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3. 대학생활
대학생활
부푼 기대로 출발한 대학생활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금호동에서 교양과정부가 위치한 공릉동까지는 통학시간만 하루에 4시간이 넘게 걸렸다.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기껏 학교에 갔건만 수업은 걸핏하면 휴강이었다. 교양과정부 수업의 상당 부분은 입시학원에서 이미 배운 내용이었다. 학문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지도 못했다. 교수들의 강의는 적당히 시간을 때우는 느낌이었다. 교양과정부 안에 반이 구성되어 있지만 각자 강의실을 찾아다니는 형식이라 반으로서의 정체성도 학과로서의 정체성도 없는 애매한 형태였다. 오히려 출신 고등학교별로 어울리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입학 동기가 모두합해 6명밖에 안 되는 시골고등학교 출신은 낄 데가 별로 없었다. 국문학과에 입학한 고교동창 김용구와 함께 잔디밭에 앉아 애꿎은 담배만 빨아댔다.
고등학교 선배들이 주최한 마산여고 출신 숙명여대 팀과 함께 한 신입생환영 야유회 미팅이 대학생이 되어 달라진 커다란 변화였다. 난생 처음 여자를 사귈 수 있게 되었다. 어쩌다 과외 아르바이트로 호주머니 사정이 풀리면 숙명여대 앞으로 가 미팅 파트너였던 여대생과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과외 아르바이트도 서울 명문고등학교 출신들이 대부분 차지하여 우리 같은 시골 출신들에게는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기회가 왔기 때문에 돈이 드는 데이트도 쉽지 않았다.
당시의 대학생활과 고교생활의 가장 뚜렷한 차이는 시위문화였다.
3월에 개강을 하고 수업이 시작되면서 바로 임시학생총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누구든 나와서 마이크를 잡고 마음껏 떠들어대기도 하고 준비된 결의문을 낭독하기도 하지만 참석은 자유였다. 나는 강의가 없는 시간이면 주변에 앉아 사람들의 주장에 귀 기울이곤 했다. 강의실에는 ‘자유의 종’과 같은 지하유인물이 놓여 있었다. 이 지하유인물의 글은 정말 명문이었다. 이 글은 누가 쓰는지, 다음에는 어떤 글이 나올지 몹시 궁금했다.
입학 초기의 이슈는 교련반대였고 이후 유신철폐, 독재타도로 발전해갔다.
몇 차례의 학생총회가 있은 후 집회는 거리시위로 발전한다. 플랭카드를 들고 스크럼을 짜고 거리로 나가기는 하지만 당시 교양과정부가 있는 공릉동 공대 캠퍼스는 시내와는 너무 멀리 떨어진 변두리 농촌지역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리 효과적인 시위는 못 되었다. 데모를 막는 경찰기동대가 수킬로 정도 떨어진 한독약품 앞에 저지선을 구축하고 기다리다 구호를 외치며 달려온 시위대가 제풀에 지칠 때쯤 최루탄 몇 방 쏘아대면, 시위대열은 돌맹이를 던지며 얼마간 저항하다 흩어져서 시위대를 따라와 대기하고 있던 스쿨버스에 올라타고 학교로 돌아왔다.
좀더 강력한 시위는 대학본부가 있는 문리대에서의 연합시위였다.
동숭동 캠퍼스는 문리대, 법대, 의대, 음대, 미대와 대학본부가 대학로를 사이에 두고 몰려 있었다. 도심인 종로 5가와도 가까웠기 때문에 언론에 보도되지 않아도 최루탄 냄새만으로도 서울시민들에게 서울대에서 시위가 있었다는 것은 쉽게 알릴 수 있었다. 연합시위는 대학로를 사이에 두고 최루탄과 투석의 지루한 공방전으로 하루종일 계속되었다. 경찰은 종로5가 쪽으로의 진출만은 막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때로는 학교 정문에서부터 봉쇄하여 대학로로의 진출을 막기도 하였는데 이 경우 학생들의 전투심을 자극하게 되어 문리대와 의대 양쪽으로부터 돌맹이를 맞는 위험을 감수해야했다. 그러나 경찰이 학교 안으로 진입하는 경우는 긴급조치 4호 이전에는 없었다. 물론 시위에 화염병도 사용되지 않았다.
3월에 시작된 시위가 4월로 접어들고 전국 대학으로 확대되면서 정부는 휴교조치를 내렸다. 때로는 위수령을 발동하여 군대가 학교에 진주하기도 했다. 나의 대학생활 4년 동안 휴교 조치가 없었던 학기는 단 한 학기뿐이었다. 휴교가 실시되면 수업은 전면 중단되고 시험 대신 리포트 제출이 학점이수를 대신했다.
초기의 시위는 자유분방한 대학생활의 낭만적인 일면도 없지 않았으나 위수령, 긴급조치 등으로 탄압이 강화되면서 점차 대학사회와 군부의 대립, 독재와 민주의 대립 양상이 뚜렷이 나타났다. 시위를 주도하는 학생들에게는 제적과 투옥을 감수하는 결단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결단에는 의협심 뿐 아니라 이론무장이 필요하였다. 대학에는 예비역 장교들이 들어와 교련이란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군사훈련이라고 별것도 아닌 제식훈련뿐이었지만 자유로운 연구와 꿈을 키워가야 할 대학사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처럼 점점 노골화되어가는 군부세력과 대학사회의 모순은 대학생들의 의식을 일깨우고자 하는 이념서클들이 형성되는 토양을 조성했다. 후진국사회연구회, 한국사회연구회, 이론경제학회 등 제법 이름이 그럴듯한 학회들이 형성되었고 뜻있는 교수들의 지원과 지도를 받기도 했다. 특히 상과대학에서는 이러한 이념서클들의 활동이 퍽 활발하였다.
그러나 갓 대학에 입학한 내 눈에는 학회 신입생을 모집하는 선배들의 모습이 빨갱이처럼 보였고, 까맣게 물들인 군복을 입고 다니며 민족이니 민중이니 열변을 토하는 모습은 호기심보다 두려움을 더 불러일으켰다. 결국은 이석현이 주도하여 교양과정부 신입생들이 독자적으로 창립한 신생학회인 사회과학연구회에 가입했는데, 지도하는 선배들이 없었던 탓에 뚜렷한 활동이 없었다. 2학년이 되어 종암동의 상과대학 캠퍼스로 옮기면서 사회과학연구회와의 관계는 자연히 단절되었다.
나의 대학생활의 중심은 학교보다 교회 쪽이었다. 이후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 된 노동운동에의 투신도 교회에서 받은 영향이 컸다.
처음에는 누나의 권유로 경동교회 대학생부에 나가게 되었다. 신입 교인에 대한 따뜻한 배려 덕분에 시골뜨기였던 나도 대학생부에 쉽게 적응하였다.
경동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연대하여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진보교회였다. 한국의 정치사회적 모순 속에서 크리스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역설하시는 강원용 목사님의 설교는 사자후처럼 내 가슴을 깊이 흔들었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스승은 강원용 목사님이라고 할 수 있다. 한때는 신학대학에 가서 목사가 되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 강목사님도 내게 목사가 되라고 권유하기도 하실 정도였다.
당시 강목사님이 원장을 겸하고 있었던 크리스찬아카데미는 중간집단 육성이란 프로젝트를 통해서 노동자, 농민, 여성, 청년, 문화관련 활동가들에 대한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크리스찬아카데미의 사무실은 경동교회 교육관 건물에 있었으며 중간집단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스탭으로는 한명숙(여성), 신인령(노동), 이우재(농민), 강대인(청년), 김문환(문화) 등이 있었다. 합숙교육은 주로 수원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이루어졌다. 교회 대학생부도 이 합숙교육에 참가했는데 그때 받았던 교육이 지금도 기억난다. 우선 교육방식이 당시로서는 대단히 선진적이었다. 강의와 토론, 롤 플레이, 감수성훈련, 춤과 음악, 공동체의식 등으로 다양하게 진행되었으며 각계의 전문가들이 강사로 초청되었다.
대학생부의 활동 역시 성서연구뿐 아니라 해방신학, ‘역사란 무엇인가’ 등의 사회과학 학습을 포함하여 농촌봉사활동, 빈민촌 야학, 연극 등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모임을 마치면 항상 무교동의 경원집 2층 다락방에서 뒷풀이를 했는데 술값은 대부분 수학과 이명수 선배가 지불하였다. 졸업을 미루고 평생을 대학생처럼 살고 싶어했던 그는 고액과외로 벌어들인 돈을 기꺼이 후배들과의 막걸리 값에 탕진하였다. 대학가에서 퍼져가던 ‘아침이슬’ 같은 새로운 노래가 그를 통해 보급되었다.
나는 경동교회가 제공하는 새로운 문화에 흠뻑 젖어들었다. 음악과 술과 토론이 어우러진 자유분방함의 만끽, 노동자, 농민, 빈민, 여성운동 지도자들과의 교류를 통한 사회의식의 성장이 경동교회의 언저리에서 이루어졌다. 자유주의적 휴머니스트들이 모인 대학생부의 활동은 낭만과 순수함의 황홀한 앙상블이었다. 나는 내게 다가오는 새로운 모든 것들을 빨대처럼 흡수하면서 생활의 대부분을 교회 대학부 활동과 함께하였다. 주일학교 중고등부 교사도 하고 주일 예배시간에 대학생부를 대표하여 기도도 하고, 대학생부가 주최하는 연극공연의 배우도 하고 여름방학을 이용해 농촌 봉사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교회 대학생부의 중심멤버가 되었다. 우리는 대학생부를 성서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아름’그룹, 연극, 음악 등 예술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예나’그룹,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소외계층에 관심을 갖는 ‘돌샘’그룹 등 3개의 동아리그룹으로 개편하였다. 각 그룹은 독자적으로 계획을 세워 활동하면서 공동으로 협력할 일에 대해서는 협력하여 대학생부의 이름으로 행사를 진행하였다.
나는 돌샘그룹에 참여하였다. 사회과학 서적의 독서모임이 일상적인 활동이었지만 청계천 뚝방지역의 빈민 실태조사 활동과 야학도 주관하였다.
청계천 뚝방지역의 조사활동 기간중에는 뚝방촌에 방을 얻어 문성현과 함께 기거하기도 했다.
철거되기 전의 청계천 뚝방촌은 서울의 대표적인 빈민촌이었다. 리어커와 자전거가 지나갈 만한 비좁은 뚝방길을 사이에 두고 뚝방 양쪽 경사면에 한두 평 남짓한 판자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판잣집들은 뚝방 아래 바닥 근처까지 뻗어내렸고, 맨 아래쪽에는 땅에 말뚝을 박고 그 위에 판자를 덮은 집들까지 있었다. 물론 화장실은 공동화장실이고 수도도 공동수도여서 아침에는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 끝이 없었다. 그래도 뚝방길 좌우로는 구멍가게, 이발소, 자전거수리점 등 온갖 가게들이 늘어서 있어 웬만한 시골장터 못지않았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막노동일이나 노점을 생업으로 하고 있었다. 물론 주민 중에는 넥타이 매고 사무실에 출근하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방세가 싸고 교통이 편리하니 열심히 돈을 모아야 하는 사람에게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그곳에 교회도 있었다. ‘뚝방교회’는 도시빈민선교회의 모갑경 목사가 설립한 개척교회였다. 10여 평 남짓의 작은 교회지만 뚝방동네에서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가장 넓은 곳이었다.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교인이라고는 20여 명밖에 안 되지만 교회는 항상 지역주민들에게 개방되었다. 우리는 교회 예배당에서 자유롭게 소주를 마시는 청년들 사이에 슬그머니 끼어들어 함께 담소를 나누곤 했다. 또한 뚝방교회의 야학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대학생부에서 야학교사 지원자를 모집하여 연결해주기도 했다.
당시 이 지역의 핵심 이슈는 무허가 판자촌의 전면철거 문제였다. 행정당국으로서는 도심지역(지금의 장안평)의 집단 무허가 판자촌을 무작정 방치할 수는 없었다. 지역 주민들은 이곳에서 철거되면 생활근거지를 잃게 되므로 대책이 필요했다. 무조건적인 ‘강제철거와 강제이주’ 정책은 이미 1970년 ‘광주철거민 대폭동 사건’을 경험한 바 있다.
철거가 통보되자 지역에는 긴장이 감돌았고 철거가 시작되자 주민들은 일손을 멈추고 동대문구청을 향해 몰려갔다. 대학생들의 시위는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하다 경찰과 대치선을 형성하고 공방을 벌이는 것인데, 이곳 주민들의 시위는 대열도 없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큰 도로에서 자동차들과 함께 동대문구청을 향해 걸어갔다. 경찰이 가로막으면 어떤 사람은 막아서는 경찰을 붙들고 하소연하고 어떤 사람들은 잠시 인도로 올라가 저지선을 지나쳐 다시 도로의 자동차 사이로 걸어갔다. 시위하는 사람들의 대열과 경계가 불분명하니 경찰도 도로에서 이들을 막지 못하고 겨우 차도에서 인도로 올려붙일 뿐이었지만 그것도 별 효과가 없었다. 지나가는 자동차와 시위주민들이 뒤섞여 물결처럼 흘러갔다. 동대문구청 문 앞에서 주민들은 진입이 저지된 채 웅성거렸다. 수일간 이런 일들이 계속되는 사이에 뚝방촌은 완전히 철거되었다.
수개월간의 뚝방촌과의 인연은 그렇게 끝났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뚝방촌 도시빈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특히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낮에 공장에 다니면서 밤에는 야학에 찾아와 하나라도 더 배워보려는 어린 청소년들의 모습은 그곳을 떠난 뒤에도 한동안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행당동 산동네의 천막학교와 연결하여 좀더 본격적인 야학활동을 시작하였다. 호주머니돈을 모아 앉은뱅이 책상도 만들었다. 교재는 교사들이 교회 등사기를 이용하여 직접 제작하였다. 20여 명 남짓한 학생들에게 저녁 두 시간 정도의 중학과정 일부를 가르치며 적지 않은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이들에게 중학과정을 가르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회의도 찾아왔다.
이 무렵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신 이소선 여사가 운영하는 노동교실을 알게 되었다. 을지로 6가와 청계천 사이에 있어서 경동교회와는 가까웠다.
노동교실은 청계천 주변 일대의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노동자 교육기관으로, 신입조합원에게 근로기준법 등 소정의 노동자 교육과정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는 당연히 노동자의 관점에서 이 사회를 바라보는 정치교육도 포함되었다. 이 교육을 잠깐 청강할 기회가 있었는데 장명국 선생의 경제학 강의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어려운 경제이론을 노동자의 관점에서 매우 쉽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 무렵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실시하는 노동운동지도자 합숙교육에 초청되어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이 교육과 그 후속 프로그램을 통해 이후 민주노동운동 지도자가 된 방용석, 박순희, 정인숙, 양승조, 이영순, 최순영, 박태연, 유동우 등을 알게 되었다.
노동문제와 노동운동에 대한 나의 관심은 갈수록 깊어졌고 결국 노동운동에 일생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품기에 이르렀다. 대학에서 산업선교회 선교사로 파견된 오글 목사님의 노동경제학 강의를 열심히 수강한 뒤 그를 교회 대학생부에 초청하기도 했는데, 그에게 지식인이 노동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한지 그 방안은 무엇인지를 묻기도 하였다. 내 마음 속엔 외국인으로서 한국노동자들의 권익신장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그를 이미 나의 사표로 삼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오글 목사는 유신체제와 긴급조치를 비판하였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추방당하였다. 추방 며칠 전 문성현과 나는 그를 방문하였는데, 존경하는 스승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쉬움으로 돌아오는 길에 끝내 눈시울을 적셨던 기억이 난다.
민청학련 사건과 긴급조치 4호의 발동으로 학교 내에서의 학생집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것은 대학 4학년 때였다. 사복형사들이 사전에 학교에 포진하고 있다가 집회가 시작되면 바로 연행해갔다. 전국적으로 연계된 것이었지만 학생들이 학교 현관에 모이기 시작하면 모인 학생들보다 더 많은 사복경찰들이 몰려와 학생들을 연행해갔다. 주동자는 강의실까지 뒤쫓아 가며 연행해갔다. 나는 집회에 참석하지 않은 일반학생인 것처럼 태연하게 몸을 피했지만 함께 있던 문성현은 잡혀가 한 달간 구류를 살기도 했다. 이렇듯 학교에서의 학생활동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합법공간으로서의 교회의 역할이 주목받게 되었다. 새문안교회, 향린교회, 제일교회, 경동교회 등 진보적인 교회의 대학생회들이 서로 연계하여 활동방향을 논의하게 되었다.
나는 경동교회 대학생부를 대표하여 이 논의에 참여하였다. 논의는 대학의 학생운동마저 침묵이 강요되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가 외쳐야 한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되어, 대학생회가 나서서 시국기도회를 개최하고 교회 밖으로의 시위를 시도하기로 했다. 새문안교회 대학생부가 선봉에 서기로 했고 이 논의에 참가했던 나도 경동교회 대학생부의 거리시위를 주도하게 되었다. 교회 쪽에는 대학생회가 주최하는 예배로 알리고 허락을 받아놓았다. 마지막 순간 대학부 담당 부목사님이 눈치를 채시고 끈질기게 설득하셨지만 우리의 결심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미 서울의 교회들에 소문이 퍼져 예배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모였다.
계획대로 저녁예배를 마치고 선언문을 낭독하고 십자가와 촛불을 들고 ‘우리 승리하리라’를 부르며 교회 밖으로 행진해 나갔다.
그런데 100여 미터를 행진해가다 보니 어디서 끊겼는지 대열이 따라오지 않고 교회 당직자들만이 나를 막아세웠다. 김도 빠지고 두렵기도 하여 슬그머니 교회로 돌아와 대학생부원들 몇 명과 함께 교회에서 밤을 새웠다. 당시 긴급조치에 의해 유신에 반대하는 집회의 주동자는 구속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에 이때의 집회와 시위를 주도하면서 내가 모든 책임을 지기로 마음먹고 있었고 누나에게도 구속될지도 모른다는 언질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달려온 중부경찰서 담당형사와 교회 간의 협상으로 이 사건은 없었던 일로 처리되었다. 담당형사의 입장에선 사전에 이를 몰랐던 것은 문책의 대상이며 교회 입장에선 대학생회 임원이 구속된다면 난처한 입장이 될 것이므로 쉽게 무마가 된 듯하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시위주도 사건인 셈인데, 이를 계기로 나는 교회 대학생회 내 사회참여세력의 중심인물로 부각되었다.
당시 경동교회 신도들은 서울의 중산층이 대부분으로 서구의 자유주의문화에 훨씬 친숙하였다. 강원용 목사도 신앙인으로서 사회에 대한 관심과 책임은 강조하였지만 교회 자체가 정치적 행동을 추구하는 것은 금기시하였다. 교회는 신앙공동체이지 정치적 결사체는 아님을 강조하며 어떤 외부세력이 교회를 특정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것을 극히 경계하였다. 대학생부 일부에서는 이를 비겁함 내지는 자유주의자의 나약함으로 치부하기도 했지만 사실 실제상황이 닥쳤을 때 교회측이 대학생부의 돌출행동들을 용인해준 경우가 적지 않았다. 교회가 해방신학, 실천신학의 영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은 정치적 억압과 독재가 일상화된 당시 사회 상황의 반영이었다. 집회, 시위는 물론 언론과 표현의 자유마저 극도로 봉쇄되어 교회마저 침묵하면 그 자체가 독재의 방조행위로 치부될 만한 상황 속에서 적지 않은 신부, 수녀, 목사 등 성직자들이 정치적 발언과 행동에 나섰다. 따라서 대학생부의 행동은 일정하게 교회의 위상을 높여주고 긴장과 활력을 높여주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교회가 사회참여세력을 한편으론 경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용인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유신체제와 직접적으로 맞서는 정치투쟁보다 독재체제의 가장 큰 희생양인 소외계층의 삶의 문제, 그리고 그들의 운동에 더 쏠렸다.
특히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근로환경, 노동교실을 중심으로 한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활동, 전태일 열사의 육필일기 등은 나의 가슴을 완전히 점령하고 있었다.
평화시장은 청계천 5가와 7가 사이 동대문 일대의 의류시장을 통틀어 일컫는다. 이곳은 아동복, 숙녀복, 신사복, 와이셔츠, 운동복 등 각종 의류가 제조되고 거래되는 대한민국 제일의 의류도소매시장이며 제조센터다. 상가 3, 4층과 창신동 등 동대문 일대에 밀집되어 있는 수백 개 영세봉제공장에는 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기술을 배우기 위해 시다가 된 어린 여공들은 일요일 휴식도 없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다리미질 등으로 미싱사의 일을 도우며 미싱 기술을 배운다. 도급제로 일을 하는 갯공이라 불리는 미싱사 밑에는 한 명의 미싱 보조와 한 명의 시다가 딸려 있다. 숙련공인 미싱사는 각양각색의 의류를 빠른 속도로 박아내야만 한다. 일솜씨가 좋고 빠를수록 일감도 많고 소득도 늘어나는 먹이사슬구조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숙련공이라 해도 편할 수가 없다.
남자들이 맡고 있는 재단, 또또, 시야게 일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잠자리는 공장 안이나 창신동 일대의 좁은 자취방이다. 대부분의 공장들이 공장 안에 다락방을 만들어 창고나 잠자리로 사용하다 보니 공장 안은 환기도 더 안 되고 눈을 자극하는 매케한 화학섬유 냄새가 늘 가득 차 있다. 공장 사장들도 미싱사나 재단사 출신의 영세업자로 근로환경의 개선보다는 일감 확보가 우선이었다. 한 마디로 평화시장은 열악한 근로환경의 구조적 취약지대였고 결국 이곳에서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계기로 노동운동의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단순했다. 한 달에 두 번만이라도 쉴 수 있게 하고, 공장 내의 다락방을 철거하고, 갯공제 대신 월급제를 실시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본적이고 단순한 희망도 실현되기 쉽지 않았다. 시장의 치열한 경쟁논리가 관철되는 구조하에서는 영세업주들의 인간적 양심에 대한 호소도 행정당국의 관료적 단속도 무용지물이었다. 단결된 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만이 조금씩이나마 근로조건을 개선해나갈 수 있었다.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힘이 업주들을 압도하면서 근로조건의 개선이 하나씩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쉽지도 않았고 우여곡절도 많았다. 업주들 및 당국의 방해와 탄압뿐 아니라 노동조합 내부의 문제마저도 장애요소로 작용하였다. 노동조합 간부들이 나태를 넘어 부패에 이르게 되면 오히려 내부의 적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를 바로잡기 위한 과정은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띄었다.
어쨌든 나의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을 갈수록 심화되어 노동현장으로 투신할 방법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현장으로 가자’, 이것이 당시 정치사회현실에 분노하면서 소외된 노동자, 농민, 빈민들의 삶 속에 다가가려는 젊은이들, 어찌보면 낭만적인 휴머니스트들의 지극히 순수한 슬로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