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5종세트
* 기다림 1 - 항암치료
지난주 내내 우리의 생활을 지배했던 기다림이다.
월요일에 외래진료를 받고 (입원실이 나준다면) 바로 항암치료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백혈구 수치가 조금 부족하다고, 백혈구 생성 촉진주사를 두 번 정도 맞고 좀 기다렸다가 금요일쯤 입원하란다.
9차에 걸쳐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 한 번도 백혈구 부족 얘기가 없었는데 이번 약이 독하긴 독한 모양이네.
아니, 그동안 누적된 항암제 독성의 결과가 이제 나타나는 건지도...
월요일과 화요일 연이어 백혈구 증진주사 맞으러 다니는 동안 설사가 또 한 차례 지나갔다.
키위주스를 조금 차게 마셨더니 바로 좍좍이다. 이게 바로 면역력이 떨어졌다는 증거겠지.
백혈구 수치 올리는 데는 닭발 삶은 물이 좋다는데, 조류포비아(!)가 있는 나로서는 도무지 닭발 씻을 엄두도 못 내겠고 고민고민 하던 중
닭발도 고아준다는 탕제원을 발견, 100포 맞추고 돌아오는 길에 아랫집 아주머니를 만났는데
자기네 집에 '해놨는데~ 안 먹는다~'고 성화 받치는 애물단지가 있다면서 냉동고에서 몇 덩어리 꺼내주신다.
때마침 우리에겐 '설사유발자'로 의심받고 있는 야채스프가 남아 있길래 훈훈하게 답례하였다.
닭발 삶은 물과 야채스프.... 암종이나 병기, 항암치료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암 환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아이템이 바로 이것 아닐까 한다. * . *
드디어 기다리던 금요일.
병상이 없단다. 내일도 모레도... 2인실은 다음주 초쯤에, 6인실은 다음 주말쯤에 날 예정이라네.
지난 화요일에 입원할 예정으로 싸놨던 입원짐도 풀지 않고 그대로인 채.... 일주일이나 늦어지고 있구나.
3박4일 집 비울 동안 상할까 싶어 장도 빠듯하게 봐놨더니 먹을 것도 바닥이 났다.
큐! 사인을 기다리며 긴장 속에서 보냈던 스탠바이 일주일... 확실히 우린 아직 투병 초짜인 모양이다.
가면 가고 안 가면 말고... 조금은 무심해져도 괜찮으련만.
* 기다림 2 - 침 치료
남편의 턱관절이 말썽을 부리기 시작한 지도 석 주가 넘어간다.
처음엔 잇몸이 들떠서 그런 줄 알고 항암치료 들어가기 전에 해결해버리려고 치과를 두 군데나 가봤지만 특별히 손봐줄 데가 없다는데
입도 안 벌어지고 어거지로 우겨넣어도 잘 씹을 수가 없어서 노인네마냥 우물우물...
그러다 보니 소화도 잘 안 되고 입맛도 떨어지고... 먹는 것이 나날이 부실해져 체중까지 줄기 시작하니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마침 친구가 근무하는 병원에 한방과 선생님이 침을 잘 놓는다고 해서 이틀에 한 번씩 침을 맞으러 다니는데
원래 한방치료라는 게 전신치료다 보니 침 뿐 아니라 뜸, 부항까지 따라와서 총 치료시간이 1시간 반 정도 걸린다.
처음엔 그 시간 동안 친구 방에 가서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지만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일하는 사람 맨날 방해하면 안되겠다 싶어서
로비에 앉아서 스마트폰 가지고 놀거나 철 지난 여성잡지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지만
점차 요령이 늘어서 휘리릭 인근 마트에 가서 장을 봐오기도 하고, 차 청소도 하고,
우리 동네엔 없는데 이 동네엔 있는 게 뭘까 정찰도 하고...(그러다가 닭발 삶아주는 집도 발견했음)
그럭저럭 기다림에 익숙해져가고 있는 중이다.
대기중인 사람은 몸보다 마음이 더 바쁘다. 늘 다음 스케줄을 숙지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항암치료가 나의 일주일 스케줄을 지배하고 있다면 침 치료는 나의 하루 스케줄을 지배하고 있다.
6시 기상 / 시원한 시간을 놓치지 않고 산에 가야 하기 때문에 7시에는 아침식사를 완료해야 한다.
아침 먹은 거 치우기 바쁘게 바로 산책 나갈 시간이다.(웬만하면 동행한다)
산책에서 돌아오면 10시 반, 남편은 씻고 한숨 자고 나는 바로 점심준비에 들어가고...
12시에는 점심을 먹어야 치우고 바로 출발할 수 있다.
1시에 떠나 2시부터 3시 반까지 기다리고... 집에 돌아오면 4시 반
숨가쁘게 간식을 준비한다. 남편이 뒷산 가기 전에 대령해야 하니까.
남편이 뒷산에서 돌아오면 7시 반, 유일하게 보는 연속극 '불멸의 며느리'를 켜놓고 저녁을 먹는다.
하루종일 나를 지배했던 스탠바이 상태가 해제되는 시간이다. 아홉시 뉴스 끝날 때까지 그냥 상을 뻗쳐놓은 채로 개겨도 되는...
한가하게 바쁜 하루는 이렇게 끝난다.
* 기다림 3 - 인터넷 연결
속도가 빠르든 느리든 좌우지간 연결해달라고 신청한 것이 5월 중순쯤이었다.
인터넷 선로가 나빠서 선로 보수공사부터 해야겠는데 신청세대가 밀려 두 주 정도 기다려달라더니 http://blog.daum.net/corrymagic/13754613
거의 한 달 정도 지난 뒤에 연락이 왔다. 해드리긴 하겠는데 장마가 너무 심하니 날이 갤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달란다.
그러나 이후론 종무소식.... 나도 아쉬운 대로 3G IP플러그를 쓰다 보니 그냥저냥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엊그제 전화가 왔다. 어떻게 5월에 한 신청이 지금까지 그대로 리스트에 남아 있는지 확인차 전화 드렸다고....
어이가 없지만 어쨌든 '해준다' 소리에 이 오지 주민은 그저 황송할 따름이지만
문제는..... 아무리 빨리 해준다 해도 주말이 끼어 있어 월요일 오전에나 시작한다네.
얄궂어라. 그 쇠털같이 많았던 날들을 두고 왜 하필 지금이냐...
오후 입원을 앞두고 있으니(물론 이건 아직 희망사항이다) 약속대로 오전에 와서 빨리빨리 끝내주지 않으면 이 일을 또 어쩐다냐.
입원하라는 전화, 그리고 인터넷 연결하러왔다는 띵똥....
아무래도 오늘 역시 강도높은 기다림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할 듯.
기다림 4 - 택배 등등
지난 금요일에 입원할 것으로 여기고 택배 등 받을 물건들의 도착날짜들을 이번 주 화요일로 몽땅 맞춰놨는데
입원 일정이 틀어져버렸으니... 난감하군.
아들넘 졸업식장에서 찍은 사진도 받아야 하고, 고마운 분들이 보내주신다는 먹을거리도 두 상자.
다른 물건들이야 집 앞에 흩어져 있어도 크게 상관 없지만 식품의 경우는 땡볕 아래 방치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1층집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듯. 반달이도 한번씩 들여다봐달라고 했는데.... 참 여러가지로 번거롭게 한다.
기다림 5 -?
뭔가 기다리는 것이 엄청 많은 기분에 '5종세트'라는 제목으로 시작했지만
정리하고 보니 '기디림 5'라는 이름으로 장단맞출 꺼리가 동이 났다.
그냥 주인공을 반달이로 바꿔 '기다림 5 - 쥔님과의 나들이'로 해야겠군.
반달이는 어제 오전 산책에서 돌아온 이래로 쥔님이 등산화 신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가 방금 전 그 기다림의 결실을 받아들고 신나게 뛰쳐나갔다.
하지만 오늘부터 몇날 며칠 동안은 쥔님을 그리워해야 하리라. ㅜ.ㅜ
'기다린다'는 건 뭔가 좋은 일에 어울리는 단어인 듯한데
'독약주사'를 기다리며 그에 맞춰 이런저런 일들이 정리되기를 기다린다니....참으로 얄궂은 기다림이 아닐 수 없구나.
그러나 이 모든 기다림들이 남편의 병세 호전을 위한 기다림들.... 결국은 좋은 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니
인내하고 기다리는 자에게 복 있을 진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