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아시아(중국 외)

베트남8(훼) - 훼에서 만난 사람들

張萬玉 2009. 5. 12. 15:37

훼는 길고 긴 베트남의 국토의 한가운데, 인체로 치면 심장 정도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는 도시다(하노이까지는 540km, 호치민까지는 644km).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베트남 남부를 통치했던 응웬 왕조의 도읍지로서 그 위치만큼이나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도시지만, 베트남 전쟁을 겪으며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경계라는 입지로 인해 미군의 집중포화를 받아 왕궁 등 유적들이 송두리째 파괴되었다.

전쟁 이후에도 '봉건시대의 유산'이라는 오명 때문에 오랫동안 방치 상태에 있었지만, 지금은 변화된 정부정책에 힘입어 유적 복원작업뿐 아니라 교육과 관광 등 여러 분야에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잠시 지나가는 여행자에게조차 그 몸부림이 느껴지던 도시 훼.

 

 

사실 나는 훼가 고요한 도시인 줄 알았다. 10여 년 전 인터넷에서 보았던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사진이라고 믿기엔 너무나 수묵화 같은, 저절로 숨을 죽이게 만드는 아름다운 정적이 고스란히 담긴 새벽 바닷가 풍경이었다. 오래 전이라 작가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 사진이 찍힌 곳이 Dong Hoi라는 걸 잊지 않고 있던 나는 그게 훼 부근 어디일 것이며 그렇다면 훼도 조금은 비슷한 분위기 아닐까 내 맘대로 생각했던 거지.

 

그러나 내가 만난 훼는 호이안보다 훨씬 복잡하고 바가지와 호객꾼들이 기승을 부리는 그저그런 동네였다. 훼에서 내세우는 왕궁은 중국의 고궁들에 익숙한 내게 그다지 흥미로울 게 없었고, 흐엉강 남쪽에 있다는 황제들의 묘와 동굴도 호되게 바가지를 씌우려는 호객꾼들에게 시달리다 보니 '기껏해야 중국 짝퉁이겠지...' 싶은 심술궂은 마음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亞流로 흐르지 않으려면....

 

도시 북쪽, 높이 5미터의 거대한 성벽과 해자로 둘러싸인 왕궁은 오직 황제들과 첩들 그리고 측근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금지된 도시(Citadel)였다. 왕궁 정문인 남문 누각에 오르면 중국의 자금성을 그대로 본따 지었다는 왕궁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그 모양 뿐 아니라 이름까지 중국의 자금성을 그대로 따왔고(베트남어 뚜깜탄은 紫禁城의 音讀). 정면에 있는 왕의 집무실조차 자금성의 太和殿과 같은 문패를 붙이고 있었다.

 

시타델 입구 사진은 제대로 찍힌 게 없어서.. 퍼왔음. 출처 http://cafe3.ktdom.com/thailove)

 

 

 

 

 

대강 이런 분위기인데..... 그나마 관광객들 드나드는 곳에서 벗어나면 거의 방치상태다.

 

이름은 같은데 규모나 솜씨에서 도저히 비교가 안 되면... 사람들은 냉정하게도 짝퉁이라고 부른다.

물론 그 '짝퉁'의 문화 속에서 응웬왕조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진 사람들은 나름대로 민족과 왕조의 운명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것이다. 결코 베트남 민족의 역사적 자부심을 폄하하자는 건 아니다. 우리 역시 약소민족, 약소국가로서 겪어온 설움과 피해의식에서 지금껏 자유롭지 못한 처지인데 뭐. (심지어 어떤 이는 경복궁을 자금성의 화장실에 비교하기도 했다잖은가).  

 

  

참새가 황새 따라가겠다고 가랑이를 찢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 하지만 아무리 작은 참새라도 오장육부 다 갖췄는데(麻雀雖小, 五臟俱全), 형님 뛴다고 괜시리 같이 날뛰지 말고 오히려 참새다운 미덕에 집중하는 게 참새의 존재가치를 제대로 평가받는 길일 것이고 그것이 약소국가들이 발휘해야 하는 지혜일 테다.  

막상 당대에 事大主義를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빈약하고 시야도 협소한 현실 속에서 잘나가는 대국의 문화를 접했을 때 느끼는 그 선망의 마음이야 말할 나위 있겠나. 그러나 거기서 정체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빠뜨려버리면 곧 맹목이 되고 결국 아류로 흐르게 되는 거지.

하하, 이미 글로벌화된 시대에....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세밀히 논하기에는 내 머리가 너무 좁다. 최소한 나의 정체, 내 삶의 정체만이라도 야무지게 챙길 수 있으면 다행이지. 빛의 속도로 달려가는 이 현란한 세상열차에 몸을 맡긴 채 그저 멀미하느라고 정신 못차리고 있으니....   

 

훼에서 만난 사람들

 

쌀밥씨

버스에 올라 보니 텅텅 비었길래 사진 찍자고 각자 창가 자리 하나씩 차지하고 앉았는데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올라타 순식간에 빈 좌석을 다 채워버렸다. 내 옆자리에 양초처럼 하얗고 마른 늙수그레한 서양남자가 앉더니 꽤 능숙한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를 건네온다.

'이름은 Bob인데 성은 Ssal'이라는 (쌀밥씨...) 준비된 농담으로 시작된 이 남자의 수다는 오랜만에 영어 좀 지껄여보겠구나 내심 반가웠던 이 수다여왕을 확실하게 능가한다. 

한국에서 영어학원 강사생활 4년차. 대학에서는 저널리즘을 전공했는데 취직이 쉽지 않아 계속 다른 나라들을 전전하고 있다는데 한국행은 2004년 월드컵 응원을 보고 결정했다고 한다. 보수는 그리 많지 않지만 한국생활이 너무 재미있어서 가능하면 오래 한국에 머물고 싶다고 한다. 뭐가 그리 재밌냐고 하니 일단 요리 얘기부터 시작하는데.....    

 

그는 지독한 베지테리언이다. 특별한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비위가 받지 않아서 여섯 살 때부터 누린 것, 비린 것을 거부하기 시작했단다. 어느 정도냐 하면, 한국인이 주로 채식을 한다고 들어서 먹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 했는데 막상 와보니 된장찌게에도 국물맛을 내기 위한 멸치나 고기가 들어가고 훌륭한 발효식품이라고 해서 기대가 컸던 김치조차도 젓갈이 들어가 먹을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처음에는 날채소와 고추장으로 연명만 하다가 굶어죽지 않으려고 요리를 배우기 시작, 지금은 다시마와 버섯으로 국물을 내어 된장찌게도 끓이고 (일명 bob장찌게) 김치도 직접 담아먹을 정도가 됐다. 요즘은 사찰음식에 푹 빠져있는데 조만간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가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능청을 떤다.    

 

그의 한국생활을 즐겁게 해주는 또 한 가지는 영화보기란다. 이창동과 박찬욱의 열혈팬으로 그들의 영화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보았다고 한다. 다 영어로 더빙되진 않았을 텐데? 하니 말은 그정도 못해도 듣는 건 70% 이상 알아들으니 상관없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가 구사하는 한국어 어휘 수준이 상당하다. 학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얘길 하면서 (아마도 한국어 실력을 뽐내고 싶었을 것이다) 혈액순환이니 개기월식이니 하는 과학용어들로부터 간단한 사자성어까지 무심한 척 툭툭 뱉어낸다. 하도 기특해서 한국식 toungue twist를 몇개 가르쳐줬더니(철수책상 새책상 / 간장공장 공장장은 김공장장인가 박공장장인가... 등등) 기를 쓰고 따라하다가 안 되니까 적어달란다. 아마 학원애들 앞에서 뽐낼 생각인가보다. 

 

 

차창 밖으로 멋진 석양이 대단한 산과 대단한 바다를 물들이고 있는데도 이 아저씨의 수다 때문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다. 어느 산길 구간에선 건너편 갓길 도랑에 버스가 빠져 버스가 지나다니지 못하고 한동안 빠져 있을 때에도 현지인들이 몰려나와 떠드는 재미있는 장면도 놓쳐버렸다.

 

사이공에서 뺨 맞고 훼에서 화풀이

훼에 다 왔다고 해서 내려보니 하노이와 후에의 길림길이었다. 이럴 수 있냐고 분통을 터뜨리는 Bob을 달래고 있는 사이에 JM이 어느새 삐끼 아가씨와 흥정을 끝냈다. 훼 시내까지 12달러는 받아야 하지만 9달러에 해주겠다는 것이다. 사전 정보가 없으니 멀어서 걸어선 못 간다는 아가씨 말에 꼼짝 못하고 올라타긴 했지만 베트남 택시가 도무지 못미더워 알지도 못하는 길을 확인한답시고 창밖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데, 순발력 탁월한 JM.... 주도면밀하지 못한 기사가 미처 끄지 않은 미터기를 슬쩍 가리킨다. 

도착하니 22만 동이 나왔다. 흥정가격이 어딨냐, 시치미 딱 떼고 미터기에 찍힌 대로 22만동만 줬다. 

잽싸게 호텔로 들어가니 영어 못하는 운전사가 따라 들어오며 씨근벌떡한다. 호텔 직원 붙들고 뭐라뭐라 하는데 호텔 직원이 누구편을 들겠나. 우리는 법대로 했을 뿐이다. 1.5킬로를 멀다고 한 것도, 22만 동 나온 것조차도 미심쩍은데 할 테면 해보라지. 서로 거짓말 한 거니까 피장파장 아닌가? 겨우 만 사천 동 차이일 뿐이지만 그 맛이 어찌나 고소하던지... ㅎㅎ 유치해라, 사이공에서 뺨 맞고 훼에서 눈 흘긴 셈이다.  

 

인턴과 레지던트

 

시타델 인근 공원에서 만난 베트남 의사 닥터 구와 그 밑에서 실습을 하고 있다는 독일 의대 학생 안야.

 

실습생활 넉 달차인 안야는 향수병에 걸려 돌아갈 날짜만 세고 있다. 여기 사람들은 자기를 사람으로 안 보고 걸어다니는 지갑 취급을 한다나. 그래도 친절한 닥터 구 같은 친구가 있어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고.... 닥터 구는 말없이 웃기만 한다.

후에에서 세 시간 걸리는 닥터 구의 시골 집에 놀러갔던 얘기, 시아누크 빌에 놀러갔다가 한밤중에 숙소에 나온 뱀 때문에 기절했던 얘기.... 지긋지긋했든 어쨌든 나름대로 흥미진진한 모험담이 줄줄 흘러나오는 걸 보면 이 낯선 경험들도 돌아가면 그녀에게 결코 잊지 못할 추억이 될 터.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 보니 독일, 베트남, 한국..... 세 나라 모두 냉전시대의 격랑을 헤쳐온 사연 많은 나라라 그런지 공통화제도 꽤 많다. 의료보험제도 이야기, 빈부격차와 분배에 관한 이야기, 근현대사 이야기, 통일 이야기.... 꽤 묵직한 주제들이 짧은 영어로 인해 꽤 가볍게 오고갔지만 덕분에 귀동냥 많이 했다. 베트남도 독일도 통일을 했으니 이제 한국 차례라면서 머지 않은 시간에 통일이 이루어지길 빌어주겠단다.

고맙게도 점심으로 준비해온 케익상자를 꺼내며 같이 먹자길래 나는 음료수를 사와 '풀밭 위에 점심'을 함께 즐겼다. 덕분에 두 시간 잘 놀았다.

 

서비스업 종사자들

1.

론리플래닛에 소개된 식당(만다린) 간판이 눈에 띄길래 들어갔더니 주인 아저씨가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손님들에게 직접 인사를 한다. 인사치레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이다. 사방에 근사한 사진들이 붙어 있고 진열된 엽서들도 근사하길래 관심을 보이자 자기가 찍은 작품들이라며 앨범까지 건네주는데 앨범 앞에 스크랩해둔 신문기사를 보니 꽤 유명한 사진작가인 모양이다. 유화인지 사진인지 모를 정도로 진한 사진이 마음에 들어 한 장에 만 동씩 기쁘게 두 장 샀다. 쌀국수도 맛있고 싸고 금방 나오고.... 씨티맵도 공짜로 나눠주었다. 그의 이름은 Mr. Cu.

 

2.

혼자 돌아다니면서 눈여겨 봐둔 You & Me라는 까페로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JM이 주인아저씨를 보더니 이 동네에서는 누구든지 말을 걸면 신분증 까봐야 한다며 박장대소를 한다. 낮에 길에서 말을 걸어와 훼의 가볼 만한 곳도 소개시켜주고(물론 이 식당도 소개했지) 한국에 관해서도 이것저것 물어보던 사람이었다나. 현지 사람들과 말 한마디 섞기가 캄보디아나 태국에 비해 그리 만만하지 않은 이 나라에서 주동적으로 말 걸어오는 사람들, 열이면 열 족족 목적은 딴 데 있다는 사실.... 새삼스럽게 씁쓰레해할 것 까지야.... ^^   

 

 3.

숙소에서 시타델까지 2킬로라고 하니 걸어가도 좋겠구만 시타델 안에서 돌아다니는 거리만 해도 꽤 될테니 시클로를 타잔다. 걷겠다고 고집 피우다 괜히 의 상할 것 같아서 올라앉긴 했는데 5만동씩이나 부르는 요지부동 시클로 가격이 영 속이 쓰리다. 꾹 참고 있다가 내릴 무렵 시클로 운전사에게 한국말 하나 가르쳐줄 테니 한국 사람 만나면 꼭 써먹으라고 했다.  "싸게 해드릴께요"라는 뜻이라면서....뭘 가르쳐줬냐고?

“바가지 요금이에요." (나, 진짜 못됐지? ^^ )

 

훼 여기저기 

  

1. 시타델 부근 동바 청과물 시장 

 

 

 

 

 

 

 

2. 시타델에서 다리 건너 유람선 선착장이 있는 공원

 

내딛는 걸음걸음 말 거는 족족 삐끼들이다. '원 아워, 원아워' 소리가 귀에 쟁쟁...   

 

 

 

 

이십대 청년들이 신나게 놀고 있길래 가보니... 수건돌리기와 술래잡기에 푹 빠져 있더군.  ^^

 

3. 자수박물관

 

 

 

 

 

4. 어느 까페에선 손님이 적은 낮시간을 이용하여 직원들끼리 설 잔치를 하고 있었다.

 

 

 

웬 서양남자가 앞에서 신나게 춤을 추길래 까페 주인인 줄 알았더니...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란다.

술 냄새 팍팍 풍기며 뒤에서 구경하고 있는 날 앞으로 끌어내려고 해서 아주 혼났다.  

 

 

하노이 가는 나잇버스 2층 뒷좌석에 스웨덴 미녀 세 명과 함께 누웠다.

비좁은 공간에 다섯이 빼곡하게 눕다 보니 백설공주 같은 얼굴이 바로 내 코 앞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