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전 - 뭐지, 뒤꼭지 땡기는 이 기분은?
로마행 비행기를 탈 날이 다음다음다음 금요일이니 꼭 3주 남았다.
싼 뱅기표, 할인 유레일, 저가항공 프로모션, 환율하락 등을 노리다가 때가 왔을 때 착착 잡아놨고,
배낭 꾸리기도 이골이 나 이젠 출발 이틀 전쯤 공식에 따라 척척 넣기만 하면 되니 준비는 거의 끝난 셈이다.
소프트웨어적인 준비야 하려면 끝이 없지겠만 기본적인 골격만 세워두고 접어두기로 한 지 이미 석 달 전...
자꾸 들쑤셔봐야 맘만 설레고 자칫하면 지겨워질 수도 있기 때문에 떠난다는 사실 자체를 짐짓 외면해왔다.
이제 슬슬 마지막 점검을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솔직이 이번 여행길은 예전 같지 않게 뭔가가 자꾸 내 뒤꼭지를 잡아당긴다.
남편 밥상 걱정인가?
두세달 집 비우는 게 처음도 아니면서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냐고?
예전 같으면 생선 손질해서 한번에 구워먹을 수 있도록 냉동실에 얼려놓고
고기도 구워먹기 좋게, 혹은 솜씨 없이도 잘 끓일 수 있는 김치찌게용으로 딱딱 포장해서 얼려놓고
장아찌류, 김이나 생선통조림 등 두고먹어도 될 만한 것들 양껏 쟁여놓고
마지막으로 간단히 끓일 수 있는 몇 가지 국 끓이는 방법 프린트해서 딱 붙여두었지.
남편도 아들도 밖에서 저녁 먹을 일이 많은 편이라 주로 주말을 위해 해놓는 준비인 셈이니 이 정도 준비도 사실은 수요에 비해 넘칠 정도였다.
오히려 밥상보다 더 걸렸던 건 와이셔츠 세탁과 다림질이었다. (청소는 못참을 지경이 되면 어차피 할 꺼고)
세탁기 돌리는 거야 별일 아니지만 문제는 다림질...
그래도 군대 갔다온 아들넘이 있어 다행이다 여기면서, 좀 낡아 그만 입힐까 하고 넣어뒀던 와이셔츠까지 몽땅 꺼내어 열 벌 넘게 걸어놓고 갔더니만....아들넘이 파업을 했는지 와이셔츠는 동네 세탁소 손을 빌렸더군.
일주일에 세 벌 입는 인내심(!)을 발휘하다가 거의 다 입었을 때쯤 세탁소에 보냈단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두 차례밖에 안 맡겼더군. 900원에 깔끔하게 다림질까지 해주더란다.
그러니 걱정꺼리였던 와이셔츠 뒷바라지 문제도 이번에는 없다.
마지막으로 '화초에 물 주셨나요?'라고 거실에 크게 써붙이기만 하면 떠날 준비 끝!
그런데 문제는.... 작년 가을부터 남편의 밥상이 바뀌었다는 거다.
뒷골 땡기는 일이 잦아지자 한의사 친구를 찾아갔던 남편이 약 대신 받아온 건 '채식'이라는 처방전.
원래 집안에 고지혈증과 뇌혈관 질환 내력이 있는 데다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는 배(출산예정일 임박?) 때문에 진작부터 실행했어야 했는데, 먹고사는 일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신조가 워낙 굳은 양반이라 밥상에 남의 살 안 올리면 이틀을 못참고 허깃증을 호소하는 바람에 '건강밥상'은 끝내 남의 일이 될 줄 알았다.
헌데 몸의 이상이 구체적으로 느껴지자 겁이 났던지 당장 고기를 끊겠다네. 게다가 담배까지....
그리고 현재까지 다섯 달 째.
뒷골 땡긴다는 호소는 진즉 자취를 감췄고 보너스로 낯빛까지 맑아졌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하니
남편도 나도 이 '건강밥상'의 정착을 위해 한창 열심중인데....
문제는 그 '소박한' 밥상 차리기가 솔찬히 까다롭다는 거다.
밥이야 현미와 백미를 반반씩 섞고 보리와 콩까지 보태놓았으니 그냥 퍼서 씻어 안치면 되지만
뚝딱 해먹기 좋은 계란, 육류, 해물(생선 제외)을 배제하고 나니 메뉴 선택의 폭이 너무나 협소해지는거다.
소스를 바꿔본다, 양념을 바꿔본다 하며 머리를 열심히 굴려도 '그 나물에 그 밥'을 피하기가 진짜 쉽지 않다.
30년차 주부인 나조차도 저녁상 준비할 때마다 '오늘은 또 뭐해먹나' 골머리가 아픈데
부엌이랑은 담 쌓고 사는 이 냥반에게 도대체 어떻게 먹고 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짜고 매운 거 피하자니 배짱좋게 쟁여놓고 가던 밑반찬도 쓸데없고
과연 이 냥반이 '건강밥상'의 핵심인 신선한 채소를 열심히 사다가 열심히 소모할지....
겨우 궤도에 올려놓은 '건강밥상'이 돼지고기 김치찌개 시절로 되돌아가는 거 아닌가 심히 걱정된다.
그러고 보니 참 내가 부엌을 너무 쉽게 뒤로 하고 떠났었구나 싶은 뒤늦은 깨달음이.... ㅜ.ㅜ
아들넘의 태클
게다가 지난번 여행 때까지는 지지모드였던 아들녀석이 어째 이번 여행을 앞두고는 슬슬 딴지를 건다.
얼마 전 뭔가를 잃어버려서 열나게 찾고 있는데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한다는 소리가,
"엄마, 유럽 가시지 마시지.... 그렇게 정신없어 갖고 어떻게 다니겠어요", 아 이러는 거다.
귀에 딱 걸렸지만 농담이거니 하고 그냥 넘어가줬는데
이틀 뒤에 점심 좀 늦게 챙겨줬더니
"엄마, 여기가 여행지야? 엄마 여행왔어?" 아니, 또 이래요.
정색을 하고 따졌지. 뭐가 불만이냐고....
반대하려면 내가 여행 5개년계획 발표할 때 그때 반대를 했었어야지 흔쾌하게 동의해놓고
이제와서 태클 걸면 열심히 준비한 나더러 어쩌라고오?
그랬더니 실실 웃으며 '질투 나서' 그런단다.
아니 녀석아, 앞길이 창창한 넘이 뭐 그런 소릴 한다냐.
내가 처음 비행기 타본 게 우리 중국으로 이사갈 때였다. 그때 내 나이 마흔이었다고....
너도 알다시피 버는 족족 저축하면서 이 여행 성사시키려고 기다린 세월이 십년이었다고....
샘 나면 너도 열심히 벌어서 가라고. 나 하나도 안 미안하다고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녀석이 던진 '질투'라는 단어가 계속 귓가를 맴돈다.
혹시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이 '이기적인 엄마'... 이 말은 아니었는지...
미룰 수 있으면 미루고 싶다
이상하게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
뱅기표야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환불할 수 있으니 유레일 패스만 안 샀어도.....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하긴 요즘 내 주변이 좀 소란스럽긴 하다.
하지만 나와 직접 관련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안 간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남편도 마음 먹었을 때, 할 수 있을 때 하지 않으면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격려해주니
가기는 갈꺼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문제는 그게 아니라.... 웬지 자꾸 그런 마음이 든다는 점,
그리고 그런 마음이 여행길에 조금이나마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그게 찜찜한 것이다.
유럽이.... 과연 재미있을까?
이런 생각이 '미룰까' 하는 마음을 더 부채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행 매니아들 중 '유럽이 심심하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그런지... 웬지 내 예감도 그쪽으로 기울어간다.
책에서 영화에서 음악 속에서 만났던 멋진 유럽이 그 모습 그대로 내게 다가와줄까?
과연 그들의 일상 속에 딱 한 발이라도 담가볼 수 있을까?
조금 덜 조직화된 사회를 설렁설렁 만만하게 헤집고 다닐 때가 더 좋았을지 모르겠다.
지난 여행길에서 만났던 유럽 친구들은 대부분 마음이 열린, 참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인간적인 매력이 어쩌면 내 여행지를 유럽으로 결정하게 만든 강력한 동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허나 유럽에 살다 온 후배 말에 의하면, 배낭 메고 외국으로 돌아다니는 애들은 개인주의적이고 꽉 짜인 그들의 사회를 못참아하는 애들이 대부분이라네. 그렇다면... 여행길의 가장 큰 즐거움인 사람 사귀기는 애저녁에 접어둬야 하는 거 아닌지..... 푼수짓 빼고 나면 나 뭐하고 놀아?
어메이징 레이스도 하루이틀이고 쇼핑도 나이트 라이프도 별로니..... 사진찍기 밖에 친구가 없는 외로운 여정에 지쳐서 한 달만에 집생각 나면 어쩌냐고.... 흑흑흑.
그리고 떨치려 해도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몹쓸 생각 하나
혼자 배낭 메고 다니기엔 나이를 너무 먹었다는.... (암만해도 사람들의 동정어린 시선을 피하기 어려울 듯)
배낭에 트래킹화 말고 캐리어에 예쁜 단화 모드로 바꿔볼까?
어디 농장이나 조용한 수도원 같은데 처박혀서 딩굴딩굴 글이나 실컷 쓰다 올까?
기껏 야심차게 준비해놓고 이런 약한 소리를 하다니.... 확실히 한 해가 다르게 늙어가는 모양이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