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萬玉 2012. 1. 4. 11:03

최한배씨가 췌장암 4기 판정을 받은 지 어느새 1년이 되어갑니다.

췌장암이 생존률이 낮은 성질 급한 암이며 항암치료는 단지 생명연장 치료에 불과하다고들 했어도  저는 의지의 한배씨가 또 다른 기적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와 함께 살아온 30년 동안 특유의 끈기와 정성으로 황무지를 개간하여 꽃을 피우고 나무를 길러내는 모습을 익히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7개월간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게 해준 첫 번째 약물치료가 실패로 끝나면서 현대의학의 한계를 실감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 왔고

그 때부터 최한배씨는 짬짬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늘 푯대를 세우고 그 푯대를 향해 달리기를 즐겼던 그에게 비록 작지만 새로운 목표는 병마와 싸울 힘을 줄 것이라 믿고 제가 뒷바람을 잔뜩 넣었습니다.

다 쓰기만 하면 출판을 해서 훗날 손자에게도 읽히고 당신을 아꼈던 사람들에게 정표로 나누어주겠다고.....

사실 그때만 해도 그 체력으로 책 한 권 분량을 써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다 썼네요.

물론 중국생활 이후를 쓸 무렵에는 암세포가 턱뼈까지 전이되어 심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간략해지긴 했지만

어쨌든 끝은 맺었으니 이제 제가 약속을 지킬 차례가 되었습니다.

 

 

책 제목은 ‘길’이라고 붙였습니다.

회고록의 제목을 ‘길’이라고 했을 때 우선 떠오르는 것은 한 사람이 걸어온 인생 편력이겠지만,

그 길은 최한배씨가 동지들과 함께 걸으며 다져나간 역사의 길이며 개인적으로는 인간의 도리를 이루어가는 길이었기에 그보다 잘 어울리는 제목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최한배씨가 걸어왔던 길이 그리 평탄한 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그 길을 걸어오는 동안 더없이 행복했던 모양입니다. 회고록을 쓰는 동안도 그는 “여한 없이 살았다.”는 얘기를 자주 했습니다.

회고록의 서술은 그의 성품처럼 간략하고 담담하지만 행간에는 격동의 한 시대에 바쳤던 고지식한 열정이 여전히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회고록에서 그를 ‘여한 없이 살도록’ 만들어준 두 가지 키워드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열정’이고 다른 하나는 ‘인연’이 아닐까 합니다.

이 책은 최한배씨와 인생길을 함께 걸어주었던 귀한 인연들에게 바쳐질 것입니다.

 

그가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적지 않은 벗과 동료들이 찾아와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대주전자재료, 경기도시공사에서 함께 일하시던 분들뿐 아니라 대우어패럴노동조합과 서울노동운동연합 동지들,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동지들,

대학 동창들, 더군다나 40여 년이란 까마득한 세월을 훌쩍 넘어와주신 청계피복노동조합 동화모임 멤버들, 경동교회 친구분들......

그 분들 덕분에 최한배씨가 밟아온 인생길이 고난 속에서도 늘 행복하고 빛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최한배씨는 은퇴하면 평소에 갖고 있던 생각들을 엮어서 좋은 책 하나 쓰고 싶다고 해왔습니다.

생각을 갈무리할 체력이 안 되어 계획에 없었던 회고록(!)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이것이 그의 작은 기쁨이라도 되어주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여러분들 앞에 내놓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귀한 글을 주신 임무현 대주전자재료 회장님, 김문수 경기도지사님, 문성현 전 민주노동당 대표님, 김준용 전 대우어패럴노동조합 위원장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말미에 붙인 ‘최한배씨의 사생활’은 제가 평소에 써놓은 글 가운데 최한배씨의 인간적인 면면이 보이는 글을 고른 것입니다.

두통과 싸우느라고 충분히 채우지 못한 책 한 권 분량을 메꿔볼까 해서 붙이기는 했지만, 공적인 공간에 집중되어 있는 그의 삶 뒤켠에 숨은 사적인 작은 모퉁이에서

소탈한 ‘인간 최한배’도 잠깐 만나실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병세가 더 기울기 전에 출간하려고 서두르다 보니 여러 분들의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특히 간병에 매인 저를 대신하여 자질구레한 뒷바라지까지 감당하면서 멋진 책으로 만들어주신 편집기획 공감의 김주희 사장님께 특별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2011년 12월 17일

서울대학교병원 완화치료병동에서 최한배의 아내 김 종 민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