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熱情時代

Ⅴ - 3. 전국노동자대회는 누가 만들었을까

張萬玉 2012. 1. 12. 08:59

문성현 / 전 민주노동당 대표

 

 

최한배와의 만남은 숙명이었다.

 

아, 40년 전이라니!

돌이켜보면 아득한 옛날인데, 내 친구 한배를 처음 만난 일이 마치 엊그제 일같이 눈앞에 선하다.

한배는 군산고, 나는 진주고를 졸업한 촌놈 중의 촌놈, 말하자면 ‘개천에서 난 용’들이었다. 서울, 부산, 대구, 광주 아닌 중소도시에서 서울 상대 합격은 한두 명 있을까 말까한 ‘사건’이었으니...... 청운의 꿈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진지하고도 치열하게 미래를 향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대학생활은 결코 순탄하지 못해 1971년 위수령 발동, 1972년 유신헌법 선포로 대학생활이 반 토막 나고 말았다. 오죽하면 한 해 동안 공부한 학기가 반도 안 된다고 ‘전문대’라고 스스로 비하하기까지 했을까. 걸핏하면 데모에 휴교령이 내려지는 교정에서 우리는 끼리끼리 모여 이 암울한 시대의 양심있는 청년들을 자처하며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 것인가’를 놓고 치열한 토론을 벌이곤 했다.

대학생활이 그러했기에 한배와 나는 같은 대학 같은 학과 동기였지만 학교에서는 만나지 못했고 교회 대학생부에서 처음 만났다. 아니 교회라기보다는 야학 팀에서 만났다.

마땅히 갈 곳이 없던 촌놈인 나는 아침저녁으로 돈벌이 과외를 하면서 나름 뜻있는 ‘야학교사’ 자리가 없나 찾아보던 중이었다. 대학시절의 ‘야학’은 여름의 농촌봉사활동과 함께 그 자체로 낭만이기도 했다. 그때 한 선배의 권유로 찾은 곳이 경동교회 대학생부였다. 대학 2학년말이던가? 3학년초였던가? 기억조차 가물하다.

대학생부 소그룹 중에서 사회참여를 중심으로 토론하던 모임(돌샘)을 주도하던 사람이 바로 최한배였다. 정현백 교수, 임지순 교수도 거기서 만났다.

아득한 기억 속의 한배는 ‘곱슬머리에 옥니’로도 부족하여 ‘최씨’, 속칭 고집 센 사내의 전형을 다 갖추고 있었다. 웃음소리 호탕하고, 기도도 열정적으로 잘하던 친구(기도할 시간만 되면 할 말이 없어 진땀을 빼곤 하던 나였기에 ‘기도 잘하는 한배’의 기억이 남아 있나보다)...... 그것이 한배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이러저러한 학습과 토론을 거쳐 뜻을 모은 한배와 나는 지금은 사라진 청계천 뚝방에서 판자촌 야학을 함께 시작했다. ‘뚝방교회 야간학교’의 교장은 한배였다. 그래서 내 기억보다는 한배 기억 속에 더욱 뚜렷이 남아 있을 시절이었다. 내가 군에 가기 전까지 1년여 기간이었으니 대학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시작한 야학이었을 것이다.

가끔 생각해 본다.

우리가 한 2년 있다가 대학에 입학했더라면?

상대가 아니라 문리대나 법대에 입학했더라면?

또 경동교회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한배를 만나 야학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의 인생, 아니 우리의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생은 어찌 보면 숙명이고 운명이다. 이때 함께 만난 또 하나의 운명적인 친구 정금채와 함께 우리는 ‘노동운동’을 하기로 결의를 맺었으니 가히 ‘도원의 결의’라 할 만하다.

그렇다. 혼자였다면 불가능했을 길, 아니 둘이었더라도 힘들었을 길을 셋이 함께 가기로 했으니 가능했던 노동운동의 길이었다. 적어도 나로서는 그렇다. 하지만 한배는, 곱슬머리 최한배는 혼자서라도 그 길을 가지 않았을까 싶다.

 

 

가장 노동자다운 최한배

 

우리들 모두 병역의무를 마치고 다시 만난 해가 1977년이었다.

우리 셋은 한배의 제안으로 청계피복노조의 노동자들과 모임을 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대우어패럴노조 위원장이 된 김준용, 청피노조의 황만호 위원장 등이 그 멤버였다. 당시 한배는 코오롱에 나는 삼양사에 취직해 있었는데, 공장행을 제일 먼저 결단하고 나선 사람이 바로 한배였다. (아니, 정상적인 취직이 힘들었던 금채가 먼저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셋 중에서 누구보다 노동자들과 친화력이 높았던 사람은 한배였다.

보일러 기능사 시험도 같이 보고 직업학교도 같이 다니고 하다가 각자 적당한 공장에 취직을 하여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한 것이 1979년 말경이다. 80년 봄 광주민중항쟁이 터졌을 때 광주일고 나온 서울 상대 친구 임상택이 피 어린 광주 소식을 담은 투사회보를 가져왔다. 한배와 금채는 잠실에서, 나와 상택이는 도곡동에서 이 회보를 뿌렸는데 잠복해 있던 형사들에 의해 금채가 덜컥 잡혀갔다.

함께 노동운동을 준비하던 차였기에 충격이 컸지만 우리는 금채 없이 현장행을 결행하였고 어떻게든 현장에 뿌리를 내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 나는 영등포의 동양기계를 거쳐 창원으로 내려갔고 한배는 구로공단의 대우어패럴 보일러실에 안착해서 구로동맹파업의 불길을 지폈다. 그리고 마침내 터져나온 대우어패럴노조 설립 및 구로동맹파업!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에 길이 남을 그 싸움의 한복판에 한배가 있었다. 1985년 봄의 일이었다. 나는 서울대 출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해고당할 뻔 했지만 조합원들의 보호 속에서 겨우 살아남아 통일산업 노조위원장을 하고 있을 때였고 아마 이 때쯤 한배도 서울대 출신임이 밝혀졌을 것으로 짐작한다.

한배는 정말 외모부터 분위기부터 완벽한 노동자였다. 나만 해도 안경을 쓰고 있어서 ‘노동자답지 않은 노동자’로 보일까봐 늘 전전긍긍하던 터였지만 한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 특유의 소탈함으로 한배는 노동자들과 부담 없이 어울릴 수 있었고 사람에 대한 믿음과 끝없는 애정으로 인해 노동자들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았다.

병마와 싸우는 가운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이 책에는 한배가 왜 노동운동을 하게 되었고 얼마나 치열하게 노동운동을 해 나왔는지, 또 그 길에서 부딛혔을 어려움과 한계들이 무엇이었는지 구구절절 표현되어 있을 것이다. 결국 한배와 내가, 그리고 금채가 함께 남겨야 할 역사적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당신들은 왜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 뿌리치고 노동운동을 하게 되었소? 당신들이 한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소?”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한배와 나는 아주 소박한 마음으로 노동운동을 했다. (금채는 학생회장을 지내서 그런지 아주 조금은 학생운동권 냄새가 났다고 하면 싫어할까?) 최한배는 서노련 사건을 거쳐 노운협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정파적 편견을 넘어서려고 노력하던 사람이었다. 운동의 이념과 노선을 놓고 치열하게 논쟁하고 서로를 재단하던 그 ‘운동판’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배는 어느 정파에도 몸을 싣지 않았다. 나도 큰 틀에서는 정파와 거리가 있었다.

그렇다. 내가 아는 한배는 가장 정치적일 노동운동을 기장 비정치적으로 했다. 왜 그랬을까?

 

 

제1회 전국노동자대회의 선봉장 최한배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라는 조직이 있었다. 87년 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이 전노협으로, 민주노총으로 발전하기 전에 전국 각지에 있던 노동운동단체들이 만든 협의체였다. 한배는 처음부터 이 조직의 실질적인 중심이었다. 그리고 당면한 투쟁을 책임지고 이끌었다.

지역적 토대도 다르고 이념적 지향도 달랐던 조직들의 협의기구였던 터라 사업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정말 만만치 않았다. 말도 무성하고 회의는 지루하고 길기만 했다. 그러나 한배는 당시 터져나오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전국적 전선으로 모아내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짓밟는 악법을 철폐하기 위한 투쟁을 조직해냈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의 성과를 노동조합의 강화로 연결시키기 위한 대중노선을 투철하게 관철시켰다. 무엇보다도 노동운동의 이념이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임을 확인시키고자 했다. 이 확고한 입장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한배는 노운협을 이끌어 나갔고 결국 1988년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를 만들어내었다.

연세대 노천광장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 ‘전태일열사 정신 계승과 노동악법 철폐’를 위한 전국노동자대회를 만든 사람이 바로 노운협 사무국장 최한배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하나로 모아내고 ‘해체 민자당, 타도 노태우’를 외쳤던 위대한 정치투쟁, 그 노동자대회의 기조를 잡은 노동운동가 최한배를 꼭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올해로 24회째를 만난 노동자대회에 한배는 없었고 나도 처음으로 노동자대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늘 함께 했던 이소선 어머님도 전태일 열사 곁으로 떠나셨다. 비록 24년 전의 감격과 치열함에는 미치지 못하고 주제는 변하겠지만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는 한 노동자대회는 계속될 것이다.

지금도 눈 앞에 생생하다. 그 날 연세대 정문. 경찰로 까맣게 봉쇄당한 그 한가운데 서서 “가자 여의도로!” 하고 외치며 전선을 돌파하던 내 친구 노동운동가 최한배의 모습이......

그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우리나라 노동자대군의 대장이었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던 용맹한 선봉장이었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한배나 나나 노동운동을 하면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한 때를 꼽으라면 그 때 그 순간이 아니겠는가?

순간에서 영원으로 이어져도 좋았을 ‘그 때’가 지나고 세월의 바람은 달라졌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불가피하게 정치투쟁으로 이어지고 정치세력화의 바람을 탔다. 탄압을 이겨낸 노동조합도 자리를 잡아갔다. 민주노총이 합법화되고 노동자정당도 만들어졌다. 그러자 투쟁 속에서는 하나였던 정파들이 각각의 고개를 내밀었고, 노조와 정당을 조직적으로 장악하기 시작했다. 정파에 얽매이지 않고 노동자들의 정치투쟁을 가장 대중적으로 이끌었던 사람들로서는 노동자들의 조직(노조와 정당)에서 설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이 때 내 친구 한배도 노동운동‘판’을 떠났다. 노동자들의 가장 대중적인 정치투쟁인 노동자대회를 만든 ‘정치적 대중운동가 최한배’가 노동자들의 정치‘판’을 떠났다.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나는 최한배를 ‘가장 비정치적인 노동운동가’라 일러 본다.

나는 전노협 사무총장으로 금속연맹 위원장으로 민주노동당 대표로 계속 그 ‘판’에 남았고 지금도 노동자들의 정치‘판’ 한가운데 있다. 그러나 나 또한 한배와 마찬가지로 가장 ‘비정치적’이다. 그래서 나는 거듭 강조하는 것이다. 전국노동자대회를 만든 최한배, 가장 치열한 노동자 정치투쟁을 이끈 최한배를 우리 모두는 기억해야 한다고....... 비록 그것이 신화 속 빛바랜 깃발일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