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熱情時代

Ⅲ - 5. 지속성장을 위한 고민들

張萬玉 2012. 1. 10. 11:15

2001년 신공장의 준공으로 나름대로 외자기업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신규설비에 대한 투자로 생산능력도 대폭 확대되었다.

그러나 사업초기의 급속한 성장은 둔화되어 연평균 30%대 매출성장 시대로 접어들었다.

연평균 30%의 매출성장은 일반적으로 보면 괜찮은 실적이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기존 시장의 자연확대에 의존한 것으로 새로운 성장동력이 뒷받침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기존 시장의 자연확대가 지속되는 조건하에 있었으므로 일정 기간 기업의 안정적 유지에는 문제가 없으나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성장동력의 발굴이 절실했다. 더구나 본사의 원자재가격 인상과 겹쳐 영업이익율도 5% 이하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2001년 8월에는 경기변동으로 매출이 급격히 하락하면서 드디어 첫 적자를 기록하였다.

신공장으로의 이전을 계기로 씀씀이가 커져 비용도 대폭 증가한 반면 매출이 급격히 저하되면서 적자는 연속 2개월을 기록했다. 사업 성공의 자만심에 도취되어 있던 분위기를 즉각 바로잡고 대대적인 비용절감에 돌입하였다.

10월 이후 매출이 회복되면서 적자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지만 자만심에 도취되어 있던 우리에겐 중대한 경고로 다가왔다. 자연적인 시장확대에 안주하는 성장은 경기변동에 따라 위기를 맞을 가능성도 높아진다. 새로운 성장동력의 발굴 없이는 지속성장의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

칩 부품, 저온 페이스트 등의 시장이 크게 형성되고 있었으나 우리의 기술력이 일본, 미국의 경쟁사에 미치지 못했고, 핸드폰 전자파 차폐용 페이스트가 우리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부각되려는 시점에서 새로운 전자파 차폐방식이 도입되어 시장 자체가 소멸되어버렸다.

 

어떻게든 획기적인 성장동력을 발굴하고 싶은 욕심으로 밤잠을 설치며 고민하고 있을 때 홍승표 사장이 새로운 사업거리를 제안하였다. 반도체용 접착제를 독점해온 에이블 스틱의 핵심개발자였던 재미교포 C씨를 영입하여 중국에서 반도체용 접착제 사업을 추진해보자는 획기적인 제안이었다.

반도체용 접착제는 상해 인근의 현대전자를 비롯한 30여개의 반도체 조립공장에서 사용 중이고 부가가치가 매우 높은 품목이다. 우리 회사도 10여 년간 반도체용 접착제 기술을 개발해오고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재미교포인 C씨는 에이블 스틱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반도체용 접착제를 개발한 사람으로, 퇴직 후엔 한국기업과 합작하여 새로운 제품개발에 참여하였으나 합작 파트너와의 불화로 일부 기술만 넘겨준 채 헤어졌다. 이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았다고 한다. 홍승표 사장은 당시 합작했던 회사의 영업담당으로 그때 C씨와 만나 그 후로도 좋은 인연을 지속하고 있었다.

 

홍사장의 제안에 따라 C씨 부부를 중국에 초대하여 인간적인 신뢰를 쌓아가면서 협력방안에 대해 토의하였다. 필요한 시설투자비용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문제는 그분이 가진 기술력에 대한 평가와 이에 따른 처우문제였다. 생활 근거지를 미국에서 한국도 아닌 중국으로 옮겨야 하는 상황이라 그분의 결정도 쉽지 않았다.

그분의 요구를 본사에 보고하였다. 본사의 회답은 그분이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분의 기술력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는 연구소 측의 의견이 일정하게 작용한 듯하다. 중요한 사업기회가 흘러가는 데 대한 아쉬움이 컸지만 대안이 없었다. 홍사장이 특히 아쉬워했다. 내가 오너였다면 주저하지 않고 과감히 추진했을 것이다. 설령 그 사업이 실패한다 하더라도 기업을 뿌리째 흔들어놓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업가로서의 도전정신의 원천은 오너쉽에서 나온다. 전문 경영인은 오너쉽을 보좌하여 그 기업가정신을 구현하는 것이다. 중국사업을 도전적으로 결정한 것도 새로운 형식의 반도체 접착제사업에 소극적인 것도 모두 임회장의 경영철학과 기업가정신에서 기인한 것이다. 임회장은 외부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사업을 추진하는 방식에 대해 부정적이다. 기술에 대한 주도권이 없이 사업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다. 어쩌면 초기 중국사업의 성공에 도취되어 자만에 빠져서 큰 것 한방을 노리는 나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지켜보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니 부끄러울 뿐이다.

이후에도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기 위해 새로운 사업으로 핸드폰 관련 제품도 시도하였으나 초기 시장의 구체적 상황을 확인한 후 포기하였다. 기업가들 대부분이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으려 하지만 자신들의 능력에 적합한 성장동력을 찾아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2001년 신공장 준공 이후 기업의 혁신을 위해 중점적으로 추진한 일 중 하나는 기술개발 직원을 대상으로 한 식스시그마 교육이었다.

식스시그마는 미국의 나사에서 우주선 발사의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기 위해 통계적 기법을 적용한 프로그램으로서, 모토로라와 GE에서 기업에 적용하여 좋은 성과를 이룩한 선진적인 기법이다. 삼성전기, 삼성SDI 등 삼성그룹에서도 이 기법을 채용하여 협력회사에까지 의무화하였다.

2001년 임일지 부장의 주도하에 본사에서 먼저 시작하였고 바로 중국으로 확대하였다. 대부분의 기업에서는 제조 부분의 결함개선과 생산성을 높이는 데 식스시그마 기법을 적용했지만 대주에서는 제품개발 과정에 우선 적용하여 기술개발의 속도를 높이고자 했다.

중국기술자를 대상으로 한 통계 교육과 식스시그마 지도는 내가 직접 참여하고 주관하였다. 한편으론 배우고 한편으론 중국 기술자들을 지도하면서 적지 않은 열정을 기울였다. 기술이 발전의 원동력인 우리에겐 가장 적합하고 선진적인 방법론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식스시그마는 회사의 가장 중요한 자산인 인적자원을 강화시키는 중요한 방안이기도 했다.

과제 수행과정을 통해 기술인력의 문제분석능력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서 인사평가도 훨씬 용이해졌다. 실제로 크고 작은 과제들을 식스시그마의 방법론으로 해결하였다. 어떤 과제는 현재 고려하고 있는 요인만 가지고는 과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통계적 분석결과를 도출하여 새로운 인자를 찾기 위한 이론적 재검토와 정보검색을 요구하기도 했다. 어떤 과제들에 대해서는 현재 우리의 기술수준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와 그 수행을 중단시키기도 하였다. 고객들의 품질불만에 대한 원인분석과 개선결과도 식스시그마의 통계분석 기법을 활용하여 일목요연하게 설명함으로써 신뢰를 얻으면서 선진기업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나는 식스시그마 신봉자가 되었다. 특히 생산과 기술개발 부문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과학적 방법론이라고 믿게 되었다. 기술부문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이 방법론을 이해하면 기술부문의 진행과정의 전모를 꿰뚫어 볼 수 있다. 물론 원천적인 기술수준의 한계를 극복해주지도 못하고 형식적으로 흐를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지만.

 

 

시장에서의 경쟁이 격화됨에 따라 경쟁력 강화에 직원들을 주체적으로 참여시키기 위해 개선제안제도를 보다 실질적으로 운영되도록 개편하였다.

기존의 개선제안제도는 건수 위주의 형식적인 제안에 흐를 위험성이 높았다. 뿐만 아니라 개선효과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개편된 개선제안제도는 구체적인 결과가 확인된 경우에 심사를 해서 개선효과와 창의성 및 노력도를 종합평가하여 매분기별로 포상하였다. 이미 실행이 이루어졌으나 아직 효과가 확인되지 않은 개선활동은 다음 분기에 다시 심사하여 포상등급을 결정하였다. 또한 제안자 뿐 아니라 그 개선이 성공되도록 협력한 관련자도 그 공헌도에 따라 함께 포상하였다. 한 사람이 두세 가지의 개선을 이루었다면 각각 따로 심사하여 포상하였다. 영업사원이 신규시장을 개척한 경우나 기술자가 제품의 품질특성을 개선하여 시장을 확대한 경우, 생산 현장에서 작업방법을 개선한 경우, 사무직원이 업무의 프로세스를 개선한 경우 등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모든 성과에 대해 포상하였다.

포상제도는 성과 인센티브제와 개선제안제도를 결합시켜 운영했는데, 포상의 등급은 두 명의 부총경리를 포함한 3인의 포상심의회의에서 결정하였다. 중소기업이라 신청된 성과의 내용확인이 쉬웠기 때문에 한 두 시간이면 심의가 완료되고 포상금액까지 확정되었다. 통상 분기별로 직원의 20~30%가 포상을 받았다. 의미있는 성과를 두세 개 이룩한 경우에는 자신의 한 달 급여를 초과하는 포상을 받기도 하였다. 지속적으로 성과를 내는 직원과 그렇지 못한 직원이 명확히 드러났으며 포상실적은 승진과 승급의 객관적인 인사평가 자료로 활용되었다.

이 제도는 나름대로 직원들이 자신들의 업무를 주동적으로 추진하도록 하여 가시적인 경제적 성과도 이루어냈다. 나를 비롯한 간부들은 직원들이 개선활동의 성과를 내도록 독려하고 지원하였다. 때로는 아이디어도 제공하였다. 기업경영에서도 상과 벌은 즉각적이고 엄정해야한다. 그러나 벌보다는 포상을 통해 직원들의 적극적인 업무태도를 끌어내는 것이 좋다. 조직을 일정하게 긴장시키기 위해선 연말에 실시하는 나눠먹기식 포상보다는 분기별 성과포상제가 더 효과적인 듯하다.

 

 

2005년엔 생산을 포함한 관리부분의 혁신을 위해 ISO시스템의 개조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동안 우리의 ISO시스템은 매년 실시되는 검증기관의 심사와 고객의 심사에 부합하기 위한 최소한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를 생산 및 관리부문의 관리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시스템으로 개조하고자 하였다.

전문기관에 용역을 주어 1차로 ISO규정의 개정작업부터 시작하였다. 규정과 지침서를 확인하면 해당업무의 흐름과 관리포인트를 분명하게 불 수 있는 형식으로 개조하였다. 시각적으로도 누구나 곁에 두고 자기업무의 매뉴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진일보한 구성이었다. 매뉴얼이 1차 완성되면 현장적용과정을 통해 미비점도 보완하고 직원들의 관리능력도 향상시킬 계획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규정의 1차 개정작업이 완료되기 전에 본사 대표이사로의 인사발령이 이루어졌다. 이후 이 작업은 중단되었다.

 

 

경영혁신을 위한 CEO의 역할은, 방침을 결정하고 그 방침을 가장 잘 이해하고 힘있게 추진할 수 있는 인재를 선발하여 임무를 부여하고 필요한 지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적 자원이 취약한 중소기업에선 CEO가 직접 혁신을 주도하기도 한다.

후자의 방법으로서 선택했던 식스시그마, 성과포상제, ISO시스템 개조를 통한 혁신활동은 회사 내에 그 추진주체를 육성하지 못한 한계에 직면하였다. 그나마 식스시그마 경영혁신은 본사의 경영방침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명맥은 유지했으나 실제적인 성과를 이루어내지 못하면서 퇴보하였다. 내부의 추진주체를 제대로 세워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혁신이 중요하면 중요한 만큼 적합한 인재를 찾아 추진주체의 위치에 배치했어야 했다.

 

 

2005년 10월경 중요한 상의가 있으니 본사로 들어오라는 회장님의 받고 즉시 귀국하였다. 공항까지 임회장님이 직접 마중 나오셨다. 말씀의 핵심은 나와 박중희 부회장의 임무를 서로 바꿔보자는 제안이었다. 변화를 추구해보려는 의지가 강력함을 느낄 수 있었다. 본사 사장으로서의 경영능력을 확인해보고 싶은 욕심도 없지 않았기에 회장님의 제안을 수용하였고 박부회장님도 제안을 받아들이셨다.

 

 

중국으로 귀임한 이후 인수인계를 위한 작업을 시작하였다.

먼저 회사의 자산과 부채상태를 정리하였다.

그중 업체별 미수금상태를 확인하는 작업은 상당한 시간이 소모되었다. 고객의 회계기록, 우리 회사의 회계기록과 영업부문의 기록 등 3자를 대조하여 불일치되는 부분을 확인하고 그 원인을 찾아 조정하는 작업이다. 매년 연말에 회계가 중심이 되어 진행해온 작업이라 현재도 정상적으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 고객들은 크게 문제가 없으나 거래가 중단된 장기 미수금은 이번 기회에 대손처리 등의 방법으로 정리해야 했다. 고객과의 배상문제도 정리하여 재임 중에 발생한 짐이 후임자에 전가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다음으로 회사의 중요업무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였다. 중국과 한국의 업무처리 방식이 다른 것들은 특히 상세히 정리하여 필요할 때 참고가 되도록 하였다. 일부 업무내용은 매뉴얼로 정리하여 정해권 부장에게 인계하고 직접 실행해보도록 하였다.

중요간부에 대한 나름대로의 장단점 평가도 첨부하였다. 박중희 선배가 중국사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실 것이란 기대를 안고 10년간의 나의 중국사업의 경험을 인수인계서와 보충문서로 정리했고 사본은 정해권 부장에게도 전달하였다. 중요고객은 함께 방문하면서 현안에 대해 설명을 드렸다.

 

2006년 3월, 10년간의 중국생활을 정리하고 본사에 대표이사 사장으로 부임하였다. 본사에서의 중책에 대한 부담감으로 10년간의 감회에 젖을 겨를도 없었다.

 

상해대주를 떠난 뒤 4년 만에 복귀하기까지의 기록은 <Ⅳ. 그후>로 이어집니다.

내용상의 연속성을 이어가기 위해 시간적인 배열을 바꾸었습니다. -- 엮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