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10 - 빠리, 외로움과 벗하기
외로움은 삶에 대한, 他者에 대한 강한 애정의 표현이다.
스스로를 외부와 연결시킬 수 없는 상태에 처해 있을 때 그 연결에 대한 의지가 자신에게 있으면 허무, 그 의지를 외부에 빼앗긴 상태라면 외로움 아닐까 나름 정의해본다.
외로움은 그래도 허무보다 낫다. 허무감은 외부의 모든 것에 대한 흥미도 기대도 없는 것.
그런 의미에서 외로움에 목마르게 하는 여행이, 허무감에 묶여 옴쭉달싹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거다.
도착 첫날 내가 묵을 방에 들어가보니 이랬다.
14인실, 그것도 female dorm도 아니고 mixed dorm이었다. (물론 빈 침대가 없어서 그랬다)
오후 네 시쯤 도착했으니 당연히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저 꼴로 나갔다. 어무이!! )
나도 일단 배낭만 던져놓고 나갔다가 저녁 9시쯤 돌아오니 방안이 온통 시끌벅적하다.
초미니 스커트에 그물스타킹에 가발 쓰고 입술 새빨갛게 칠하고 서로 봐주면서 깔깔대고...... 7인조 독일 계집애들이 완전히 방을 장악하고 있다.
어디 코스튬 파티라도 가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주말도 아닌데......
이 할미는 씻고 잘 준비를 하는데 이 아가씨들의 활기찬 하루는 이제 시작이구나.
낮밤 바꿔사는 룸메이트를 만난 게 2년 전 아르헨티나 살타에서 처음이었는데
그땐 그게 그렇게 신기하더구만 (밤에 안 자면 다음날 힘들어서 어떻게 여행을 하노... 아줌마표 걱정)
차츰 알고 보니 '파티여행자'(여행의 목적이 술값 싸고 파티 피플 많은 동네에서 실컷 놀다 가는 것)들이 여행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듯.
중남미에선 아르헨티나, 깐꾼 분위기가 그랬던 것 같고 라오스에서는 방비엥이 그랬던 것 같고 유럽에선 당연히 스페인인데
내가 실감한 곳은 세비야이고 입소문이 난 곳은 ibiza...(the Capital city of party, 파티 피플과 친구가 되면 또다른 여행의 세계가 열린다.)
시끄러운 독일 계집애들이 나가고 나니 일본 여학생 둘, 브라질 남자, 아르헨티나 남자, 나머지 침대 두 개는 비어 있다.
새벽녘에 부스럭 소리에 눈을 떠보니 빈 침대 두 개의 주인공들이 나체쇼 중이다. 새벽에 도착한 모양이지.
어둠 속에서 바깥 조명에 희미하게 비친 조각같은 몸매... ㅋ
두어 시간 경과하니 독일 계집애들이 들어와 집단 나체쇼를 벌인다. 서양애들은 도무지 입고 벗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 같다. (나야 재밌지만..^^)
믹스트 도미토리가 처음은 아니지만 이렇게 제 하고 싶은 대로 활개를 치는 숙소는 처음이다.
내 침대머리 쪽 침대에 누운 브라질 남자는 왜 하필 머리를 그쪽으로 두고 자는지, 밤새 숨소리가 귓전에 들려 거북했다.
아침을 먹으며 처음 룸메이트들의 민낯을 본다.
어젯밤의 빨간 립스틱 가죽부츠 아가씨들은 오데로 갔나. 오늘은 회색이 주종을 이루는 스웨터에 청바지 차림이다.
베를린 근교 어느 도시에서 왔다는데 파리 애들에 비하면 확실히 촌티가 난다.
저희들끼리 독일어로 떠드는데 엄청 시끄럽다. 이렇게 일행 많은 팀과 한 방을 쓰게 되는 건 확실히 불운이다.
특히 나처럼 소외감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겐......
하지만 상대방이 무관심하다고 해서 나를 무시한다거나 싫어한다는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
자기 신분상의, 혹은 직업상의 룰을 따르는 것일 뿐이고, 자신의 준비 안 된 상태를 방어하는 태도일 뿐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무례하거나 부당하게 대한다면 끝까지 따져야겠지만, 내게 섭하게 했다고 무시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건 그저 소외감이 덮어씌운 콩까풀일 뿐이다.
그들은 날 봐주지도 않지만 깔보지도 않는다.
후쳇 동굴까페에서 만났던 도도한 한국 처녀들, 그녀들의 태도도 어찌 보면 일종의 처신 기술일 수 있다.
무례하거나 몰상식하거나 자기와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 시달리지 않기 위한...,,살아가는 방법인데 뭐라겠냐.
어쩌면 내가 너무 뒤늦게 알아차린 게 된 걸까? 남들은 다 그렇게 사는데?
무관심 속에 버려졌을 때에도 꿋꿋이 살아가는 노하우를 터득해가는 것도 여행으로 쌓이는 내공이려나.
언젠가 서바이벌 프로그램 '도전 수퍼모델'에서 왕따당하는 애가 선인장을 'cousin It'이라고 부르며 그것과 대화하던 것처럼
나 역시 냉랭한 숙소에서 재빠르게 나만의 쉘터를 발견하고 거기서 나만의 기쁨, 나만의 친구들(비록 무생물일지라도)을 발견해간다.
사끄레꾀르 성당이 바로 보이는 옥상 베란다는 (특히 올빼미족들이 한밤중이었던) 청량한 새벽 시간에 내 마음을 풀어놓는 훌륭한 쉘터였다.
그리고, 방 바깥 복도 끝에 매달린 비상 화장실.
새벽에 일어나는 특권으로 방 안에 딸린 화장실은 늘 내 독차지였는데, 어느날인가는 파티 갔다가 새벽에 돌아온 독일 계집애들에게 뺏겼다.
베르사이유 간다고 침대에 눕지도 않고 집단적으로 화장실을 쓰는데 일곱 명이나 되니 참고 기다릴 수가 없어
평소에 봐두기만 하고 한 번도 들어가보지 않았던 그 화장실에 들어가봤다.
앉으면 양팔이 거의 벽에 닿고 다리를 뻗으면 문이 닿는 딱 한평짜리 공간인데 머리 위에 큰 창문까지 있어 맘껏 배변과 흡연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옥상에서도 흡연을 할 수 있지만 늘 거센 바람이 몰아치기 때문에 호젓하게 흡연하기에는 이 공간이 딱이다.
이후 이 공간은 나의 '즐겨찾기'가 되었다. 꼭 볼일이 없어도... ㅎㅎㅎ
'변기에 명중하지 않으면 혼내주겠다'는 말풍선과 함께 알통을 자랑하는 뽀빠이처럼 생긴 'Mr. Proper' 형님과 눈을 맞추고 앉아 있으면 외롭지도 않고
머리 속 한켠으로 밀어뒀던 좋은 생각들이 마구마구 피어올랐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빠리의 하늘 밑' 나만의 공간. ^^
2,5유로짜리 바게트 샌드위치가 빠리에서의 내 주식이었다.
고향의 음식이 그리우면 삐갸르에서 냉동 중국음식 사다 데워먹고 수돗물 마시고(에바 스타일)
그러면서 빠리의 고학생 주은래와 등소평을 생각했다. ^^
그러고 보니 숙소에서 늘 외톨이였던 것만은 아니네.
브루따뉴에서 무작정 상경하여 날품을 팔면서 직업을 구하고 있던 어느 총각이 프랑스 전통요리라면서 '라따뚜이'라는 스프를 만들어 함께 먹기도 했었는데... ㅎㅎ
헛헛하고 외로웠기에 더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 Paris, Anver, Hostel Le Village in Paris.
잘 있거라, 이제 나는 리스본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