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잇, 모르겠다.... 발권해버렸다.
원래는 내년 춘삼월에 로마로 들어가 그리스 거쳐 터키 한바퀴 돌고 아드리안해에 면한 크로아티아 등 동유럽 몇 나라를 거쳐서 다시 이탈리아로 들어와 로마로 아웃할 예정이었다. 남편에게 약속한 석달 여정에 맞게 루트도 짜고 방문할 나라들의 역사, 문화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2009년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헌데 암만 생각해봐도 환율이 너무 올라 적정한 예산이 안 나온다. 비축해놓은 여행자금은 유한하고 나는 겨우 두 발짝째 떼고 있을 뿐인데 그 물가 비싼 동네 한번 돌고 오면 벌써 바닥이 보일 것 같다.
이왕 어렵게 빼든 칼, 호박이라도 찔러야 할 텐데... 생각이 많아지고 있던 중 나의 여행짝으로부터 메일이 날아왔다. 12월에 인도로 들어갈 예정인데 동행하잔다.
인도?
사실 내게 인도는 그닥 끌리지 않는 여행지였다.
일단 잘 모르고, 아는 게 있다 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였다.
이해까진 아니라도.. 짐작 정도는 해도.. 공감하기 어려운 문화요 사람들이었다.
거리나 숙소가 더러운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만 '처참한' 인간군상들을 목도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TV로 봐도 속이 찢어지고 부글부글 끓는데.. 그들이 내미는 '손의 숲' 속을 어찌 마음 편하게 뚫고 다니겠나.
(가난과 계급이라는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족쇄에 묶여 살지만 '행복할 수 있다'는 '심오한 정신세계'는 그들의 것이지 아무리 흉내를 내본다 해도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나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다.)
더 불편한 것은... 여행으로 인해 내가 인도라는 나라와 그 나라 사람들을 '평가'하고 싫어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 사회에서는 그다지 큰 악덕도 아닌 행동들일지 모르지만 조직된 사회에서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다가오면 쉽게 삼킬 수 없는 가시처럼 목에 딱 걸릴 것이다. 나라고 예외겠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여행에서 얻고자 하는 즐거움은 분명히 사람들로부터 온다. 훌륭한 산천경개에 압도당한다거나 역사의 현장에서 삶이란 역사란.... 해가며 새삼스런 개똥철학에 빠져보는 맛도 소중하지만, 여행이 내게 안겨준 더 근본적인 즐거움은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나온 것들이었다. 낯선 세상에 홀로 되어 내 영역을 확보하고 운영해본다는 기분, 낯선 사람들로부터 잘 집을 구하고 먹을 것을 구하고 여정을 확보하고 이웃을 만드는 즐거움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안전여행의 보호장구랍시고 불신으로 보호막을 둘러치고 멸시의 냉매를 가슴에 품어야 한다면? 효율과 안일을 위해 가이드를 구한다면? (워낙 거칠고 험란한 인도 배낭여행에는 왕복항공권과 가이드만 제공하는 상품들이 많이 나와 있다)
그 순간 나의 여행길은 빛을 잃을 것이다. 호기심과 모험심을 잃은 여행이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우좌지간 친구의 제안을 받았으니 뭐라고 답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일정을 짜보기 시작했다(여행의 실감은 여행을 한다는 전제하에서 일정을 짜봐야 제대로 잡히기 시작한다). 낯선 지명들이 눈에 익어가고 루트가 그려지기 시작하니 서서히 마음이 열리기 시작한다. 마음을 열고 들여다보니 인도란 넘이 예상 밖의 매력으로 나를 이끌어들이네그려.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가 내리 사흘을 인도 지도에 코를 박고 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가자! 그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를 나도 한번 알아보자.
일단 여행 첫머리에서 속도를 늦추고 기차표 사는 요령에 통달하고(기차여행만 마스터하면 인도 여행은 반이라고 한다), 삐끼와 장사꾼, 릭샤꾼들의 잔꾀에 적응만 한다면 여행길을 즐길 수도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여행 베테랑 JM과 짝이 된다면 더 든든할 테니 굳이 까칠해지지 않고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겠지.
그래, 2차 여행은 인도로 가는 거야. 고환율 시대에는 저예산 여행으로 지나가주지.
결정을 하고 나니 마음이 바빠진다. 인도여행의 최적기는 12월부터 2월까지이기 때문이다.
남편도 내년 3월보다는 자기가 방학일 때 다녀오는 게 좋겠단다. 밥 해주는 마누라, 빨래해주는 마누라는 없어도 견딜 만 한데 타자 쳐주는 마누라가 없으면 타격이 크다는 거다. (주경야독 하는 남편이 독수리 타법으로 리포트 쓴다고 날밤 새는 게 안됐어서 학기중에는 타자를 꽤 쳐주는 편이다. 이것도 일년에 두세 달 집을 비우는 미안함을 얼버무리고자 하는 나의 잔꾀이긴 하지만..^^)
그런데 신정과 구정에 집을 비우는 것에 대한 소심함이 슬그머니 머리를 들려고 한다. 이러다간 한도 없겠다. 아쒸몰라, 클릭!
12월 18일 오후 비행기... 자정쯤 싱가폴 공항에 내렸다가 다음날 아침 떠서 오전 10시에 뭄바이에 도착한다.
사실 요즘은 유류항공료와 TAX가 비싸기 때문에 직항이나 경유편이나 결국 가격이 비슷하다.
그런데 왜 공항에서 여섯 시간 새우잠을 자야 하는 싱가폴 경유편을 샀느냐....
싱가폴에는 내가 놀러와주기를 기다리는 지인이 살고 있다. 돌아오는 길에 무료 스탑오버를 이용해서 다민족국가의 느낌을 맛보고 올 속셈이다.
여행기간은 두 달. 그중 네팔 일주일과 싱가폴 일주일을 낑가넣었다. 2009년 2월 18일 아침에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