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걸음 느린 걸음
아버지는 백말띠셨다. 백말띠에 역마살이 끼었다고 하지.
그래서 그랬는지 목적지가 어디가 됐든 그저 '가시는' 것만 좋아하셨다.
젊어서는 운전을 하셨고 더 젊어서는 만주벌판을 누비고 싶어서 트럭 운전을 하셨다 하고
자동차 부속상회를 하다가 재기가 어려울 지경까지 몇 번 망한 뒤에 빈털털이가 되었어도
도보로 닿을 수 있는 뒷골목들을 평생 누비고 다니셨다.
반면 엄마는 집에 있는 걸 편안해 하셨다. 아버지가 어딜 가자고 권하시면 십중팔구는 거절이었다.
자식들이 장성하여 두 분이 함께 다니시라고 여행기회를 마련해드려도 엄마를 자리 털고 일어나게 하려면 적잖이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일단 가시면 유적지 해설도 꼼꼼하게 챙겨보시고 다녀와서도 오랫동안 아름다운 그곳의 정경을 소녀처럼 미주알고주알 내게 전하곤 하셨다.
(그런 걸 보면 엄마도 여행이 싫으셨던 건 아니었던 듯..)
헌데 두 분이 동행하시는 정경을 볼작시면, 엄마의 '맛보는' 발걸음에 속이 터지는 아버지는 일찌감치 한바퀴 휙 돌아보고 어느새 출구에서 서서 초조하게 엄마를 기다리고 계시다. 아니면 다른 노인들과 대화 삼매경에 빠져계시거나.... 얼마나 조급하신가 하면 (엄마의 과장에 따르면) 정문에 딱 도착해서는 이제 왔으니 돌아가자고 하신단다. ^^ 그렇게 별러서 간 제주도에서는 딱 하룻밤 묵고는 돌아오는 짐부터 꾸리셨다고....
엄마는 그런 아버지를 두고 내게 늘 이렇게 흉을 보았다. "저 양반은 그저 '가러' 가시는 거야."
그땐 내 눈에도 아버지가 실속없이 돌아만 다니시는 것 같았기에 엄마의 흉보기에 적극 동참했었지. ^^
헌데 지금은 아버지의 기호와 성정을 충분히 이해할 것도 같다.
왜냐.... 지금은 내 속에서 아버지의 '가러 가기' 본능을 십분 느끼고 있거든.
trip은 경쾌하게 걷는다는 뜻입니다.
tour는 회전도구처럼 돌고도는 것,
즉 漫遊나 유람을 의미합니다.
voyage란 말에서는
인생처럼 길고 긴 항해가 떠오릅니다.
나의 여행은 대개,
애써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travel입니다.
물론 가끔은 운동화끈을 가볍게 당겨묶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excursion을 즐기기도 하지만요.
당신의 여행은 어떤 종류입니까?
'애써서 가다......'
오늘도 나는 travel 중입니다.
http://blog.naver.com/fromganges 에서 퍼온 글
나의 여행 기호를 윗글에 따라 굳이 분류해보자면 voyage에 가깝다고나 할까.
그 자체가 인생이라 여기며 定處도 없고 목표도 없이 떠도는 것. 허무맹랑하지만 끊을 수 없는 fantasy....
그러나 연줄에 매달린 연이 줄을 끊고 도망갈 게 아니라면 다시 돌아오기 위해 나침반을 점검하고 바다 위에서 먹을 만큼의 식량을 준비하는 등 애써서 짐을 꾸려야 하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여행은 travel이겠다. 여행길 중간중간에 tour도 끼어들고 trip을 즐기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낯선 곳을 헤쳐나가는 도전적인 경험을 위해 짐 싸기를 즐기고 애쓰기를 마다않는....
여행은 견문을 넓혀준다는 강력한 장점과 함께 지친 일상으로부터의 도피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바쁜 일상에 지친 친구들은 여행지에서의 휴식을 기대하지만 휴식의 일상에 지친 나로서는 낯설고 거친 모험으로의 일탈을 기대하는 게 당연하다. '놀러'가는 거 좋아하는 내 또래의 여자친구들은 왜 돈 주고 궁상과 고생을 사느냐고 놀릴지 모르지만 내게는 그 challenging이 참을 수 없는 유혹인걸. 아마도 무력해져가는 나 자신을 단련시키고 싶은 욕망의 발로인지도 모르지.
지금 방콕에는 나와 인도여행을 함께 하기로 한 여행짝 JM이 기다리고 있다.
워낙 동작도 빠르고 성격도 급한 이 친구랑 다니다 보면 나는 늘 한 박자 늦다.
저렇게 휘리릭~ 해가지고 뭘 봤을까 싶지만 오히려 그 친구가 내놓는 사진이나 경험담을 보면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즐기는 게 분명하니 참으로 불가사이한 감각을 지녔다.
얼마 전에 다른 친구가 모처럼 휴가를 내어 JM이 있는 방콕에 합류했다.
이 친구도 한국에서 우리 두 사람의 여행길에 몇 차례 동반한 적이 있는 친구인데, 워낙 정신없는 일상에 치여 그런가 여행지에서 우리의 절반 정도밖에 속도를 안 낸다. 주로 주저앉아 마시는 걸 좋아하는 친구다.
이 거북이와 제트기가 어떻게 함께 남쪽 태국을 돌았을지 도무지 상상이 안 되지만 확실한 건 사이좋게 협력하며 '따로 또 같이'의 보기좋은 걸음을 했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내겐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다. 나는 웬만하면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저 '돌아다니는' 게 좋고 길에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게 좋다. 갔던 길 되집혀 돌아오는 게 싫어 낯설고 불편해도 가능한 한 바퀴 돌아서 오는 길로 루트를 짠다. 시간이 길면 크게 한 바퀴, 짧으면 작게 한 바퀴.... 웬지 모르지만 난 이 '한 바퀴'에 집착, 이 서클을 완성해주는 길을 찾는 데서 흥분을 느끼곤 한다. ^^
또 다른 스타일을 가진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면 아마 우리의 여행은 더 다채롭고 풍부했을 것이다.
왜냐, 개성도 제각각 고집도 제각각인 우리지만 우리는 수차례의 동행을 통해 미묘한 갈등을 길들여가며 세련된 팀웍이 어떤 것이란 걸 어느 정도 터득했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은 정신없이 바빴다.
인도가 어디로 도망가냐, 꼭 이번에 가야겠냐는 남편의 은근한 만류도 있었지만 동행하기로 약속했던 방콕에 있는 친구가 결정적으로 방향을 틀었다. 인도는 다음으로 미루고 대신 미얀마에 가자는 것이다.
겨우 정들여놓았던 인도에서 눈을 돌리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가족들 걱정하는 거 나 몰라라 다니는 것도 도리가 아니다 마음이 편치 않던 차인데 이 친구마저 마음을 돌리다니....
한번 생각해보자고 미적거리데 JM의 꼬시기가 집요하다.
미얀마 역시 출입이 녹녹하지 않은 곳인 데다가 결정적으로 방콕 친구네 집에서 아이들을 봐주는 처녀가 자기 고향에 머물 곳을 소개해줬다는 말에.... 인도로만 치닫던 내 마음이 서서히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나는 지도를 보고 계획이 서야 갈지 말지 해답이 나온다. 하룻밤을 고민하며 '루트'를 지어 보니...
방콕으로 들어가서 JM과 미얀마 왕복을 한 후에 방콕으로 돌아와 캄보디아를 거쳐 베트남으로 입국, 남에서 북으로 올라간 뒤 라오스 북쪽으로 해서 태국 북쪽으로 넘어가 돌아오는 코스.... 이번에도 내 마음을 강하게 잡아끈 것 역시 '루트'였으니 역시 나는 '떠돌아다니는' 체질이다.
그래, 뭐 이 코스도 괜찮다. 인도는 다음 인연으로 미뤄두지 뭐.
뭄바이 왕복 항공권 취소하고(3만원 수수료 물고 한 달 뒤 환불된다)
같은날 출발하는 방콕행 왕복 항공권 예매.
가장 저렴하면서도 공항대기 시간이 짧은 에바항공편이다. 택스 포함 59만 몇천원.
경유항공편의 보너스인 무료 스탑오버 당연히 챙겨야지... 돌아오는 길에 대만에서 5박 하는 스케줄로 바꾸고
좌석이 없어 초조했던 대기상태를 며칠 버텨 발권을 확정한 뒤
그렇게 자리가 없다는 미얀마행 항공권 발권에도 성공.
에어 아시아 싸이트에서 약 40만원 주고 왕복으로 끊었다. 미얀마는 육로 출입국이 안 되니 어쩔 수 없다.
오늘 미얀마 대사관으로 비자 받으러 간다.
원래 동남아시아는 비용부담도 적고 간단하게나마 중국 남부에서 소수민족 지역을 돌아봤기 때문인지 웬지 낯설지 않은.... 따라서 마음 내키면 언제라도 갈 수 있는 곳으로 간주되어 나의 여행목록 거의 끝부분에 올라 있던 지역이었다. 그렇지만 인연이 이렇게 풀리니 그렇게 인연 따라 가보기로 한다.
용사처럼 걷는 거친 걸음도 좋고 편안한 걸음도 좋고... 빠르게도 걷고 느리게도 걷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