말라고 했다. 정체성에 혼란을 줄 수 있다고....

 

씩씩한 얜쿤. (왼쪽의 차량은 뚤룸 유적지 외곽을 한 바퀴 도는 관광트랙터... ^^ )

 

그녀는 나랑 같은 날 쿠바에서 깐꾼으로 들어왔다.

18일이나 있었는데 300달러도 안 쓰고 웬만한 지방도시는 다 쓸었다. 개방 전 1980년대의 중국을 잘 알기 때문에 자기는 쿠바 생활이 어렵지 않았단다. 거의 쎄우뻬 내는 곳만 돌아다니며 음식도 길거리 음식만 먹고 재래시장에서 쿠바 사람들이 쓰는 물건만 샀다고.....그러면서 하는 말이 쿠바는 물가가 싸서 너무너무 좋았다네?(남들은 쿠바 물가가 비싸서 못 다니겠다고들 하는데...) 

 

멕시코와 과테말라에서 마야 유적지는 질리도록 보았기 때문에 유적지 자체는 특별한 감흥이 없었지만...

 

 

 

그 location이 바닷가임을 알리는, 놀라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악!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저렇게 화려한 물빛은 처음 본다. 지금까지 본 어느 해변의 물빛보다 강렬하다.

태국의 코사멧에서 본 바다는 옥색으로 곱기만 했는데 이곳의 물빛은 강한 코발트색부터 여릿한 옥색에 이르기까지 섬세한 스펙트럼을 만들며 황홀하게 빛난다.  

 

어서 해변으로 내려가자, 어서!

 

아무것도 챙겨오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신발만 벗고....

급하게 사진찍기 모드로 들어간다. 아름다운 바다가 어디로 가버리기나 할까봐... ^^

 

 

런던의 소아과병동 간호사 비키. 

아주 얌전하고 보수적인 아가씨 같은데 다이빙 마스터 라이센스까지 있고 여행이라면 다이빙 여행 밖에 안 하는 꽤 터프한 면이 있다. 3주간 휴가를 받았는데 깐꾼 인근에 1주일 있다가 벨리즈에서 다이빙 친구들과 합류한단다. 런던에도 좋은 한국 친구가 있어서 한국을 좋아하게 됐다는 이 아가씨, 내년에 어쩌면 영국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니 꼭 연락하라고 병원 주소와 휴대폰 번호까지 꼼꼼하게 챙겨준다.    

 

깜찍한 얜쿤... 누가 그녀를 보고 37세의 기혼여성이라고 할까.

   

 

영어는 하나도 못하는데 스페인어는 유창한 도꾜대 법학부 4학년생 다까. 스페인에서 1년 어학연수를 했단다.

휴학중이고 원월드 티켓으로 1년간 세계일주중인데 여기가 마지막 정거장이라고 한다. 헌데 세계일주중이라는 사람의 짐이라는 게 달랑 쌕 하나다. 겨울 점퍼는 추운 나라를 벗어나면서 버렸고 긴 옷 한 벌, 짧은 옷 한 벌, 속옷과 양말 두 벌씩, 가이드북, 칫솔 하나 비누 하나 수건 한 장... 그게 전부란다. 개나 소나 다 꽂고 다니는 MP3는커녕 카메라조차 없다. 

  

해변에서 카메라들이 주로 노리는 것은 잘 빠진 미녀들 사진이지만 나는 미남들을 찍고 싶었다.

그러나 감동적인 몸매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ㅎㅎ

 

 

 

셀하나 스까렛 같은 곳은 입장료 비싼 놀이공원이 주종을 이루는 것 같으니 상관없지만

꾸스꼬 룸메이트였던 레아가 하도 강추!를 외쳤던 곳이라 쁠라야 델 까르멘에 대해 미련이 남았었는데

다녀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시큰둥이다. 다이빙과 바다낚시로 유명한 섬 코주멜로 가는 보트를 타는 곳이라서 알려진 것일 뿐이라며 해변은 뚤룸쪽이 훨씬 낫단다.

 

 

 

찡그리고 계시지만 행복해 보이십니다... ^^

 

 

선크림을 덕지덕지 연신 발라봐도 소용없다. 쨍한 볕에 온몸이 브라우니 케�처럼 맛있게 익었다.

이 맛있는 색깔이 사라지면서 얼굴에 잡티를 한 사발 남기겠지만, 어쩌겠나.

 

치첸이샤로 가는 얜쿤을 버스 터미널까지 배웅해주고 비키랑 다까랑 숙소까지 걸어왔다.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가깝지 않은 거리지만 바닷바람도 선선하고 한낮의 땡볕도 한풀 꺾여 걸을 만했다.

오는 길에 저녁을 먹으려고 적당한 식당을 물색하는데, 모두 계산기 놓고 밥 먹는 짠돌이들이라 물가 비싼 뚤룸(깐꾼보다 더 비싸다)에서 먹을 만한 식당 찾기가 쉽지가 않다. 의논이 분분한 중인데 한 영감님이 다가와 식당 찾느냐, 우리 마누라가 음식 잘 하는데 한번 멕시코의 가정식을 한번 맛보겠느냐고 한다. 호기심이 발동한 세 사람, 만장일치로 따라가 봤다.

 

부엌인지 헛간인지 애매한 공간에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다. 이 영감님, 손자로 보이는 어린 소년에게 돈을 주며 얼른 가서 돼지 갈빗살 사오라고 시키고 "마누라, 마누라..!"를 외친다.

어쩌면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럴듯하게 한상 차려내는지.... 이런 영업에 이골이 난 가족 같다.

돼지고기 스테이크에 후리홀레스, 노르스름한 볶음밥. 양파와 토마토 샐러드, 또르띠야까지 멕시코식 한상이 제대로 차려졌다. 고기는 질기지도 않고 냄새도 없고.... 45페소. 훌륭하다.

 

 

이튿날.

자다 보니 내 건너편에서 일층침대를 쓰던 비키는 이층으로 올라가 있고 독일 아이는 바닥으로 내려와 자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물어보니 bed bug 때문에 밤새 잠을 설쳤단다. 비키 이마에는 큰 혹까지 올라왔고 알렉스도 잔뜩 물렸다. 나와 다까는 아무렇지도 않은데....빈대들은 서양고기를 더 좋아하나 보다. ^^ ;;

원래 둘째날 세노떼로 다이빙하러 간다고 벼르던 불쌍한 비키.... 제대로 잠을 못자 컨디션이 엉망이라 도저히 다이빙은 안되겠다고 해변에 가려는 나를 따라 나선다. 

어제 준비 없이 간 유적지 해변에서는 발목까지밖에 못 적셨지만 오늘은 머리 끝까지 적셔줄 생각이다. 

 

진짜 이 동네 너무 물가가 비싸다. 그늘과 매트 빌리는 데 100페소. 호스텔의 1박 비용이다.

해변 식당의 메뉴는 최소가 150페소. 

멕시코에서 한국 들어가는 항공편을 컨펌해야겠기에 멕시코시티에 있는 JAL 항공사로 전화를 걸려고 해변에서 제일 큰 호텔까지 간 김에 방값을 한번 물어보니 230달러란다, 페소도 아니고...

우리나라 고급호텔 숙박비 맞먹는다. 국제적인 이름값을 하나 보다.

 

그러나 개털들은 서럽다. 해변에 라커가 없으니 귀중품 간수하기가 불편하겠다.(나는 그렇다는 얘길 듣고 카메라를 숙소에 두고 와 이날 사진이 한 장도 없다) 샤워장이라고 허허벌판에 칸막이도 없이 샤워꼭지 하나 달랑 있으니 옷은 화장실에서 갈아입거나 그냥 수영복 바람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그래도 눈부신 바다와 부드러운 바람과 잔잔한 파도와 햇살의 애무를 받으며 눈을 반쯤 감고 있으면 이 모든 것들이 꿈속 같다. (Bob Marley의 Sun is Shining이나 Soul Rebel 같은 곡이 흘러나오면 딱이겠는데...)

우리가 누운 자리 바로 앞에서 스카프와 모자로 이런저런 연출을 해가면서 멋진 사진 만드느라 신이 난 이스라엘 5공주의 야단스런 비명조차 동화 속 아이들이 깔깔대는 소리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아쉽다, 이런 몽환세계를 노니는 날들도 이제 끝나가는구나.  

 

밤은 밤대로 정답다. 바베큐 파티에서 저글링 묘기로 재롱을 떠는 다까.

지구 반대편에 살면서 평생 눈길 한번 닿을 일 없을 이들이 이렇게 술잔을 다 부딪히고...

이 무슨 기막힌 인연이란 말인가. 그러나 떠나가면 그만인 것이 또한 길 위의 인연.

(블러그 인연도 아마 그렇다지요? ^^ )    

 

뚤룸에서 떠나던 날 아침.

비키는 어젯밤도 설쳤다. 밤중에 일어나 두 번이나 샤워하고 침대도 두 번이나 옮기고...

아침에 일어나 내 위층침대에 얹어뒀던 물건들을 내리다보니 시트에 돌돌 말린 동그란 게 걸린다. 

만져보니 따뜻하고 물컹... 비키의 엉덩이였다. ^^

 

거의 신경쇠약 지경에 이른 비키는 세노떼고 뭐고 다 포기하고 눈 뜨자마자 배낭을 꾸려서 벨리즈로 떠나버렸다. 독일애와 다까도 쎄노떼 간다고 새벽에 나갔고... 새로 들어온 두 녀석은 한밤중이고...

친구만 있으면 하루 정도 더 있어도 좋으련만 모두가 떠난 자리에 혼자 남고 싶지 않아 나도 짐을 꾸렸다. 

Bye Tul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