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기사] 장수하는 4기 암환자들..
무단배포 금지라지만, 이기사는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는 좋은 글이라..
(뭐라하지 않겠지만) 그냥 복사해왔습니다..
알게모르게 우리 주변에 지혜롭게 치료받으면서 오래, 잘, 지내시는 환우분들이 있으신 것 같고, 닮고 싶네요~
아래는 기사 내용입니다...
내가 학생 때 족보로 외우던 폐암의 예후. 첫 진단 당시 pericardial effusion이 있으면 평균 수명 1개월, pleural effusion 있으면 3개월, brain metastasis 있으면 6개월 미만.
그런 형편없는 예후를 접하고, 내심 ‘혹시 내가 폐암에 걸리면 예후도 안 좋은데 힘들게 항암치료 받느니 그냥 진통제 먹으면서 통증 조절만 하다가 죽는 쪽을 택하리라’고 다짐했었다. ‘어차피 완치되지 않는다면 미련하게 삶에 연연하느니, 사는 날까지 살다가 죽지 뭐….’
그러나 의사가 된 이후 나는, 한 번도 치료받지 않고 죽게 되는 암환자들이 진통제로도 조절되지 않는 통증으로 얼마나 고통 받는지 알게 되었다. 반면에 매우 나이스하게 항암치료를 하면서 꽤 괜찮은 일상을 누리고 사는 암환자들이 매우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주 큰 차이가 있는 그들의 삶의 경로를 보면서, 나는 ‘최소한 first line standard chemotherapy는 받아야겠다’고 슬쩍 결심을 바꾸었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요즘, 폐암치료는 외국 문헌에서 화려하게 선보이는 첨단 검사와 기법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맞춤치료의 첫발자국을 내딛고 있다. 비소세포폐암이라고 한꺼번에 명명하기에는 histology에 따라 예후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가능하면 조직검사를 하고 세포 유형을 정확히 진단하여 선암이 나오면 EGFR 유전자 검사를 하는 것, 그래서 이 유전자 돌연변이가 있을 때 먹는 항암제인 이레사나 타세바를 먹을 때 우리나라 비흡연자 일부 여성환자들은 반응율이 70%에 육박한다는 것, 그래서 2~3년간 이렇게 먹는 항암제로 병의 진행을 막으며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정도는 종양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식이 되었다.
4기 폐암으로 진단 받은 지 8년째인, 어느 38세 여자환자는 얼마 전 4번째 뇌전이가 발견됐다. 그녀가 ‘이제 좀 힘드네요. 회사를 당분간 좀 쉬어야겠어요’라며 진단서를 받으러 왔을 때, 나는 정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도 화려한 그녀의 병력 기록지 때문이었다. 웬만한 항암제는 다 써서, 몇 년 전에 썼던 약을 다시 반복해서 쓴 일도 있었다.
‘대다수’의 환자라고 뻥 튀겨 말하기는 어렵지만(사실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교과서에서 언급하는 평균 예후보다 훨씬 오래 생존하고 일상의 삶을 유지하며 사는 4기 암환자들도 제법 많다. 4기 폐암으로 진단 받았지만 3~4년씩은 너끈한 환자들, 1년 치료하고 6개월 쉬고, 병이 진행하면 다시 1년 치료하는 이런 싸이클을 반복하면서 그들은 슈퍼맨이 되어간다.
유방암은 훨씬 더 오래 사는 암이다. 물론 같은 유방암이라도 세포 유형과 생물학적 특성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오래 사는 환자들이 매우 많다. 뼈에 전이된 채 항호르몬제 하루 한 알로 3~4년을 멀쩡히 지낸다. 후줄근한 환자복을 입고 병동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예쁘게 가발 쓰고 정장 차림으로 외래에 나타난 그녀들은 너무도 당당한 생활인이다.
암환자가 죄인인가?
완치를 기대할 수 없는 4기 암환자, 이들의 생존기간이 늘어나는 데는 다양한 진단 및 검사 기법의 발달, 엄청난 속도로 개발되는 신약들,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되는 여러 보존적 약물의 개발 등의 요인들이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4기 암환자들이 ‘장수’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을 진료하는 의사들의 철학, 즉 ‘암이 나빠져서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교정 가능한 다른 요인에 의해 환자 상태가 나빠진다면 최선을 다해 검사하고 치료해야 하는 것이지, 섣불리 4기 암환자니까 포기한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장암 치료 중에 급성 심근경색이 오면 일반 환자랑 똑같이 응급으로 스텐트 넣고 약을 써야 한다. 폐암 환자가 폐렴으로 입원하면 똑같이 항생제 쓰고 필요하면 중환자실도 갈 수 있다. 물론 적극적인 치료를 해도 성적이 좋지 않고 심한 합병증이 생기거나 하여 환자의 상태가 나빠지는 경우, 그러니까 적극적인 치료로 인해 오히려 환자의 죽음을 재촉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결과일 뿐이지, 그런 최악의 상황을 미리 예상해서 해야 할 검사와 치료를 하지 않고 미리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의사의 몫이 아니다.
암환자들에 대한 ‘지연작전’
그런데 암환자를 주로 진료하지 않는 과에 우리 환자들 문제로 협진을 요청했을 때, 그들의 소극적인 태도를 접할 때면 놀랍고도 화가 날 때가 많다. 왠지 수술 스케줄도 자꾸 지연되는 것 같고 검사도 빨리 빨리 해주지 않는 것 같다. 자신이 일하는 건물과 암센터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자주 와 보지도 않는다. 환자의 기대여명이 오래 남지 않았는데, 수술 자체의 위험이 환자에게 더 부담이 될 수도 있고, 과도한 검사가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종양학과 의사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암환자라는 이유로 자꾸 뒤로 밀리는 느낌을 받게 되면, 같은 의사인데도 정말 밉고 이해가 안 된다.
응급실에 4기 암환자가 자기 암과는 무관한 문제로 내원해도, 웬만한 과에서는 입원장을 주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종양학과가 일단 입원을 시키고 뭐든지 협진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정작 협진을 내면 일 처리가 밀리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환자와 가족들은 서럽고 억울함을 삭이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같은 의사라 내가 환자 앞에서 그들을 욕할 수도 없다. 나는 그저 ‘오늘 수술이 너무 많으셔서 못 오시나봐요’, ‘요즘 수술이 너무 많이 밀려서 스케줄이 빨리 안 잡히나 봐요’라며,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
4기 환자들이 오래 살다 보니, 전이가 여기저기 되다가, 급기야 마지막 코스라 생각되는 뇌전이 환자들도 급증한다. 뇌전이 중에서도 뇌막 전이는 전신항암치료의 약효가 미치지 않고 특별히 표준치료도 제시된 것이 없는, 그야 말로 ‘막장’이다. 그런데, 어느 날 외래에서 뇌막에 전이된 지 2년이 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걸어서 외래를 다니는 유방암 할머니를 만났다. 놀란 눈으로 옆에 있던 교수님을 쳐다 보니, 말없이 씩 웃으신다. ‘이 정도는 치료해야 되는 거 아니유?’라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제시된 표준치료법이 없어도 어떻게든 도와줄 방법을 찾는 의사들의 철학에 힘입어, 오늘도 우리 슈퍼맨 암환자들의 survival이 하루하루가 늘어가는 것 아닐까? 그들의 수명 연장에는 신약보다 ‘암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신념과 철학’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입증한 ‘대규모 무작위 이중 맹검 임상연구’는 없지만 말이다.
글쓴이 이수현은, 이화여대에서 자연과학의 기본인 물리학을, 서울대 대학원에서 사회과학의 기본인 사회학을 공부했다. 의료사회학 전공으로 박사과정까지 수료했으나, 응용과학의 첨단인 의학을 ‘직접’ 공부하고 싶어서 연세의대에 편입하여 4년만에 ‘쾌속’ 졸업하고 의사가 됐다. 세브란스병원에서 인턴과 내과 전공의 과정을 수료하고, 지금은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펠로우다. 여전히 남편은 물론 딸 슬기에게도 별로 신경을 못 쓰는, 친정 어머니를 괴롭히지 않고는 생활이 안 되는 30대 아줌마다. 지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언젠가는 자신이 배운 사회학과 의학을 접목해 보리라는 의지를 잃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