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수요일'
우리에게 '넷째 수요일'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는 날이다.
앞선 두 주에 걸친 항암치료 결과가 어떤지 듣고 새로운 사이클을 시작하는 날이니 사실 '첫째 수요일'이라 부르는 게 마땅하지만
굳이 우리가 이 날을 '넷째 수요일'이라 부르는 것은 두 주일의 치료 성적을 평가받는 날이라는 기분이 더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언젠가는 돌아올, 항암치료의 종료를 알리는 마지막 '넷째 수요일'을 기다리는 마음이 내심 작용하고 있는 거겠지.
'넷째 수요일'은 5시 30분을 알리는 알람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6시에는 출발을 해서 7시 30분까지 혈액검사를 마쳐야 9시 30분에 예약된 외래진료에 그 결과를 반영할 수 있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
7시가 넘어야 해가 뜨는 한겨울에는 이 이른 행차가 괴로워서 외래 시간을 뒤로 늦춰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두어 번 다녀보니 이 시간대로 잡길 백번 잘했더라.
암 센터가 생긴 요즘에야 낮시간에도 그리 북적이진 않지만, 채혈실과 CT실이 본관에 있던 때는
남들 출근길에 나서는 그 이른 시간에 백몇번째 환자로서 채혈실에 들어가야 할 지경이었고,
진료 마치고 나오는 열 시 무렵이면 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으니... 세균 감염을 특별히 걱정하는 우리로선 아침잠이 문제가 아니었지.
요즘은 암센터 입구에 남편을 내려준 뒤 주차하고 올라오면 이미 채혈이 끝나 있다.
자, 이제 아침 먹으러 갈꺼나..
에스컬레이터로 4층으로 올라가 본관 2층과 연결되는 환한 복도를 지나서 수납창구 옆 에스컬레이터에 올라 1층으로,
1층에서 다시 지하1층 우체국 쪽으로 내려가 어린이병원과 연결되는 파란하늘 흰구름이 그려진 복도를 통과한다.
이 미로는 MRI촬영실이나 주차장과도 연결되어 있어 남편이 입원해 있던 시절에 몇 차례나 헤매고 다닌 결과 간신히 익힌 길이다.
당시 충격이 커서 그랬겠지만, 애증이 얽힌 길이라면.... 좀 그런가? ^^
아무튼 그 길 중간에 있는 리틀 키친이란 스낵은 그 시간에 막 문을 열기 때문에 제일 간단한 유부우동 밖에 못 해주지만
한번 거래 트면 끝까지 가는 남편의 고집 때문에 어제도 오늘도 늘 거기다.
밥 먹고 나면 진료까지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다.
예전에는 가장 사람이 없는 그 복도 끝 MRI센터 대기실에 가서 남편은 깜빡잠을 자고 나는 들고 온 잡지를 읽었지만
지금은 암센터 베란다로 가서 마주 보이는 창경궁을 감상하거나 베란다 뜰에 심어진 꽃구경을 한다.
가끔 남편은 리틀키친 옆에 있는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기도 한다.
마무리까지 가위를 사용하는 솜씨좋은 이발사 아저씨가 옛날식으로 이발을 해주는데, 면도까지 만 원에 끝내준다.
70년대 박정희 때 스타일 아니냐고 해도 이발소를 나서는 남편의 얼굴은 늘 대만족이다.
하긴 스타일 논할 것도 없긴 하다. 약물에 시달리는 사이에 숱도 숱이지만 어느새 백발마저 성성해졌으니... 일사불란, 심란해 보이지 않는 게 그저 최고렷다.
남편의 주치의는 혈액종양내과 부문에서 연구업적으로는 첫손 꼽히는 분인지 몰라도 너무 바쁘시다.
시작시간 30분 전부터 진료를 시작할 정도로 부지런히 일하지만.... 우리에게 내주는 시간은 3분이나 될까?
"어디 불편한 데 없으세요?"
"암이 쪼금 줄었어요. 잘 하고 계시네요."
"그럼 치료 계속합니다."
이 세 마디가 전부다.
백혈구 수치를 물어보면 구체적인 수치 대신 "좋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오고, 암 크기가 얼마나..... 물어보면 "별로 의미는 없어요"라는 알쏭달쏭한 대답이 돌아온다.
대답도 대답이지만 선생님이 줄곧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환자 얼굴이 아니라) 컴퓨터니... 뭘 더 물어보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누굴 탓하겠나.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 대한민국 최고라는 병원을 찾아온 수많은 환우들을 탓하겠나,
매뉴얼에 의해 일사천리 진행되는 효율적인 시스템을 탓하겠나,
어차피 장거리 마라톤 같은 투병생활에서 크게 나빠지거나 좋아지지 않는 한 들을 얘기도 별로 없는 병세를 다행으로 알고 물러나는 수밖에....
그리고는 괴롭긴 해도 암을 계속 줄여줄 것을 믿기에, 주사실이 있는 5층으로 보약주사나 맞으러가는 양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기곤 하지.
남편이 주사를 맞는 동안 나는 2주일치 약을 사러 나간다.
병원 밖으로 나간 김에 서점에 들르거나 서서히 붐비기 시작하는 마로니에 공원에 앉았다가 돌아오면 어느새 정오.
얼마 전까지는 돌아오는 길에 호평동 '부산복집'에 들러 해독에 좋다는 복지리(실제로 먹으면 컨디션이 좋은 것 같다)를 땀 뻘뻘 흘리며 한대접씩 비웠지만
암을 죽이겠다고 독주사를 맞고 바로 해독해버리면 안 될것 같다는, 남편 특유의 고집이 발동하여 그 즐거움도 네 번으로 땡! ^^
우리의 '넷째 수요일'은 그렇게 끝난다.
약에 취한 남편을 싣고 수동면으로 돌아오는 길은 조금 고독하지만 괜찮다.
내가 누구를 지켜준다는 건 누군가도 역시 나의 곁을 지켜주고 있다는 뜻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