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 2. 인간의 향기는 어디에서 나는가
김문수 / 경기도지사
글을 읽으면서 나는 계속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때로는 내가 잊어 버렸던 아련한 추억의 봄날이 떠올랐고, 때로는 내 가슴속 깊이에서 솟구치는 눈물이 흘렀다. 최한배의 삶은 바로 나의 삶이다. 최한배의 젊은날은 바로 나의 자화상이다. 굽이굽이 그의 삶 자체가 바로 나의 삶이란 걸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뒤늦게 깨달았다.
최한배는 나의 대학 1년 후배이지만 당시 험난했던 대학생활에서는 나는 그를 알지도 만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학생운동을 하고, 청계천노동자들과 함께 야학을 하고, 시대를 고뇌하며, 노동현장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면서 내가 걸어왔던 길을 놀랄만큼 꼭 같이 걸어왔던 것이다. 다만 우린 서로가 서로를 모르고 10여 년간 지내왔던 것이다. 당시 유신독재의 엄혹한 현실 때문에 서로서로 이심전심 같은 생각, 같은 길을 걸어도 서로 묻지도 않고, 알려고도 않은 것이 우리 시대 운동권의 미덕이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1983년이었던 것 같다. 28년 전이었다. 나는 그때 노동혁명을 꿈꾸는 32살의 해고노동자였다. 나와 함께 노동조합을 하다가 1980년 정화조치되었던 아내가 서울대학교 근처인 봉천동에서 조그마한 책방을 운영해서 생계를 책임지고, 나는 혁명의 꿈을 안고 구로공단으로, 전국각지의 공단으로 돌아다니며 노동자들의 의식화와 노동조합결성 지원활동에 몰두하고 있었다.
당시 최한배는 구로공단 대우어패럴에서 엄청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노동자가 3,000명이나 되는 큰 공장에서, 청계천에서 야학을 할 때 키웠던 김준용과 함께 빠른 속도로 조직사업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만난 그 누구도 이렇게 대담하고 효과적으로 조직사업을 하는 운동가가 없었다. 최한배는 1980년대 최대 노동조합인 대우어패럴노동조합을 성공적으로 결성하고, 80년대 초반 최대의 노동운동이었던 구로동맹파업을 이끌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는 당시 캄캄한 어둠 속의 구로공단에서 숨어서 활동하였으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큰 별이었다. 그는 언제나 앞에 나서지 않고 묵묵히 일을 꾸미고 궂은 일을 도맡아서 하지만 이름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의 인품은 누구라도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말이 없고, 거짓이 없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어려운 일이라면 먼저 십자가를 졌기 때문에 투옥만 세 차례, 3년 반이나 살았다. 흔히들 민주화운동 유공자다 뭐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그러한 내색을 하지 않고 어려운 이웃을 정성껏 돌보는 숨은 일꾼이었다. 그는 말수도 적지만 글도 많이 쓰지 않았는데, 이 책을 보면서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나에도 말하지 않았던 그의 진정성, 헌신성, 그리고 우리 모두를 대신한 그의 고통과 고뇌가 나의 심금을 울렸다.
15년간의 노동운동과 15년간의 대주전자재료 임원생활, 3년간의 경기도 공직생활 동안에 그는 언제 어디서나 인간의 향기는 어디에서 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향기는 스스로를 뽐내는 데서 나는 것이 아니라 최한배처럼 시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깊이 고뇌하고, 스스로 알아서 찾아내고, 필요한 곳에 자신의 삶을 던지고, 묵묵히 그러나 진정을 다해 온몸과 마음을 바치는 사람의 발자취에서 나는 것이 아닐까?
길지 않지만 짧지도 않은 우리들의 아팠지만 진지했던 지난날이 우리 둘만의 아련한 추억이 아니라, 사랑하는 우리 정환이에게도 생생한 역사로 전해지길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