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熱情時代

Ⅲ - 4. 초기 중국사업의 성공요인

張萬玉 2012. 1. 10. 11:00

1998년 임대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한 이후 2001년 신공장 준공까지 중국사업은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시장개척에 실패한 제품도 있었지만 시장개척에 성공한 주력 제품들은 이 기간 중에 중국시장 점유율 1위로 도약하였다. 수익도 괜찮아서 본사 수익구조 개선에도 적지 않은 힘이 되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사업의 고속성장에 흠뻑 취해 사업가들이 이런 재미 때문에 사업을 한다고 생각했다. 임대공장 초기 극도의 내핍으로 사무실에 에어컨도 안 사고 버티던 시절에, 매출액 연 20억만 넘으면 사소한 비용통제 문제로 그렇게 신경 안 써도 될 것이라고 용기를 주던 회장님 말씀이 떠올라 감개무량하기도 했다.

2003년에는 한국 전자부품업체들의 진출이 크게 늘어난 칭다오에, 2004년에는 규모가 큰 광동지역 시장을 겨냥하여 동관에 각각 법인을 설립하여 대주전자재료의 중국법인은 세 개로 늘어났다. 상해대주도 생산 개시 5년 만에 연 매출 100억을 돌파하였다. 직원 70여 명의 중소기업이지만 시장에서 기술력을 인정받았다는 자부심에 뿌듯했다.

 

귀한 여름휴가를 쪼개어 상하이까지 날아와준 김문수 선배(당시 국회의원)와 함께 신공장 앞에서

 

초기 중국사업이 성공을 이룬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사업의 객관적 환경이 성공기회를 제공하였다.

중국의 전자부품산업을 포함한 전자산업은 개혁개방이 가속화되면서 1980년대 초반부터 대량생산 시스템을 갖추고 선진자본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세계의 공장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말까지 전자부품의 대부분 원자재는 일본, 타이완, 한국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액상에폭시계열에서만 타이완의 한 개 업체가 중국에 진출한 상태였다. 전자부품업체의 생산이 안정되고 매출이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원자재의 내재화 요구가 높아지고 있었으나 중국 현지업체들의 기술수준은 이들 선진기업의 기술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점에 대주전자재료가 현지 생산 현지 기술서비스의 출사표를 던지며 시장개척에 돌입하였던 것이다. 1998년 주롱지 총리의 강력한 경제개혁조치의 일환으로 추진된 수입 원자재의 편법적인 관세 및 증치세 탈세에 대한 강력한 단속도 수입 원자재의 내재화를 촉진시켰다.

 

물론 이러한 기본적인 사업환경은 누구에게나 열려진 공평한 기회였다. 관건은 이러한 기회를 자신의 사업전략에 어떻게 접목시켰는가라고 생각한다.

임무현 회장은 한중국교가 수립되기 전인 1988년부터 중국대륙의 전자부품업체와 연구소를 방문하며 중국사업을 꿈꾸어 왔다. 당시로는 매출규모도 빈약한 기업이었지만 한국에서 이룩한 기술개발의 실력을 토대로 거대한 중국시장에서 일본과 겨뤄보겠다는 생각을 키워왔던 것이다. 10여 년 동안 임무현 회장과 박중희 부회장이 번갈아서 1년에 5~6차례씩 출장을 다니며 중국과 타이완의 시장을 공략해왔다. 타이완에서는 일정한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으나 1990년대 중반부터 타이완의 전자부품업체들이 급속히 생산거점을 중국으로 이전하기 시작하자 임무현 회장은 중국에서의 시장 선점전략의 결단을 내리고 중국투자를 결행하였다. 또한 1997년 금융위기의 어려움 속에서 임대공장 생산으로 경로를 수정하는 결단을 내렸다. 10년 앞을 내다보고 뜻을 세우고 10여 년간 치밀하고 꾸준하게 준비해간 사업가의 비전과 결단이 열려진 사업기회를 움켜쥐게 한 핵심적 요인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라믹콘덴서와 바리스타용 도전재료의 중국시장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던 일본의 신일본화금(주)은 일찍부터 중국 현지생산을 검토하였으나 망설이다 대주에게 시장의 대부분을 빼앗긴 후 뒤늦게 합작형태의 현지 생산공장을 설립하였다. 또한 중국의 분체도료시장을 선점하고 있던 일본회사들도 현지생산을 검토하였으나 때를 놓치고 포기하였다. 사업성공의 핵심은 사업가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과 적절한 시기의 결단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런 측면에서 오너경영이 사업가의 도전정신에 가장 부합되는 시스템이라 할 것이다.

 

두 번째 요소는 사업의 성공을 뒷받침할 물질적 자원의 조달능력이다.

중소기업이라 자금조달 면에선 항상 부족하였지만 어쨌든 본사가 뒤에서 버티고 있어 든든하였다.

더 중요한 것은 본사 기술력의 뒷받침이었다. 사업 초기에 시장개척에 집중했던 품목 중에는 기술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여 시장진입에 실패한 품목도 있었다. 그러나 성공한 품목들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비교적 단기간에 고객의 기술적 요구를 만족시켰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에서 다양한 시행착오를 경험하며 축적한 기술력이 단기간에 시장점유율 1위를 달성하게 한 핵심요인이 되었다.

 

세 번째 요소는 인적자원이다.

중소기업은 우수한 인적자원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따라서 중소기업 수준에서 나름대로 적합한 인적 자원을 찾아내고 육성하는 것이 사업 성공의 중요한 요소이다. 중소기업은 규모가 작기 때문에 직원 대부분의 장단점을 잘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중국사업의 진행과정에서 사람과 관련한 쓰라린 기억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서 파견온 기술자를 비롯한 중국 직원들이 회사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해준 결과 단기간에 사업을 안착시킬 수 있었다. 그중 청웨이닝의 공로는 그 누구의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청웨이닝은 160센티도 안 되는 자그마한 키에 인물도 별로 볼 것 없는 차오저우 출신의 상하이인이다. 린퍄오의 반란미수 사건으로 군부대의 전면 재배치가 이루어지면서 군속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상하이로 이사온 그는 대학생이 될 때까지 상하이 말을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천안문 사건 때 대학생이었던 그는 매일 상하이 인민광장에서 개최되는 시위행렬에 열심히 참가했다니 천안문 세대인 셈이지만 정치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개혁개방을 지지하지만 공산당 간부들의 부패행위에 대하여 비판적이다.

 

나의 암 선고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했던 청웨이닝. 중국생활을 정리하러 상하이로 돌아갔을 때 함께 찍은 사진이다. 

 

중학교 물리교사였던 그는 1990년대 초반부터 대주의 일을 도와왔고 상하이 대주의 공장입지와 설립에 관여하다가 교사직을 그만두고 상해대주에 창립멤버가 되었다. 1996년부터 나와 함께 전국의 전자부품업체를 방문하면서 영업의 최전선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98년 하반기부터는 동관에 작은 숙소 겸 사무실을 개설하고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광둥지역의 시장을 개척하였다.

그의 진실되고 성실한 됨됨이는 고객들의 신뢰를 얻는데 큰 몫을 하였다. 행정적 애로사항이 생길 때마다 그가 나서서 공업구 등 관계기관의 도움을 받아 처리하였다. 중국인 직원에 대한 징계 등 골치아픈 인사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그가 중간에서 합리적으로 처리하였다. 그는 업체에 나가면 기술과 구매에서 실질적인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파악하고 그들과의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구축할 줄 아는 천부적인 영업맨이었다. 외모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협상과 절충의 천부적 장사꾼 기질이 모든 업무 처리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출장중에 나는 가급적 그와 같은 방을 사용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광동지역으로 출장을 가게 되면 나는 반드시 그의 허름한 광동사무소에서 숙박하면서 지역적으로 떨어져 있는 만큼의 공백들을 함께 채워가기 위해 노력했다. 회사의 중요한 의사결정과 관련하여 그의 의견을 듣고 함께 토론하면서 비전과 경영방침을 공유하였다. 수년간 동고동락해온 과정을 통해 우리의 관계는 상하관계를 넘어서는 끈끈한 동지적 애정으로 묶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중국사업 초기부터 이러한 인재를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중국사업의 책임자로서 누렸던 또 하나의 행운은 훌륭한 멘토였다.

임무현 회장님은 중국사업 초기에 정기적으로 중국출장을 오셔서 직접 영업활동 최전선에서 영업을 지원하셨다.

일주일에서 열흘 가량 주요 고객들을 방문하여 고객의 소리를 청취해보면 영업, 기술, 생산, 품질관리 등 각 방면에서 우리 내부 활동의 장점과 취약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평소의 일상적인 보고나 회의에서 잘 드러나지 않던 것도 뚜렷하게 부각된다. 경영책임자는 고객별 대응방안과 함께 이렇게 제기된 내부 조직활동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과 지원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임무현 회장을 수행하여 출장을 다니면서 그의 이러한 문제점 진단과 대안수립에 대한 노하우를 체득하게 되었다. 더구나 출장길에 수행하게 되면 비행기와 택시 등으로 이동하는 사이에 둘만의 대화시간이 많아진다. 사업 초기에 크고 작은 고민거리들이 많았다. 나는 이 시간을 이용하여 미리 질문을 준비하여 그의 경험과 의견을 경청하였다. 대개 화급하게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이므로 그의 의견은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또한 기업경영에 대한 그의 통찰력과 지혜를 습득할 수 있었다. 지금은 대주를 떠나 독립하여 사업을 하고 있는 홍승표 사장과 윤세원 사장도 임무현 회장님을 수행하며 출장을 다니면서 사업가로서의 철학과 행동양식을 배우게 되었다며 회장님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곤 하였다. 일선에서 물러난 지금도 회장님은 상당 시간을 정기적으로 미국, 대만 등의 주요 고객들을 방문하면서 업계의 최근 동향과 이슈들을 파악하는 데 투자하고 계시다.

 

또 한 분의 귀중한 멘토가 있었다.

박중희 선배는 임무현 회장과 함께 국내 및 해외영업을 지휘하셨다. 합리적이신 성품으로 사물을 총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인식하면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중점을 두어야 할 것들을 냉철하게 구분해내셨다. 업무 추진은 특유의 뚝심으로 밀고나갔다. 중점 목표로 설정된 고객들은 그의 뚝심에 감동하여 설득되곤 하였다.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꼭 부회장님을 찾아가 마주앉아 술 한 잔을 기울이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부담없이 털어놓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대화과정에서 생각도 정리되고 방향도 잡히곤 하였다. 또한 중요한 의사결정을 앞두고는 그분의 의견을 구했다. 형님처럼 푸근하게 이끌어주시던 박선배가 요즘 유난히 그립다.

 

 

내가 중국사업 성공을 위해 세운 원칙은 다음의 세 가지였다.

첫째는 고객 중심의 원칙.

이를 위해서는 고객중심의 사고를 직원들 업무태도의 바탕에 확고히 정착시켜야 하는데, 구체적으로 영업담당자는 물론 경영책임자와 기술자까지도 고객과의 접촉 빈도를 높이면서 고객의 불만과 애로사항을 청취하도록 해야 한다. 나 스스로도 정기적으로 주요 고객을 방문하면서 고객의 관점에서 우리의 조직을 점검하였다. 제품도 고객의 공정조건에 적합하게 미세한 조정을 가하도록 하였다. 날씨가 무덥고 습한 남쪽 지역과 춥고 건조한 북쪽 지역은 필연적으로 공정조건에서 차이가 난다. 아무리 완벽하게 설계된 제품의 공정이라고 해도 고객의 공정조건이 달라지면 생산라인에서 트러블이 발생할 수 있다. 비록 미세한 문제일지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즉각 성의를 다해 대응한 것이 중국사업을 성공으로 이끈 가장 큰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둘째는 현장 중심의 원칙.

문제가 발생하면 그 현상과 원인분석, 대책마련 등 제반 활동을 수행함에 있어서 고객의 현장이든 우리의 생산현장이든 구체적 현장을 확인하도록 요구하였다. 중요한 문제는 대개 직접 현장을 확인하면 해결방안이 찾아지곤 했다.

셋째는 기술 중심의 원칙.

재료사업은 원료의 선택과 배합비율, 제조공정조건에 의해 특성이 좌우된다. 이에 대한 이론적 배경과 다년간의 경험이 기술력의 원천이 되는데, 끊임없이 더 좋은 특성과 원가 낮은 제품을 개발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뒤지게 된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수한 기술자를 양성하고 훈련시켜야 한다. 나는 중국사업 초기부터 현지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해 상해 유수대학의 대졸자들을 채용하였다.

본사의 사업원칙이기도 한 고객중심, 현장중심, 기술중심의 원칙은 이렇게 중국사업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내가 중국사업에서 역점을 두었던 것은 철저한 현지화 정책이었다.

첫째, 시장을 개척할 때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은 본사의 고객이기 때문에 영업 대상에서 제외했다. 우리의 주요 타겟은 중국에 진출한 대만계 기업과 선진기술 및 자본을 도입한 중국계 기업이었다.

둘째, 중국에서 구입할 수 있는 원자재, 생산설비, 실험설비 등은 적극적으로 내재화하였다. 그래도 한국과의 기술격차 때문에 내재화가 어려운 품목들이 많아 핵심적인 것은 지금도 한국이나 일본에 의존하고 있기는 하다.

셋째, 기술, 영업, 관리부문 등 전 영역에 걸쳐 간부들을 육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한국식 경영방식과 본사 기술에 대한 원천적 의존 외에는 최대한 현지화 경영을 통해 사업을 확대해갔다. 이 점은 중국에 진출한 한국의 전자부품업체 대부분이 중국을 단순한 생산기지로 활용하고 중국시장의 공략에는 소극적이었던 것과 대조적이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중국시장에서 생존해가겠다는 사업목표를 분명히 하였으며 이러한 비전에 따라 일관되게 현지화 방침을 추진하였다.

 

 

나는 사람 운이 좋은 사람이다. 노동운동의 과정에서도 좋은 동지들을 만나 1987년 이후 새로운 노동자대중운동의 한복판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기업의 전문경영인으로 변신한 이후에도 곳곳에서 사람들과의 좋은 인연으로 어려운 중국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 때문에 상처를 받은 적도 있지만 좋은 인연으로 함께해온 사람들의 신뢰와 지지가 더 컸기 때문에 어려움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열정을 불사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