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1 - 세비야
유레일 패스가 있기는 해도 몇 번씩 갈아타는 불편도 그렇고, 세비야로 떠나는 룸메이트들이 모두 버스로 이동하는 걸 보고는 그냥 야간버스를 예약했다.
예비의사 은양과 세비야에 살고 있는 아가씨와 동행이다.
야간버스는 괴롭다. 나이가 드니 더더욱.. ^^
밤 8시 반에 출발한 버스가 세비야에 도착한 것은 새벽 다섯 시였다.
방금 도착한 낯선 도시인 데다 아직 어둠이 너무 짙어 터미널 부근 찻집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시내로 들어가려니까
세비야 아가씨가 자기 집에서 눈좀 붙이고 가란다. 하우스메이트들이 있을 텐데 민폐 아닐까 싶어 망설였지만
밀고 당기고 하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집 앞.
도둑고양이처럼 숨어들어가 두어 시간 눈 붙이고는 고맙단 인사도 제대로 못한 채 살금살금 빠져나왔지만
그 쪽잠이 그날 하루 일정을 소화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스페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벽화 아래서 빵과 커피로 아침을 때우고는
서로간에 이미 다른 숙소를 예약해놓은 터라 다시 (전화 대신 메일로! ㅎㅎ) 연락하기로 하고 은양과 헤어졌다.
첫인상 만으로도 아기자기 작은 도시임을 느낄 수 있는 세비야.
비록 출근과 등교시간을 맞아 붐비는 흉내를 내고는 있지만 전쟁터 같은 서울의 러시아워에 비하면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버스가 다니는 큰 길에서 골목으로 접어들어 20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숙소 'Hostel Garden'
밖에서 보면 여느 가정집이나 다름없어서 간판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칠 뻔 했다.
로비로 들어서니 오메~ 나를 환영한다는 메시지가 떡 걸려 있네!!
이거 하나만으로도 이 호스텔이 숙소 관리에 얼마나 정성을 다하는지 예감할 수 있었는데, 3박4일 머무는 동안 그 예감이 375% 정확했음을 확인..
1, 2층 객실들은 크고 편리하고 깨끗하고...(멕시코 와하까의 Paula와 비슷한 분위기)
2층 계단으로 올라가면 해바라기용 카우치와 파라솔 딸린 티테이블들을 갖춘 넓직한 옥상이 있다.
1층 로비 뒤쪽에도 이렇게 넓직하고 아름다운 정원이......
땅값 비싼 대도시에서는 (5불생활자들이) 꿈도 못 꿀 호사가 아닐 수 없다.
직접 요리를 해먹고 싶은 욕구를 자극하는 넓고 깨끗한 주방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
나도 3박4일 중 딱 하루만 빼고, 숙소 친구들과 저녁 해먹는 재미 때문에 귀가를 서두르곤 했다. (남미 여행 이후 정말 오랜만에......)
손바닥 만한 세비야라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낮에 싸돌아다니다가 지친 몸도 쉴겸 샤워 하고 친구들이랑 저녁 해먹고 나서 쓰레빠 끌고 밤마실 나가는 일과.
밤마실 준비를 마친 나의 룸메이트들.
요리도 열심, 놀기도 열심인 애교도 만점 베를린 츠자들이다.
미소천사 영국 꼬마.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맛에 엄마와의 외출보다 로비에 진 치고 앉아 있는 걸 더 좋아하는...
세비야 도착 첫날은 야간버스로 설친 피로도 풀 겸 숙소 동네 곳곳을 가볍게 돌아볼 생각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세비야 시내를 걸어서 일주하고 말았다.
꼬불꼬불 골목길들 탓이었다. 지도가 거의 쓸모없는 거미줄 같은 골목길에 홀려 엄청나게 뱅뱅돌이.
도시가 작았으니 망정이지..... 정말 다리 떨어질 뻔했다.
이슬람 계통 건물인 듯도 하고 중국 당나라 때 건물 같기도 하고... 확인을 못해봐서 여지껏 궁금하다, 이 건물.. ^^
그리고 이 성당.
십자가 모양이 웬지 卍자와 닮아 그런지 성당 전체가 상당히 동양적으로 (내지 이단적으로) 느껴졌던 독특한 성당.
특히 아주 뾰족한 고깔 후드를 걸친 사제(혹은 평신도 단체원?)들의 형상이 여기저기 눈에 띄어, 뭔가 독특한 역사를 지닌 성당이 아닐까 궁금하게 했다.
여행노트를 분실하지 않았으면 이 해묵은 궁금증을 풀 수 있을 텐데....
무리요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 성당이 어딘지 찾기 위해 인터넷을 마구 뒤져봤지만 세비야 대성당 얘기뿐......
무리요 미술관도 걸어갈 만한 거리에 있었다.
성화 작가라고 해서 별 기대 없이 (뜨거운 햇볕도 피할 겸) 들어가봤는데 의외로 좋았다.
신비주의적인 느낌보다는 인간의 냄새가 물씬 풍겨서 아주 친근했고, 그 '인간'들의 '인간을 넘어서고자 하는 진지한 몸짓'이 인상적이었다.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중후한 명암 대비도 좋았고......
굶주린 아이들을 소재로 세속화들도 몇 점 눈에 띄었다. 그가 세속화들을 좀더 그렸으면 좋았겠는데... 싶은 아쉬움.
이탈리아에서 시작해서 프랑스, 스페인, 오스트리아, 체코에서 계속 만나게 되는 불쌍한 인간군상들.
신전을 떠받치기 위해 태어난 인간들.. 저 고달픈 멍에를 벗어던질 날은 언제일지.
아니, 영원히 벗어던질 수 없는 게 인간의 운명인지......
바르셀로나에서도 만났던 대형마트.
셰계 3대 성당에 들어가는 세비야 대성당과 대성당 부근
왼쪽 사진 가운데로 보이는 것이 히랄다 종탑.
세비야 대성당의 전모를 보려면 저기 올라갔어야 하는 건데....
이제와서 안 가봤다고 후회막심인 곳이 바로 저 꼭대기다.('스페인광장'과 함께.,..)
여긴 알카사르.
풍성하게 쏟아지던 햇살 때문이었는지, 이국적인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암튼 내겐 세비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소.
알 카사르는 고유명사가 아니고 일반명사로, 15세기 이전 스페인과 이슬람세력 간에 충돌이 잦았던 시기에 이슬람 세력이 지은 성채를 말한다.
보통 유럽의 성채들과 달리 사각으로 성을 쌓아 망루와 탑을 갖추고 그 내부에 궁궐과 정원을 지었다.
세비야에 남아 있는 이 알카사르는 이슬람세력이 물러난 뒤에도 계속 왕궁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Lemon tree, very pretty and the Lemon flower is sweet.
But the fruit of the poor lemon is impossible to eat
요즘 Lemon tree 하면 Fool's Garden 노래를 떠올리지만, 내가 소녀적에 '레몬트리' 하면 이 노래가 꼽혔었다.
인적 없는 레몬나무 숲에 숨어 이 노래 실컷 불렀다. 고등학교 때 결성했던 우리 여성트리오의 단골 레파토리였거든.
레몬꽃 하나 귀 옆에 꽂았으면 영락없는... ㅋㅋㅋ
(요즘 애들 말로... ) '오, 느낌 있어, 느낌있어!' ^^
과달키비르 강을 건너가며 보니 멀리 세비야 대성당과 히랄다 종탑이 보인다.
하몽, 하몽!!
적선을 해야 하는 이유를 경쾌하게 알려주고 있는 구걸자들
'맥주를 위하여', "포도주를 위하여'. 'Sincero(라틴음악 밴드)를 위하여', '위스키를 위하여'.... 마지막 것은 모르겠으나
아무튼 배짱들은 좋다. 우리 나라에서같으면 욕이나 바가지로 얻어먹었을 텐데..... ㅎㅎ
이런 식의 구걸은 유럽대륙을 돌아다니는 동안 적잖이 만났다. 말짱하게 차려입은 청년이 다가와 경쾌하게 청한다.
'1유로만 줄래?'
'왜?'
'내가 필요해서 그래. 싫어? 싫음 말고.."
그리고는 다시 경쾌하게 떠나간다. ㅋㅋ
까짓 거 주기 싫으면 안 주면 되지 그 사람의 인생까지 들먹이며 (분노까지 섞어가면서)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타파스1 식당골목
세비야에서의 이튿날 저녁, 메일로만 연락하던 은양과 도킹하여 드디어 벼르던 '타피스'를 먹으러 갔는데
멋은 있었으나 맛은 별로였다. 셰리주는 달콤했다. ^^
그라나다에 가니까 '맥주 마시면 타파스 다섯 접시가 공짜,' 뭐 그런 식당 많던데......
마침 우리 호스텔에서 제공해준 공짜 플라멩고 공연 티켓이 있길래 같이 보러갔다.
무대나 의상 등을 제대로 챙기지 않은 가난한 무대였지만 노래와 춤 솜씨는 일품(이었다고 생각한다. 비교대상이 없어서 단언은 못하지만.)
음악과 춤을 보고는 확실히 알았다. 플라멩고가 이슬람의 노래요 춤이라는 것을......
11시에 공연이 끝났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이 마구 엉키는 바람에.... 숙소로 귀환한 시간은 새벽 2시.
다행히 세비야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기 때문에, 한밤중에 길을 잃었다 해도 겁날 일은 없다.
- 타파스라는 단어는 스페인어 단어 tapar 즉 채우다, 덮다의 뜻을 의미하는 동사에서 유래한다.원래 달콤한 셰리주를 마실 때 날벌레가 꼬이는 것을 막기 위해 빵이나 고기를 얇게 썰어 덮은 데서 유래한 이 요리는 식당주인들의 손에 의해 전통적인 빵과 햄에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재료의 스낵들로 진화해갔으며 이에 따라 타파스는 스페인 요리 중 셰리 주 만큼이나 중요한 음식으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타파스는 애피타이저 내지 술안주 등 간식의 일종이지만 올리브나 치즈, 오징어 등 해산물 등 다양한 재료를 쓰기 때문에 한끼 식사로도 충분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