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 1. 치밀하게 창의로써 즉시 행동했던 사람
임무현 / 대주전자재료(주) 회장
나는 나의 가장 친했던 친구와 동생처럼 사랑했던 사회운동의 동지요 사업동지들을 네 명이나 암으로 보내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고교 동창으로 가장 친했던 친구는 60년대 후반이었던 당시 별다른 치료방법이 없었던 터라 아무런 치료를 받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의 애인은 그가 암에 걸린 사실을 알고도 애틋한 결혼식을 올렸다. 나는 그때 즉음이 주는 서글픈 이별을 실감하였고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자각하였다.
80년대초에는 나와 오랫동안 운수노동자를 조직하는 운동을 해왔던 서울대 법대 출신 김정환을 간암으로 잃었다. 그는 참으로 순수하고 성실하였으며 낙관적인 사람으로 줄겁게 노동운동에 전념하였는데, 아마 과로로 암에 걸렸는지 모른다. 나는 그때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단지 매주 홍천의 그의 휴양처로 찾아가 인근의 좋은 뱀을 사다 먹이는 것밖에 달리 도울 수가 없었다.
또한 80년대 후반에는 서울 상대 출신 김병곤이 감옥에서 위암을 얻어 안타깝게도 아주 젊은 나이에 운명을 달리하였다. 민주화운동에 온몸을 던졌던 그는 장래 정치인으로 크게 성장할 자질을 갖춘 보기드문 인물이었다. 이 두 사람의 죽음에 결코 무관할 수가 없었던 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비통함을 삭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서울 상대 후배 박중희는 노동운동을 하다가 80년초에 나와 동일사건에 함께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뒤 출소 후 80년대 후반에 나의 회사에 입사하였다.
그는 나와 함께 회사를 키워왔으나 2006년에 중국공장으로 최한배와 바꿔 옮긴 후에 너무 힘들었던지 담낭암이 발병했고, 손쓸 사이도 없이 악화되어 2010년 봄 발병 3개월 만에 운명을 달리하였다.
우리는 호형호제하면서 25년간 같은 회사에서 정을 나눈 사이로, 그를 잃은 나의 슬픔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그가 김영삼 정부 시절에 정치를 하겠다고 회사를 떠나려고 할 때 정치를 하면 건강이 일찍 상한다는 이유로 말렸는데, 오히려 나의 회사에서 요절하였으니 내가 정말 면목이 없게 되었다.
박중희의 죽음 이후 그의 뒤를 이어 상해에서 근무하던 최한배가 췌장암 진단을 받고 귀국하였다. 연초에 박중희를 보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연말에 최한배가 암 진단을 받다니,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찌하여 친한 친구, 형제나 다름없는 후배이자 사업의 동지인 이들이 세상을 먼저 떠나야하는지, 나의 부덕함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이 후배, 동생들을 얼마나 힘들게 살게 하여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그들은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한 번도 나를 탓한 적이 없었고 기꺼이 자기를 희생해왔는데 나만 이렇게 건강하게 살고 있다니 참으로 미안하고 민망한 일이다.
요즘 들어 이들의 소탈한 웃음을 떠올리다가 북받치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눈믈을 닦곤 하는 일이 잦아졌다. 먼저 간 그들이 몹시 보고싶어지는 것이다.
나는 최한배가 워낙 정신력이 강한 인믈이기 때문에 그에게 좋은 운이 따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최한배는 87년의 6.29선언 이후 민간정부가 순조롭게 정권교체를 하고 노동운동 주체들이 스스로를 조직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자, 정치권으로 나가지 않고 과감히 나에게로 왔다. 그는 뭔가 가치를 창조하는 일, 부를 창조하는 일을 하면서 생산적인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는 중국공장 설립의 임무를 자청하였고, 마침 나는 10년간이나 계획했던 중국공장을 경영할 책임자를 찾고 있던 터라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었다.
그는 곧바로 준비에 착수하였고, 자동차 면허를 따기 위해 곧바로 안산면허시험장 근처에 방을 얻는 등 매사에 마음 먹자마자 시행에 옮기는 결단성으로 나를 감동시켰다. 96년 겨울부터인가 상해에 실내장식조차 안 된 작고 허름한 아파트를 세 내어 일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렇게 모든 어려움을 쉽게 생각하면서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면서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곧 IMF 금융위기가 닥쳐왔지만 그는 공장건설이 가능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임대공장을 만들어 중국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사업은 매우 빠른 속도로 확장되었고 만 3년이 안 된 2000년에 드디어 공장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초기의 중국 내수시장 개척의 고생스러움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처절하였다. 최한배가 아니었으면 모든 인프라가 부족하고 거친 중국에서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어려운 육체노동을 경험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내가 현장에서 오래 노동을 한 노동운동가를 제일 신뢰하는 이유가 이런 것이다. 그는 초기의 이 모든 어려운 과정을 중국 직원들과 함께 동거동락하면서 그들의 충성심을 획득하였다.
오히려 그를 배반하거나 괴롭힌 사람들은 한국에서 데려간 간부들과 조선족 직원이었다. 그들은 회사 기술을 경쟁사에 팔거나 기술을 가지고 나가 중국에서 경쟁사를 차리기도 하였다. 그는 조선족 직원들에게 남다른 동정심과 애정을 표시하였는데 어이없게도 돌아온 것은 배신이었다. 경쟁회사를 차린 간부는 오랫동안 그를 정신적으로 괴롭혔다.
그는 매우 절약하는 경영을 하였다. 낭비를 철저히 근절하고 인력을 경영하여 이익을 계속확보하였고, 2000년 초반에는 본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상해가 오히려 도움을 주었다. 지금도 상해공장의 이런 전통은 계속되어 낭비가 가장 적은 사업장이 되었다. 그는 카리스마적인 기질로 직원들을 길들였다. 잘못된 구석은 철저히 파헤치고 고쳐야만 직성이 풀렸고 적당히 넘어가지 못했다. 그런 한편으로는 직원들의 어려움을 섬세하게 살피고 돌보아주어 직원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중국 국내출장을 가면 여관방을 혼자 쓰는 일이 없었다. 중국인 영업간부나 연구원과 늘 같은 방에서 잤다. 그것이 직원들과 소통하고 절약의 모범을 보이는 그의 방법이었다.
중국이 너무 넓어 상해에만 공장을 두고 영업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산동성 청도와 광동성 동관에 각각 2003년과 2004년에 공장을 설립하였다. 그는 중국 3개 사업장의 총괄책임자가 되어 분주한 몸이 되었고 외모도 키 작은 중국인 등소평을 닮아갔다. 우리는 중국사업장을 중국화하고 중국 전자공업에 깊숙히 편입되기를 희망하였으며, 그렇게 하는 길만이 중국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길이라 믿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중국의 선진적인 전자공업과의 교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내가 중국에 가면 반드시 전직원들과 저녁에 회식을 하도록 하였는데, 이 회식 때 최한배는 자주 독특한 손수건춤을 추면서 직원들을 웃기곤 하였는데, 이런 제스처가 중국직원들에게 매우 친숙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일에는 엄격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매우 유머러스하고 깊은 정을 주는 경영자였다. 청도와 동관의 법인장들도 그를 존경하고 잘 협력하였다.
나는 그를 진심으로 신뢰하였다. 그는 자존심이 매우 강하여 때로는 자기의 경영방침에 동의하지 않는 본사 간부들과 논쟁을 벌이면 쉽게 양보하지 않고 어떻게든지 설득에 나서서 그의 주장을 관철해내곤 했다. 그는 청빈하고 도덕적이었고 그의 회사경영은 매우 투명하였다. 그는 아주 단호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함부로 넘보지 못하였다. 또한 그는 상해 한국인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아, 비록 우리 상해법인이 규모가 작았지만 재상해 서울대동창회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우리 회사의 <직원 행동요강>이 ‘조직으로, 치밀하게, 집요하게, 창의로써, 대담하게, 즉시 행동한다’인데 최한배야말로 이 모든 덕목을 갖춘 인물이었다.
작년 봄에 박중희가 암으로 우리를 떠나자 그는 상해로 다시 가서 못다한 꿈을 이루고 싶다고 하였고 나는 쾌히 그러자고 하였다. 나는 중국으로 진출할 결심을 1985년에 하였고 그 꿈을 최한배가 실현시켜주었다. 그러나 우리의 중국프로젝트가 출발에 지나지 않았고 앞으로 무궁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그는 잠시 우리를 떠나 있던 사이에 객관적으로 더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상해대주는 최한배의 분신이었고, 최한배에게는 상해가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가 박중희와 최한배의 역할을 바꾼 것이 잘못이었는지, 그래서 이 두 사람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너무 힘들고 스트레스가 많아 암을 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아는 그의 15년간의 치열한 삶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삶의 방식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여기에 쏟아 넣었다. 넓은 중국대륙을 동서남북 종횡무진 돌아다녔다. 그는 필요하면 즉시 행동하였다. 그는 한 번도 고생한 대가를 특별히 바라지 않았다. 그는 상대를 설득할 일이 있으면 즉시 토론을 하였고 설득을 하였다. 나는 그의 자족하고 봉사하고 그의 뜻만을 이루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과 순수함으로 항상 그를 좋아하였다.
나는 그의 회고록이 그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큰 감동을 줄 것이며, 또한 이 자서전을 접할 젊은이들에게도 특별히 인생의 큰 귀감이 되고 지침이 되어, 옳고 용감히 살아온 그의 불같은 삶이 영원히 가슴에 간직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건강을 회복하여 나의 미안함을 덜어주었으면 좋겠다.
암에 대한 새로운 약물이나 처방이 그의 암 번식속도보다 빠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