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萬玉 2009. 11. 28. 09:20

'재'는 길이 나 있는 높은 고개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다.

요즘은 산동네에까지 도로가 들어와 있으니 해발 200여 미터 지점에 살고 있는 우리같은 고산족조차 산봉우리를 끼고 돌아가기는 할지언정 재를 넘을 필요가 없어졌다. 하지만 시간을 내어 따로 운동하지 않아도 되었던 옛사람들의 삶을 흉내내보고 싶은 생각에 가끔 '재'를 넘어보는데, 이 '재를 넘는' 행각은 나의 평소 운동코스나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것이 운동 외에 다른 목적을 가졌다는 점에서 신선한 성취감을 준다.    

더욱이 그 '목적지'들은 '은퇴모드'에 들어간 내 삶에 활력을 주는 장소들이기 때문에.... 얼마 전부터 나는 이 길들을 (문학적인 색채를 살짝 가미하여) '행복을 밟는 길'로 부르고 있다. ^^

 

1. 도서관 가는 길

 내가 도서관을 찾게 된 것은 근래 들어서... 도판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일반적인 책보다 비싼 [미술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규모가 웬만하면서도 멀지 않은 구립도서관이 서울대 부근에 있다는 걸 알아내고 갈 때는 버스를 타고 갔는데, 올 때는 아침에 빼먹은 '오늘의 운동'을 벌충하려고 버스 다니는 길을 따라서 걸었던 것이다. 15분 정도 걸리는 미림여고 입구까지 평지길 워밍업을 마치니 나머지 30여 분간은 줄기찬 오르막.... 어, 괜찮네. 운동 좀 되는데?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뜯어 땔감 쓴다고, 다음번에 갈 땐 아예 산으로 넘어가볼까?

     

 국제산장아파트 건너편에서 시작해서 삼성산 성지 지나고 활터 위쪽 골짜기를 건너 보덕사에서 물 마시고 돌아오는 것이 나의 (자주 빼먹기는 하지만) 평소 운동코스다. 왕복하는 데 1시간 반 정도 걸린다.

거기서 조금 더 뻗쳐가지고 돌산 능선 오른쪽에 있는 성주암으로 내려가면 서울대 옆으로 난 관악산 등산로와 합류하니까 거기서 관악문화원 뒤쪽에 있는 도서관으로 가면 되잖아. 좋았어. 이젠 '재 넘어 글방' 가는거야!

 

그렇게 책 세 권 든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서는 주중행사가 시작된 게 어느새 두 달째다.

활엽수가 많은 삼성산의 초겨울은 성하의 숲과는 또다른 색깔과 향기로 가득하다.

낙엽은 썩어가면서도 향기롭다. 스러져가면서도 많은 얘기들을 들려준다. 

숲길을 밟는 즐거움의 끝에는 달콤한 간식들이 기다리고 있다.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는 서른 한 가지 아이스크림보다 수천 수백 곱절 더 많은 마음의 간식꺼리들이... 

 

어제는 성주암 가는 가파른 내리막길이 싫어서 다른 길을 개척해보겠다고 까불다가 아주 혼이 났다.

분명히 산꾼 아저씨들이 가르쳐주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 내려갔는데 어느 순간 길이 끊겼다.

낙엽이 길을 덮었을 꺼라고 생각하고 80년대말에 유행했던 지프 광고, "길이라도 좋다, 아니라도 좋다!"를 외쳐가며 제일 길같이 생긴 쪽을 택해 기세좋게 걸음을 내딛긴 했는데.... 얼마 안 가  갑자기 발이 낙엽구덩이 속으로 푹 빠지는 바람에 그만 고꾸라져서 바로 앞에 버티고 선 바위에 머리를 처박을 뻔했던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도무지 한치 앞조차 의심스러워 스틱으로 쿡쿡 찔러가며 한 발씩 옮기는데 순조롭게 내려가면서는 느끼지 못했던 골짜기의 적막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거다. 어째 오늘따라 산에 이렇게 사람이 없나그래.

 

20분 가량을 엉금엉금 기다시피 내려오다가 멀리 편안하게 난 오솔길을 발견하고야 한숨 내려놓았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용을 썼더니 무릎도 아프고 발목도 아프고... 그 무슨 대단한 등반이라고 온몸이 진땀으로 흠씬 젖었다. 내려온 길을 돌아다보니... 나무와 바위만 즐비한 비탈 사이를 진짜 용케도 뚫고 왔더군.

다음번엔 도서관 가는 길 말고 오는 길에, 오늘 발견한 편한 오솔길을 따라 집으로 와볼 생각이다. 

오늘 내가 만난 '길 아닌 길' 말고, 성주암 뒷길도 말고, 삼막사 가다가 철쭉동산 쪽으로 내려가는 두 시간 넘게 걸리는 길도 말고....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바람직한 길을 꼭 찾아서 '재 넘어 글방 가기'를 계속해야지. 

요즘 세상에 나처럼 행복하게 산 넘어 글방 가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ㅎㅎㅎ

 

 

 

2. 은정이네 가는 길

이 길은 우리 아파트 단지 내 오솔길을 거쳐 시흥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운동을 하긴 해야겠는데 꾀가 날 때에 대비해 가벼운 산책 코스로 찾아둔 이 왕복 50분짜리 오솔길의 종점은 멀리 금천정이 내려다 보이는 지점. 헌데 어느날 독산동 사는 은정이 엄마가 호압사에 갈 때 금천정 옆을 지나간다는 얘길 들은 뒤부터 옛 사람을 따라하고 싶은 기분이 나를 부추겼다. 은정이네 갈 때 마티즈 굴리지 말고 나도 그 잿길을 넘어다니자꾸나.

그렇게 마음먹은 이후 매주 토요일이면 재 넘어 장에 가는 옛사람처럼 짚신 대신 등산화 신고 괴나리봇짐 대신 교재가 든 배낭을 짊어지고 길을 나선다.  

 

아파트 단지 내 오솔길과 오른쪽 언덕 아래로 동네 아이들 재깔대는 소리가 들리는 야산길을 20분 정도 걷다 보면 제법 깊은 소나무 숲길이 나온다(내가 제일 좋아하는 구간). 그 길의 끝에서 금천정을 바라보고 언덕길을 내려가면 금천구에서 조성한 체육공원과 관악구에서 조성한 생태공원이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다.

금천구, 관악구.... 서울시에서 손꼽히는 가난한 구역들이지만 기업들이 많아 그런지 구의 살림은 그리 가난하지 않은 모양이라 두 공원 모두 널찍하고 조성목적에 맞게 잘 가꾸어져 있으니... 적어도 공원만은 빈부격차없이 누릴 수 있다. 이럴 때만은 아끼지 않고 감탄을 해준다. '대한민국, 참 좋은 나라야!'

 

체육공원의 걷기 트랙에서 살짝 옆으로 빠져서 생태공원을 한 바퀴 돌다 보면 어느새 남부여성회관 옆길.

이 동네는 독산동 20미터 도로로부터 산 구역에 이르기까지 꽤 가파른 언덕에 형성된 단독주택 단지다. 가끔 연립주택도 끼어 있지만 대부분 대여섯 가구가 한 집에 사는 적벽돌 단독주택들이 비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촘촘하게 들어서 있다. 여러 가구가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늘 열려 있는 대문을 밀고 들어가 뒤돌아 2층으로 올라가면 은정이네 집이다. 열 다섯 평도 채 안 되는 비좁은 공간이지만 은정이도, 올해 수능을 치른 은정이 언니도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다. 한 번도 전세금 올려달란 적 없는 인심 좋은 주인 아저씨 말대로 여기서 집 사가지고 나가려고 17년째 눌러살고 있다.                   

 

은정이는 중학교 2학년이다. 엄마는 미싱을 밟고 아빠는 용달을 몬다.

두 사람 다 억척같이 살아왔으니 속 모르는 사람들은 이제 제법 모았겠다고 하겠지만 어렵게 모은 돈을 쓸어가는 사람들은 또 따로있는 모양이다. 두 아이 모두 학원 보낼 형편이 안 되어 학원 보내달라는 작은 아이에게 모진소리를 하는 현장을 목격하고는 맘이 짠하여 위로랍시고 내가 영어나 좀 봐줄까? 했다. 그게 올해 4월초.

(은정이 엄마가 누구냐면.. 지난글 "젊음의 노트를 꺼내보니  http://blog.daum.net/corrymagic/8289160에 등장하는 녀석들 중 하나다)

 

시작은 '봉사'하는 마음으로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게 오히려 나를 위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요즘 애들 같지 않게 공부 욕심도 많은 데다 교과서 외에 다른 공부를 해본 적 없는 녀석이라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실력이 쑥쑥 늘어 오랜만에 선생노릇 하는 보람을 뿌듯하게 안겨주니 사회적 성취에 목말라 있는 나에게 그보다 더한 선물이 어디 있을까. 게다가 '읽기'를 하는 수요일에는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독해교재의 내용 때문에 뒷풀이까지 이어질 때가 종종 있는데, 그 덕분에 파릇파릇한 세대가 마시는 공기를 나눠마시기도 한다. 조용히 진행되고 있는 이 할미의 사회적 퇴화를 막기 위한 은정이의 과외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

그리고... 보너스 즐거움이 또 있다. 가끔 방문 밖에서 나를 기다리는 은정이 엄마의 정성보따리.

이미 서로간에 주는 거 마다 않는 허물없는 사이이긴 하지만 과외가 시작된 후 그녀의 보따리가 잦아지는 것 같아 좀 부담이 됐다. 그래도 친정엄마가 농사지어 보내주는 게 넘쳐서 쟁일 데가 없다는 데야....

하지만 난 알고 있다. 은정이 선생님 것까지 보내달라고 부탁해뒀을 것이고, 내 것을 덜어내어 쌀 때마다 그녀의 마음이 뿌듯할 것이라는 점을.... 그래서 싸주는 대로 고맙게 덥석덥석 받아먹고 있다. 구수한 청국장이며 호박고구마며 알록달록 울타리 콩에 단감에 나주배까지.... 재 넘어 글방 선생이 되니 이런 재미가... ㅎㅎ

올해는 김장도 하지 말란다. 신난다!    

 

어느 소설에선가 읽은 구절이 떠오른다. "그녀는 방바닥에 엎드려 걸레질 할 때면 방바닥과 사랑을 나누는 것 같았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길을 걸을 때면 그 길과 간절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사실 '행복을 밟는 길'은 널려 있다. 나도 기꺼운 마음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 그 길들을 밟아주리라.

게다가 숲길이라면 더 행복하겠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