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 4. 구로동맹파업과 첫번째 구속
1984년 상반기에 결성된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 등 신생 노동조합의 주요간부들은 여러 경로들을 통해 일정하게 의식화된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은 노동조합 결성이후 1970년대의 민주노조운동이 개별기업노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점에 대한 반성을 기초로 하여 노동조합 간의 연대를 중시하였다. 따라서 노조결성 이후 이 신생노조들은 적극적으로 노조 간 연대활동을 추진하였다. 상호방문, 공동교육, 공동행사 등 다양한 방식의 활동들은 조합원들로 하여금 개별공장을 뛰어넘는 민주노조 간 상호연대감을 형성하게 하였다. 아울러 이러한 활동들은 개별공장의 노조활동보다 더 풍부한 내용으로 노동자들의 시야를 넓혀주었다.
한편 공단과 그 주변지역의 공장에는 이미 수많은 대학생 출신 노동자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들과 연계된 다양한 소그룹 활동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985년 봄 임금인상투쟁을 통해 공단지역의 노동운동역량을 한 단계 끌어올리자는 목표가 지역 활동가들 간에 공감대를 형성해나갔고 이에 따라 신생노조를 중심으로 1985년 임금인상투쟁 준비가 공동으로 준비되었다.
신생노조의 공동투쟁은 먼저 임금인상투쟁시기를 통일시켰다. 또한 해고된 이후 블랙리스트에 걸려 취업하지 못하고 있는 공단 내 노동자들은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를 조직하여 상호 복직투쟁을 지원, 격려하는 한편 지역 소식지를 통해 지역 내 노동자들의 투쟁소식을 전파하였다. 노동조합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는 사업장에서는 노동조합민주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임금인상투쟁과 노조민주화투쟁을 결합해나갔다. 군사독재 치하에서 억눌려왔던 노동운동이 바닥으로부터 꿈틀대며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신생노조들은 임금인상교섭과 더불어 노동자들의 행동을 조직했다. 본격적인 파업을 제외한 다양한 방식을 채택하였다. 부분적인 잔업거부 투쟁은 납기를 맞춰야 하는 회사에겐 위협적이었다. 구사대도 임금인상의 실리 때문에 은근히 노동조합을 지지하였다. 풍물패를 앞세운 점심시간과 퇴근시간의 조합원 총회는 노동자들의 놀이마당이 되었다. 대우어패럴과 효성물산은 구로공단의 교통요지인 가리봉 5거리의 큰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었다. 퇴근시간과 점심시간에 큰길 양쪽에서 두 노조의 조합원들이 불러제끼는 투쟁가와 풍물소리는 공단노동자들의 훌륭한 구경거리와 교육 소재가 되었다. 이전엔 감히 상상도 못하던 모습들을 바로 눈앞에서 보며 노동자들은 세상이 달라지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신생노조들의 임금인상투쟁은 노동조합의 승리로 쉽게 마무리되었다.
회사 측에선 분쟁이 장기화되는 것을 피하는 게 우선이었고 사실 일정 정도 임금인상의 필요성도 느끼고 있었다. 반면 노조민주화나 해고자복직투쟁은 구체적 성과가 미미하였다. 노조설립신고가 번번히 반려되어 신규노조의 결성도 여의치 않았고 오히려 해고자만 양산되었다.
임금인상투쟁이 마무리된 지 두 달이 지난 6월말, 경찰은 돌연 대우어패럴노동조합의 김준용 위원장과 강명자 사무장을 노동쟁의조정법 위반으로 구속시켰다. 신생노조들은 대우어패럴노조의 간부구속을 신생민주노조에 대한 탄압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였다.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에서는 각각 대의원대회를 개최하여 동맹파업을 결의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부흥사 등에서도 동맹파업이 이루어졌으며 청계피복노동조합원들과 구로지역의 해고노동자들이 구로공단에서 동맹파업을 지지하는 유인물을 배포하며 기습시위를 벌였다. 대학생들도 동맹파업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이며 음식물을 들고 공장 담을 넘기도 했다. 매일 저녁 퇴근시간이 되면 대우어패럴과 효성물산 인근 및 공단 오거리에는 동맹파업을 지지하는 노동자, 학생, 시민들과 이들이 시위세력으로 전화되는 것을 차단하려는 정복 사복 경찰들로 인해 인도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해고자 노정래는 2공단 굴뚝에 올라가 구호를 외치며 고공시위를 주도하였다. 창원의 통일중공업 등 민주노조에서도 정부의 노동자탄압을 규탄하며 구로동맹파업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노동자들의 투쟁은 근로조건 개선투쟁에서 독재정권의 노조탄압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이후엔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정치투쟁으로 발전해갔다.
공장의 건물출입문을 걸어 잠그고 시작된 파업농성은 일주일 만에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되었다. 경찰에 연행된 노동자들 중 일부가 구속되었고 구속되지 않은 노동자들도 구사대들에 의해 공장출근이 저지된 상태에서 전원 해고되었다. 농성이 강제해산되자 구사대가 몽둥이를 들고 공장을 돌아다니며 농성에 참여하지 못한 열성조합원들을 끌어내어 집단폭행을 가했다. 나도 구사대들에 의해 근무중인 보일러실에서 운동장으로 끌려나와 집단폭행을 당하고 다시 1공장으로 끌려가 6시간 동안 감금을 당했다.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은 동대문에 있는 전태일기념관으로 집결하여 농성을 계속하면서 향후대책을 논의하였다. 김문수 선배와 심상정도 농성에 참여하여 함께 논의하였다. 이때 김문수 선배와 심상정이 처음 만나게 되었고 그들은 첫 만남에서 완전히 의기투합하였다.
기념관에서의 논의는 구로동맹파업의 투쟁정신을 계승하면서 이후 노동운동을 이끌어갈 노동운동조직을 만드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구로동맹파업에 참여한 노동조합과 청계피복노동조합의 조합원을 중심으로 기타 사업장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을 포함시켜 새로운 노동운동조직을 결성하기로 한 것이다.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이라는 이름으로 결성된 이 조직은 이후 노동자 반독재투쟁의 선봉에서 활동하면서 노동조합형태가 아닌 노동자대중의 정치투쟁조직으로 발전해갔다.
새로운 노동운동조직 결성에 대한 기본 논의가 마무리되면서 구로연대투쟁에 참여한 사업장 노동자 20여 명이 다시 구로공단 5거리에서 비폭력연좌시위로써 기념관 농성투쟁을 정리하기로 하였다. 구로연대투쟁을 통해 공개적으로 활동해온 수많은 노동조합 간부들이 대부분 구속된 데 반해 비공개적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지원하고 지도해온 대학생 출신 노동자들은 구속되지 않았으므로 이 시위를 통해 대학생 출신 노동자들이 구속을 두려워하지 않고 현장노동자들과 함께한다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의미도 포함되었다.
이 시위는 나와 가리봉전자의 서혜경 부위원장이 중심이 되어 진행하였다. 퇴근시간에 맞춰 진행된 연좌시위는 그때까지 기습시위에 대비하여 공단 일대를 경계하던 경찰에 의해 전원 연행되었고 나와 서혜경 부위원장, 윤혜련 사무장이 구속되었다.
조사는 극히 간단하게 진행되었다. 긴장되었던 시간이 지나고 구치소로 이감되자마자 끊임없이 잠이 밀려와 틈만 나면 잤다. 영등포구치소의 독방은 연대투쟁으로 구속된 노동자들과 대학생들로 빈 자리가 없었다. 일부 구속노동자들은 독방 차지도 못하고 혼거방에 배정되기도 했다.
수감 8개월 만에 2심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의 선고를 받고 석방되었다. 교도소를 국립대학교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나도 구속기간 중 많은 독서를 하였다. 사회과학 서적들은 물론 장길산, 태백산맥, 토지 등 대하소설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다. 건강관리를 위해 독방 안에서 팔굽혀펴기, 쪼그려 앉았다 일어나기, 요가수련도 열심히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