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유럽

스페인 2 - 꼬르도바

張萬玉 2009. 3. 3. 11:02

은양과 꼬르도바 하루 나들이를 하기로 했다.

세비야에서 꼬르도바까지는 기차로 2시간 정도 소요.

꼬르도바 역에서 내려 우리가 보려는 메스끼따까지는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더 들어간다. 

 

세비야 역.

 

기차에서 중국 유학생들 네 명을 만나 줄곧 떠들며 갔다.

유럽에 나와 있는 유학생들 수가 얼마(...라고 했는데 까먹긴 했지만 깜짝 놀랄 만한 숫자)이고 스페인에 나와 있는 학생들만 해도 2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대부분이 국비, 내지는 기업체 장학금으로 공부한다고 한다. 미래를 준비하는 중국의 저력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요즘의 중국 학생들은 애국심과 자부심이 넘쳐난다. 내가 아는 과거의 중국 학생들과 확실히 다르다.

은양이 의외로 중국말을 한다. 중학교 때부터 짬짬이 취미로 해왔다는데 웬만한 화제는 말하고 듣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의 실력이다.

놀랍고도 반가웠다. 살짝 서먹했던 사이가 갑자기 가까워진 느낌..  

 

 

 

꼬르도바는 로마 식민지 시절부터 안달루시아 지방의 중심이었고, 8세기 이슬람 세력의 진입 이후 유럽과 북아프리카 이슬람 왕국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전성기에는 인구 100만 명이 넘고 모스크의 수도 300개가 넘는 큰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그리스도교 세력의 국토회복운동인 레꼰끼스타에 의해 이슬람 세력이 완전히 밀려나기 전까지 이곳은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유대교가 공존하며 문화의 중심을 이루었는데, 이슬람세력이 물러나면서 유대인들도 쫓겨나고 온전히 그리스도인들의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꼬르도바에는 모스크, 그리고 유대교의 시나고가(Sinagoga는 그리이스어. 영어로는 시나고그Sinagogue)가 남아있다.

 

꼬르도바에서 손꼽히는 유적지는 이슬람 사원이었던 메스끼타(Mezquita, 스페인어로 모스크).

이슬람 문화와 그리스도교 문화가 공존하는 건축물로, 건물 내부 중앙의 성당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이슬람 사원의 모습을 띄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뒤 성직자들이 당시의 왕이었던 카를 5세를 설득하여 성당을 짓기로 했는데 

완공 후 성당의 모습을 본 왕은 “당신들은 어디에도 없는 것을 부수고, 어디나 있는 것을 지었다”고 했다고 한다.

(자료 출처 : 순이이야기 http://www.sunine.org/index.htm )

 

 

 

 

 

 

 

 

 

 

메스끼따와 인접해 있는 알카사르

세비야의 알카사르보다 규모는 작지만 역시 느낌 있는 이슬람 건축물과 아름다운 정원, 탁월한 전망을 갖고 있다.  

 

 

 

 

 

 

  

미구엘 오르난데스라는 시인의 100주년(무슨 100주년인지 안 쓰여 있어 모르겠지만) 기념 시비. 

저 시인이 누군지, 저 시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 바 없으니...... 대신 나는 로르카의 시를 떠올려본다.  

 

꼬르도바

멀고 고적한 그 곳

 

말은 검은 조랑말, 달은 휘둥그레 크기만 하고

배낭에는 올리브 열매 몇 낱

길은 알아도 영원히

난 꼬르도바에 가지 못하리

 

광야로 바람 속으로

말은 검은 조랑말, 달은 시뻘건 핏빛

꼬르도바의 첨탑 위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죽음

 

아 멀고 먼 길이여

아 용감한 나의 조랑말

아 꼬르도바, 꼬르도바에 도착하기 전

죽음이 나를 기다린다네

 

꼬르도바

멀고 고적한 그 곳

 

이 시를 쓸 무렵의 꼬르도바의 분위기도 지금과 비슷했을까?

왜 시인은 자신의 고향 그라나다가 아니고 꼬르도바를 그렸을까?

왜 가지 못한다고 탄식하고 있을까? 꼬르도바가 무엇의 상징이길래?

 

 

 

 

 

 

 

역시 남쪽으로 내려오니 히잡 쓴 여자들이 훨씬 자주 눈에 띈다.

 

 

메스끼따 부근의 시나고가

 

관광객들에게 '하얀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유태인 마을이 불과 몇 킬로쯤 떨어진 곳에서 손짓을 하는데

날은 마르고 뜨겁고... 돌아가는 기차가 재촉을 하니 먼 눈 인사로 때우고 발길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