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국내

남도 한바퀴 1 - 통영

張萬玉 2012. 4. 9. 10:47

멀리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떠나더라도 공허한 마음으로 기약없이는, 특히 홀로는 떠나지 않으려고 기를 쓰던 중이었다.

중국어 강의가 한 주 미뤄져 일주일 가까이 휴가가 생긴 참에 바람 쐬러 가자고 바람잡는 후배도 있고 해서...  흔쾌히 장거리 여행계획에 '승인' 도장을 찍었다. 

2006년 남도여행은 장흥으로 내려가 해남, 강진, 진도를 거쳐 보길도와 청산도를 돌고 목포, 부안을 거쳐 올라오는 코스였다.

이번에는 통영으로 내려가 거제를 돌아보고 남해로 나와 광양을 거쳐 장흥에서 올라오는 코스로 잡았다. 장흥에는 낙향한 후배가 살고 있다.

 

일주일 계획의 짧지 않은 여정이지만, 운전 선수인 데다 남도 사정에 빠삭한 후배와의 동행이니 몸도 마음도 가비얍게 떠날 참이었는데

함께 가기로 했던 후배에게 막판에 급한 사정이 생겨 졸지에 혼자 떠나게 되었다. 허걱!! 

혼자 차를 끌고 장거리 여행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살짝 긴장도 되지만.... 이 긴장감이야말로 내가 여행에서 기대하는 진짜배기 매력.

 

아침 9시 반에 출발해서 경부고속도로 - 대진고속도로로 길을 잡고 금산 휴게소까지 내질렀다. 오랜만에 맛보는 쾌속질주가 피를 들끓게 한다.

통영 시내에 도착하니 오후  세 시. 숙소부터 잡으려고 통영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니 너무 복잡하다.

조금 한적한 산양도로 쪽으로 접어들었는데 아름다운 해안도로에 홀려 달리다 보니 13킬로 넘게 들어왔다.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지도에 석양이 아름답다고 소개된 달아공원 근처에 있는 모텔에 짐을 풀어놓고 

우선 통영시 전모를 파악할 셈으로 한려수도 전망 케이블카역으로 달려갔는데.... 날이 흐려서 한려수도는 관두고 발 아래 통영시 전망조차 시원치 않았다.

 

그나마 인근에 있는 전혁림 미술관이 섭섭한 마음을 달래주었다.

통영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활동하였고 통영에 뼈를 묻은 전혁림 화백. 이 미술관은 그가 생전에 작업하던 곳이다. 

 

 

'민화적 감각과 원색의 강렬한 대비를 통해 단청 등 우리 고유의 민족정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세계....' (팜플렛에서 발췌)

칸딘스키 느낌...(내 감각에서 발췌.. ㅋ)

 

  

 

미술관 외벽은 그의 작품을 도자기 타일로 옮겨 장식한 것이라고 한다.

 

 

 

 

 

통영시민문화회관은 통영시내 중심부에 있는 남망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통영시민회관보다 더 근사한 곳에 입지한 시민회관이 또 있을까? 

 

이 장소의 공식명칭은 남망산 국제조각공원이다. 

작품이 몇 점 안 되어 약간 실망이지만 탁 트인 바다 전망과 잘 어울려서 멋진 인상을 남겨준다.

 

 

개미의 세계? 인간의 세계?

여하튼 패턴화된 '조직'의 세계... ㅎㅎ (내 나름의 해석)

 

남망산 조각공원의 종결자, Admiral Lee.

동상 아래 바쳐진 한 봉지 박하사탕은 장군님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일 것이다. 

부시럭부시럭 비닐봉지에서 공손하게 뭔가 꺼내는 귀여운(!) 노인을... 내맘대로 떠올려본다.  

 

여러 모로 부산 같은 느낌을 주는 도시...

곳곳에 항구, 도시를 둘러싼 능선, 그 능선에 다닥다닥 붙은 규격화되지 않은 주택들, 차도 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떼, 그리고 대단한 어시장...

날이 저물 때까지 항구와 시장골목을 누비고 다니다가 지금 제철이라는 도다리쑥국을 먹으러 들어갔는데 세 군데서 툇짜 맞았다.

혼자 다니면 이런 문제가 있구나. 웬만한 특산요리는 2인분 이상으로만 주문할 수 있는 게 식당가 불문율인 것을...

단념하려다가 마지막으로 들어간, 관광객들보다 동네사람들이 올 만한 집에서 주문에 성공했다. 1인분 밥상으로 12,000원.

 

양은 쟁반에 담겨 나온 대강 차린 상 같지만 음식은 볼품보다 훨씬 맛있었다.

제철 맞은 도다리의 부드러운 속살이 된장끼만 약간 푼 쑥국에 잘 어울려 국 한 사발 만으로도 흐뭇한 밥상이 될 정도지만

바다의 향기 물씬 풍기는 특별한 밑반찬들 솜씨도 예상 외였다.

 

특히 요놈들... 

    

1) 멸치잡이 그물에 걸려든 새끼 갈치라는데, 쪄서 말린 것을 물엿과 고추장, 참기름에 무쳐냈다.

    비리지도 않고 고소한 데다 쫄깃한 식감이 일품인지라, 지인들과 나눠먹으려고 한 박스 샀다. 

2) 서울에서도 가끔 볼 수 있는 밑반찬이지만 (톳에 으깬두부를 넣어 무친 것) 톳의 향이 특별했는지 두부가 특별했던 건지... 암튼 맛있었다.

3) 요녀석은 서비스. 생멸치회다. 

 

비바람이 치기 시작하니 짙어져가는 어둠과 구절양장 산양도로길이 걱정된다. 8시도 전인데......

동행이 있었으면 도남관광지구의 화려한 불빛 속으로 들어갔으려나? 

 

4만원짜리 방이 분에 넘치게 훌륭하다. 게다가 바다가 보이는 5만원짜리 방인데 그 가격에 쓰란다.

이런 방이라면 마땅히 대여섯 명 정도 끌고 와줘야 예의인데... ㅋㅋ

특이한 장치가 시선을 끌었다. 방 앞에 붙은 무인정산기.

이 모텔은 프런트를 거치지 않고 들어와도 된다. 방 앞에 붙은 전광판에 불이 꺼져(켜져?) 있으면 무인정산기를 상대로 무언가를 하면 된다(자세한 건 안 해봐서 모른다)

객실조차 자판기로 이용할 수 있단 얘기다. 허허허!!  

모텔이란 게 이제는 타인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시설로 확고히 자리매김을 한 모양이다.

그래도 그렇지.... 인간이, 인간의 따뜻한 서비스가 불필요한 시대로 이행해간다는 기분이 들어 씁쓸했다. 

 

밤새 비바람이 몰아쳤다. 일기예보는 오늘 하루 내내 그럴 거라고 한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면 날씨가 문제냐고, 떨어지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호세 펠리치아노가 속삭이지만 (As long as we are together, who cares about the wether?) 

Because we are not together, I care about the weather, 비 핑게 대고 방구석에서 혼자 빗소리에 귀 기울일 일이 두렵다. 

통영 시내를 대강이라도 돌아볼 수 있게, 적어도 비나 바람 중 한 가지만이라도 잦아들기를 빌며 꾸역꾸역 차에 시동을 건다.

 

중앙시장 바로 뒤쪽 능선 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달동네 동피랑 마을.

얼마 올라가지 않고도 통영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탁월한 전망을 가졌지만, 미술봉사자들의 벽화로 새옷을 입기 전에는 외지인들의 관심을 끌 리 없는 장소였겠지.

지금은 서울 낙산 달동네를 비롯하여 곳곳이 벽화로써 입소문을 타고 있으니 그리 신선할 것도 없겠다만

전망 하나는 정말 끝내준다. 내 어릴 때 살던 천연동 산4번지 달동네처럼...

마당에서 아랫동네를 굽어보는 것도 적잖은 놀이였지. 학교, 문방구, 동사무소, 국궁터, 수도가게(동네 유일하게 수도가 있어 온 동네 물지게들을 불러모으던 잡화점)....

          

비탈 정도는 비슷하지만 상태는 천지 차이였다.

이렇게 비가 오면 길은 곤죽이 되고, 산에서 흘러내려온 빗물은 집 앞에 개울을 이루고, 집터라고 쌓아올린 축대들은 붕괴 위협에 직면해야 했다. 

 

소설 배경이 될 만한 집.

어디까지가 그림이고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올라가보고 싶었지만 비바람이 너무 거셌다.   

 

숨도 못 쉬게 휘몰아치는 바람에 떠밀려 차는 어느새 거제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비바람 속에서도 찾아다닐 수 있는 실내공간이 없지는 않았는데, 청마 문학관, 토지 문학관 등등 한번 들러보리라 눈여겨둔 곳들도 있었는데...

내 마음 문이 먼저 닫혀버렸던 것이다. 뭘 찾아다닌다는 것이 시답잖음을 넘어 청승맞게까지 느껴지는데, 어쩔 것인가.   

외로울 땐 달리는 것보다 더 좋은 약이 없다. 음악 입빠이 틀어놓고.... 이럴 땐 비가 쏟아지는 편이 훨씬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