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봤으면 해서요
당신이 지금 쉬고 있는 집이에요.
당신이 처음 입주했을 때는 맨 흙이었지만 이제 잔디가 제법 자랐네요.
석실을 만들어놓으니 벌초할 일도 없고 딱히 해드릴 게 없어서...... 꽃 바꾸고 비석이나 닦아놓았어요.
돌아보면 당신은 너무나 침착하게 갈 길을 준비했어요.
암 선고 받고는 바로 영정사진을 찍었고, 땅이 얼 무렵이 되니 누울 자리를 마련하자고 했죠.
항암치료로 번 시간 동안 당신은 나와 함께 봄과 여름을 만끽했고 아끼던 사람들을 거의 만나보았고 지나온 60년을 돌아보며 기록까지 남겼죠.
병상에서 내 수고로움에 의지했던 것도 겨우 두 달.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순간조차도 당신은 당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였죠.
사실 나는 두 번째 항암치료가 실패로 끝났을 때조차도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갈 꺼라는 걸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어요..
내년 봄에는 좀 지대가 낮고 마당이 넓은 집으로 옮겨볼까 싶어 양평 경희네 옆집을 보고 오기까지 했죠.
하지만 당신은 처음부터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있었네요. 지금 와서 돌아보니......
어쩌면 그렇게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갔는지 존경스럽다못해 얄밉기까지 하답니다.
사실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 삶의 일부이고 해가 지면 달이 뜨듯 늘 우리의 삶과 함께 동행하는 것인데
죽음에 대한 생각이나 대화, 준비 등은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계에선 터부시되고 있죠.
당신이 먼저 떠남으로 해서 나도 조금은 더 냉정하고 현명해진 것 같아요.
나도 당신처럼 침착하게 살다가 침착하게 가고 싶어요..
오늘은 당신이 좋아하던 전통명절 중 한 날이랍니다.
모일 친척들이 없어서 그랬는지 우리 세 식구끼라도 꼭 차례상을 챙기왔던 당신의 영향으로 올해는 아들네미가 추석 차례를 챙기네요.
걔나 나나 음식 차려놓고 조상신들이 와서 드셔주기를 믿고 바라는 쪽도 아니고 누가 뭐랄 사람도 없지만 그냥 차례상을 차렸답니다.
전통명절을 지키는 이벤트라고나 할까요, 당신이 없는 섭섭함을 메꾸기 위한 정성이라고나 할까요.
참, 당신이 꼭 봤으면 했던 장면들이 있었어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잊히지 않는 뭉클한 장면들이었어요. 아마 당신도 보면 아주 기뻐했을....
발인 끝나고 장지로 가는 길에 회사에 들려 영결식을 했는데
전 직원들이 회사 정문 앞에 도열해 기다리고 있다가 장례차량이 도착하니 일제히 허리를 숙여 맞아주더군요.
회사장 의례의 일부였겠지만 예상치 않았던 장면이어서 너무 놀라고 감격한 나머지, "당신이 이 장면을 봐야 하는데..." 몇 번이나 중얼거렸답니다.
더욱 나를 감동시켰던 것은 당신의 사진들을 크게 뽑아 회사 현관부터 영결식장으로 가는 복도에 전시해놓았던 거예요.
장례식 바로 전날 손과장이 당신 사진들을 달라고 해서 경황 없는 중이라 무엇에 쓰려는지 묻지도 않고 보내줬는데
장례 뒷바라지로 그 바쁜 와중에 세심하게 이런 준비까지 했더군요.
사장님 생각이었대요. 완전 감동이었어요.
영결식 마치고 장지까지도 많은 분들이 따라와주셨어요.
임종이 가까웠다는 소식을 듣고 출장을 미루셨던 회장님은 그날 장지에서 바로 인천공항으로 가셨죠. 당신도 알고 계셨으면 해요.
정환이는 지금도 많이 아쉬워해요.
아빠와 살풀이를 할 게 아직 남았는데 훌쩍 가버리셨다고요.
저도 깊이 소원해요. 혹 당신이 영적 신분으로서의 큰 힘이나 영향력을 갖고 있다면
얘 손좀 꼭 잡아서 이끌어주세요.
오늘 우리는 차례상 앞에서 절을 했지만 사진은 멋적어서 찍지 않았어요. ^^
대신 당신이 새 집에 입주한 날 인사했던 장면을 보여드릴께요.
그러실 수 있다면 절도 받으시고 제 술도 한 잔 받으세요.
우리 수동 살 때 윤이사가 가져온 난이에요.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그때 꽃이 활짝 피어 은은한 향을 풍기고 있었죠.
꽃이 지고 어느 새 한 해가 흘렀는데, 다시 꽃이 피었네요.
당신도 늘 내 곁에 있지만, 늘 조용히 지켜만 보지 말고...... 가끔은 감동적인 향기로 내 삶을 적셔주기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