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萬玉 2009. 8. 30. 07:44

일주일 전쯤 시네큐브가 작별 메일을 보내왔다.

정확하게는 시네큐브 운영주체인 영화사 백두대간이 보낸 메일이겠지만, 아무튼 극장주와 무슨 문제가 있는지, 9월 1일부터 이화여대 안에 있는 예술영화 전용극장 '모모'로 옮기게 되며 그리로 가서도 흥행과는 상관없이 예술성 있는 영화들을 보여주겠다고 한다.

지금의 시네큐브 역시 운영주체가 바뀌고 이름도 '시네아트'로 바뀌긴 해도 변함없이 예술영화 중심으로 운영하겠다고 하니 속사정 모르는 단순한 관객으로서는 별로 애달파 할 일은 아닌 듯 한데도 웬지 섭섭한 기분을 떨칠 수 없는 건....  내게 시네큐브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겠다.

소소하지만 따뜻한 사연들이 가랑비에 옷 젖듯 잘박하게 스며들어 있는 곳....

 
처음 시네큐브와 만난 것은 2004년 이맘때쯤이 아니었나 싶다.

중국에 살면서 나날이 달라지는 한국의 문화지도 같은 건 깜깜하던 시절이었는데, 한국에 다니러 왔다가 광화문 토박이 후배 덕분에 이 근사한 곳을 알게 되었다. 그때 이탈리아영화제를 하고 있었나?

타비아니 형제의 <파드레 파드로네>를 보려다가 시간이 맞지 않아서, 18세기경의 이탈리아의 시골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았다. 제목은 가물가물하지만(꽃향기와 관계가 있는 이탈리아어인 듯) 헐리우드 영화팬들의 인내심을 시험할 만큼 세밀하고 진하게 그려진 장면들만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마치 영화관이 아니라 미술관에서 나오는 기분이었을 정도로.....

 

이후 시네큐브는 나의 '즐겨찾기'에 이름을 올렸다. 게으름 탓에 '자주찾기' 목록엔 못 올렸어도...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몽상가들'(2005년).... 그리고 <여자 정혜>, <오만과 편견>, <브로크백 마운틴>, <타인의 시선>, <빵과 장미>, <The Reader>, 최근에 본 <Savage Grace>... 

또 뭘 봤더라....암튼 여기서 나올 때는 늘 가슴이 가득차거나 뻐근하거나였다.

 

일반 영화관에서 상영중인 영화들까지 굳이 이곳에 와서 봤던 이유는 뭐였을까.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암흑 속에서 영화의 감동을 되새김질하는 맛 때문이었을까, 유럽 좌파 냄새 물씬 풍기는, 망치질하며 책 읽는 키다리 아저씨 때문이었을까.
분수대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릴 때 사실 내가 기다렸던 건  나의 지나간 시절이었는지도 모른다.    

 

작별메일을 받고 마지막 인사나 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마침 그 부근에서 약속이 잡힌 김에, 약속이 끝난 늦은 시간이지만 굳이 이별의식을 치르는 기분으로 마지막 영화를 예매했다.

공교롭게도, 처음에 본 영화처럼... 마지막으로 본 영화도 미술에 관한, 매우 미술적인 영화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잔잔하게 흘러가지만 그 속에 폭풍 같은 열정을 품고 있는 영화.... 그리하여 헤어지는 마지막 걸음까지도 뻐근한 가슴과 함께 하게 만든 영화, 세라핀.   
 

애호가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영화관 답게 이별의 세리머니도 거창했다.

그동안 상영했던 작품들 중에서 꼽은 영화들의 비디오도 나눠주고(랜덤으로 주는데 나는'줄리엣을 위하여'를 받았다) 회원의 경우 추첨을 해서 DVD도 준다(응모했는데 떨어졌다. ^^) 뿐만 아니라 새로이 둥지를 틀 극장으로 오라고 초대권까지.... 돌 하나로 새 세 마리를 잡았으니 요즘말로 왕대박이라고 해야겠지만 웬지 하이에나가 된 이 기분은 뭐지?

 

사실 친구 만나거나 시내에서 자투리 시간 보낼 때 주로 이용했을 뿐 어떤 영화를 노리고 간 적도 별로 없던 내가, 막상 보내려니 갑자기 영화 골라 보는 '매니아'의 심정이 되어 아쉽다고 호들갑이군. ㅋㅋ

어쨌든 고마운 초대장 앞세워 백두대간의 새로운 보금자리 구경을 한번 가긴 할 텐데, 과연 광화문 만큼 정이 들지는 모르겠다. 시네큐브의 뒤에는 우리 세대가 마음을 두었던 '광화문'이 있었으니...  

 

 

<부록1> '세라핀'은 이런 영화....  

 

 

남루한 차림새의 뚱뚱한 중년여성이 언덕으로 터벅터벅 올라간다. 그리고 거대한 나무위로 꾸역꾸역 올라가 조용히 앉아서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언덕 위의 나무, 그리고 한 여인을 롱 숏으로 잡은 스크린이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다. 그도 아니라면 그저 나무를 껴안는 것만으로도 미소를 머금는다. 대지와 자연의 향과 소리와 제대로 호흡하는 바로 이 여자의 이름이 세라핀이다.

천재 예술가의 내면, 광기, 예술 작업은 영화 소재의 끊이지 않는 원천이다. 그들은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고, 그렇기에 실화의 감동이나 진정성을 전달하기에 용이하다. <세라핀>또한 다르지 않다. 20세기 초에 활동했고 주목을 받았던 프랑스의 여류화가인 '상리스의 세라핀' 세라핀 루이의 예술과 삶을 그린다.

세라핀은 처음엔 그저 청소하고 빨래하는 동네 하녀로 비춰진다. 20세기 초 프랑스는 엄연히 계급이 잔존한 시기였다. 그녀는 분명 귀족들이 업신여기는 천한 계급의 독신 여성이지만 집세를 낼 돈을 아껴 물감을 사는 흔치 않은 인물이었다. 물론 변변한 학업도, 그림 공부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런 세인들의 평가는 미술평론가이자 화상인 빌헬름 우데를 만나기 전 얘기다. 피카소와 루소 등을 발굴해온 그는 전원생활을 즐기려 들른 상리스에서 우연히 세라핀의 그림을 접하고 감동한다. 그때부터 세라핀은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파리 예술계에 소개되는 성과를 이뤄낸다.

<세라핀>은 전세계적으로 크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동명의 화가가 어떻게 발굴되고, 어떻게 작품 활동을 이뤄냈으며, 또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를 과장된 장식이나 수사 없이 쫓아간다. 그건 이 영화가 세라핀이란 예술가를 이해하는 형식과도 같다. 말없이 자연을 응시하고 그 기운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던 세라핀. 그의 예술적 원천을 이해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카메라는 때때로 자연 속의 세라핀을 조용히 바라만 본다. 더불어 바로 그때 우리에게 세라핀의 영감을 함께 느껴보라는 듯 자연 그대로의 효과음을 들려준다. <세라핀>은 본능적이고육감적이란 표현이 걸 맞는 세라핀의 작업을 롱 숏, 롱 테이크로 잡아내는 것만으로도 제 할일을 다 하고 있다. 거듭 말하자면, 이것은 예술가가 자연을, 세상을 바라보는 형식과 시선에 한발 짝 가까워지려는 영화적인 시선이다.

그렇기에 어찌 보면 드라마틱한 세라핀의 삶은 담담하게 그리는 자체가 이 영화의 미덕이 되어준다. 하녀로서의 삶을 살다 우데를 만나고, 화가로 인정받고, 광기에 젖어 정신병원에 감금되기까지. 영화는 30여 년에 이르는 이 인생의 드라마틱한 여정을 강조할 생각이 전혀 없다. 물론 꽉 짜인 플롯이나 내러티브 구조가 없기에 자칫 심심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세라핀>은 어떠한 수식이 없이 세라핀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묘한 흥분을 일으킨다.

그러한 흥분은 후반부 세라핀의 작업이 꽃을 피울 때 두드러진다. 전쟁 후 우데와 재회한 세라핀은 그때부터 자신의 방안에 틀어박혀 그림 작업에 몰두한다. 강렬한 색체의 꽃, 나무, 야생 열매, 들풀 들이 한 폭의 캔버스에 담겨질 때 마다 세라핀의 이웃들은 감탄하고, 그러한 감흥은 스크린으로 세라핀의 작품을 감상하는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 한 시퀀스는 중반부까지 확인했던 세라핀의 삶의 양식과 예술적 원천이 어떻게 그림으로 전이되는가를 통해 감동을 자아낸다.

안타깝게도 세라핀은 결국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친다. 배우 출신 마르탱 프로보스트 감독은 여전히 그것이 보편적으로 보아 왔던 예술가의 광기인지, 아니면 지속적으로 자연과 작품과 삶을 일치시켰던 세라핀의 특수성에 기인한건지, 그도 아니면 "천사들이 날 구원할 거야"라는 세라핀의 말처럼 정말 신이 구원한 것인지에 대해 어느 곳에도 방점을 찍지 않는다. 하지만 <세라핀>은 예술과 삶이 어떻게 일치하는 가에 대한 담담한 기록만으로도 충분한 영화적 가치를 확인시켜 준다. 더불어 세라핀이란 모호해 보일 수 있는 인물에 피와 살을 불어 넣은 프랑스의 중견 배우 욜랭드 모로의 연기는 할리우드의 고전적 연기와는 다른 차원에서의 매혹을 불러일으킨다.

출처 : http://v.daum.net/link/3357036 

 

 

주연 : 욜랭드 모로(벨기에) 1953년 02월 27일생

<부록2> 미술관 재롱잔치

영화를 기다리는 동안 시네큐브와 같은 건물 같은 층을 쓰고 있는 일주미술관에 들어가봤다.

'파리의 골목길 여행'이란 주제의 그림들 속에는 내가 내년쯤 밟아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는 파리의 골목길, 그리고 테디베어로 변신한 작가가 있었다. 둘러보고 나오는데 입구에서 파리 골목길의 주인공이 되어보시라고 붙잡는다. 테디베어 모자까지 주면서.... ^^

장난삼아 촬영에 응했는데 실물과는 달리 어찌나 깜찍하게 나왔는지 혼자 보기 아까워서....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