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1 - 빈
# 콘서트
파리에 가면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미술관에 가게 되듯이
빈에 가면 당연히 연주회 한 번쯤은 가줘야 한다. 하물며 한때 클래식에 빠져 살던 내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의식(ceremony)'이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좀 허탈하다. 뮌헨에서 발동 걸리기 시작한 귀차니즘으로 인해 빈에서의 일정은 그야말로 발 가는 대로.... '될 대로 되라'였던 것이다.
각종 전시회와 연주회가 열리는 지역이 어디 넓기나 한가 말이지.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발품을 팔았더라면 두고두고 간직할 만한 '그 순간'이 되었을 것을.
빈에 도착한 날 저녁엔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나는 호스텔에 짐만 딱 내려놓고 밤 깊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려고 무작정 거리로 뛰어나온 참이었다.
뮌헨에서 묵었던 Wombat이 빈에도 있길래 예약을 해두었지만, 그노무 울적한 심정이 어서 뮌헨을 떠나라고 하길래 하루 일찍 빈에 온 게 화근이었다.
오늘은 방이 없다고 예약한 내일 오란다. 할 수 없이 두 정거장 떨어진 A & O를 찾아갔다.(Valley Hostel에서 누가 묵었다는 얘길 기억해내고...... )
예약도 없이 대뜸 가서 방 달라니까 mixed dorm 밖에 없다네.
혼숙이 처음도 아니고 해서 별 생각 없이 올라갔더니 분위기가 좀 수상한(근거는 없다. 그냥 내 느낌..ㅋ) 리비아 총각 혼자 방을 지키고 있다.
과테말라에서도 캐나다 총각하고 단둘이 방을 쓴 적이 있지만(그것도 2인실을!!) 그 녀석과는 일주일도 넘게 다녔던 사이라 별로 불편한 줄 몰랐는데
모로코에서 눈이 깊고 수염 무성한 넘들이 하도 들이대는 통에 그쪽 남자들이 어째 쫌......(게다가 이녀석은 대낮인데도 침대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다. ㅜ.ㅜ)
저녁 되면 다른 사람들이 더 들어오겠지, 그러기만을 빌면서 거리로 나오긴 했지만
지친 내 마음이 원하는 건 화려한 스테판 광장이나 아름다운 연주회가 아니라 오직 외지고 안락한 나만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스테판 성당 앞에서 거닐 때만 해도 가는 가랑비 정도라 그럭저럭 걸어다닐 만 했지만 갈수록 사나워지는 빗줄기.
이른 저녁을 먹으며 기다려봐도 도무지 꺾일 기세가 안 보여, 거리에서 모짜르트 코스프레 하는 녀석들로부터 할인가 25유로짜리 콘서트표를 충동구매.
'할인가', '모짜르트 복장'......이런 비본질적인 요소들 때문에 신비감이 현실감으로 급전환. ㅋㅋ
비 때문에 제법 비싼 유흥비를 지출한다는 기분으로 들어갔는데 어우! 생각보다 괜찮았다.
소극장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객석 오십 개 정도의 작은 무대였지만 현악사중주에는 딱 어울리는 분위기.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았을 텐데 무용수들이 그 좁은 무대를 누비며 왈츠까지 추는 건 좀 무리수...여행 길에서 가끔 만났던 '민속춤' 공연 같은 느낌?
그래도 빈에서 빈 음악가들이 연주하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니 한번 들어보시든지...... ㅎㅎ
이걸로 양이 안 차서 이틀 뒤에 다시 표를 샀다.
이번에는 이틀치 숙박비 40유로짜리다. 호프부르크 궁에서 열리는 호프부르크 오케스트라 콘서트.
오페라하우스에서 제대로 하는 베르디 오페라를 보고 싶은 마음이 없잖아 있었지만 일정에도 무리가 오고 가격도 후덜덜이라......
이럴 때 입으려고 배낭 구석에 낑겨뒀던 단벌 블라우스 떨쳐입고...ㅎㅎ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무대였기 때문에 라데츠키 행진곡 등 너무 흔한 곡들이 주를 이루어 아쉬웠지만 그래도 엊그제 콘서트와는 격이 좀 달랐다.
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 가수는 한국인인데 브로셔에 적힌 경력이 꽤 화려하다. 솔로로 두 곡을 부르기도 했다.
# 왕궁(쇤부른 / 벨베데레 / 호프부르크)
한때 유럽의 패권을 장악했던 합스부르크가의 본거지였던 곳이니만큼 빈의 주요 볼꺼리는 왕궁이다.
자, 1번타자 쇤부른 궁 나가십니다.
사냥 중 샘(schonnen brunnen부른)을 발견하고 짓게 되었다는 데서 이름을 갖게 된 쇤부른 궁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호화궁전이라고 한다.
건물 총 길이가 얼마라더라, 방이 1441개나 된다고 했다.(미친 거 아님?)
마리 앙뜨와네뜨가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했던 곳이라는데, 이 곳을 못잊어 그녀는 프랑스에 베르사이유 궁전을 지었던 것일까.
이 글을 쓰다가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하여 지식in을 뒤져봤더니 나같은 의문을 가진 사람이 또 있었나보다
답부터 말씀드리자면 베르사이유궁이 먼저 지어졌습니다.
베르사유궁전은 원래 루이 13세가 지었던 사냥용 별장을 루이 14세가 1662년 착공하여 1668년 완공된 바로크 양식의 어마어마한 궁전입니다.
당시 프랑스와는 라이벌 관계였던 합스부르크가에서는 이처럼 화려하고 웅장한 궁전을 가진 프랑스가 부러웠던 게지요..
그래서... 시기와 질투를 느끼던 합스부르크가의 Leopold 황제는 1696년 베르사유궁보다 훨씬더 화려하고 웅장한 궁전을 지을것을 명합니다.
이후 무려 17년간의 공사끝에 웅장하고 화려한 쉔브룬 궁이 지어졌던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양식으로 지어진 두 궁전 모두 화려함과 웅장함 면에서는 베르사유궁전이 쉔브룬 궁전에 비해 뛰어난 것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합스부르크가에서 쉔브룬을 지을때 베르사유궁처럼 멋진 정원을 짓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쉔브룬궁은 궁전 못지않게 잘 다듬어진 정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물의 양이 풍부해 수원의 활용이 쉬웠던 베르사유궁이 멋진 분수를 가지고 있는 반면
쉔브룬은 물의 양이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베르사유처럼 멋진 분수를 만들지 못했다고 합니다.(그런데 실제로 가보면 쉔브룬의 분수도 멋집니다.. ^^)
현재 쉔브룬궁의 정원은 어린이를 위한 놀이공원으로 쓰이고 있답니다.
왕궁 옆에는 1.7제곱킬로에 달한다는 미로정원이 가꾸어져 있다.
'취향'이 극한을 추구하다 보면 병적인 경향을 띄게 된다는 생각이......
(분재나 애완동물 개량종들을 볼 때도 그런 생각이 든다. 나의 호불호를 떠나서...)
최소 두 시간은 걸린다는 내부 투어는 패스. (입장료도 따로 받음)
화려한 조각들로 장식된 거창한 분수를 지나서 멀리 보이는 언덕 꼭대기 멋진 건축물을 향해 오르기 시작.
쇤부른 궁은 궁전 자체보다도 삼단 구조로 구축한 지형, 그리고 그 꼭대기에서 보는 전망이 더 멋지다
프로이센과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지었다는 (그리스 신전 흉내를 낸) 글로리에테로 올라가면 시야가 확 트인다.
쇤부른 궁전 쪽에서 올려다본 글로리에테
글로리에테에서 내려다본 쇤부른 궁전
2번타자, 벨베데레 궁
쇤부른 궁과 비슷한 컨셉이지만 상궁에는 미술관이 있다고 해서 찾아간 궁전.
교통이 좀 까다로워서 좀 헤맸다. 트램 D선을 타면 되긴 하는데(Schloss Belvedere 하차) 메트로와 트램 D선이 만나는 정거장 찾는 게 좀 어려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메트로 남역에서 내려 길을 물어보면서 도보로 10분 정도 걸어도 될 뻔 했다.
터키군을 무찌른 오이겐 장군이 지은 이 궁은 그의 사후 그의 조카딸에게 넘겨졌고
다시 마리아테레사에게 팔려 그녀의 여름궁전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미술관으로 쓰이는데 특히 상궁에는 클림트의 '키스'가 전시되어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다.
사진 촬영 안 되는데 몰래 한 컷 찍었다.
클림트와 에곤 쉴레, 그리고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또 한 사람(노트와 함께 기억도 분실)의 그림... 모두 좋았음.
3번타자, 호프부르크 궁
콘서트를 보기 위해 자주 드나들다 보니 빈에서 가장 친숙한 장소가 됐다.
음악회가 열리는 곳은 신왕궁(사진), 뒤쪽으로 구왕궁이 있다.
구왕궁은 드넓은 숲그늘 짙은 드넓은 정원이 일품인데 보여드릴 만한 사진이 없다. 아까비......
# 박물관 구역
이곳은 자연사 박물관, 미술사 박물관을 비롯해서 가지가지 박물관이 모여 있는 구역이다.
박물관에 꼬이기 시작하면 한도끝도 없어서 패스,
보수적인 오스트리아인들의 현대적 감수성은 어떤 걸까 궁금해서, 현대미술 쪽 갤러리들 구역으로 발길을 옮겼는데
엊그제 길에서 만난 여학생과 다시 마주쳐, 그리고 중간에 끼어든 네팔 유학생들과의 수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그만 입장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현대미술관 구역으로 들어가는 입구 벽에 뭔가 재미있는 것이 있었다. 마음의 소리를 들어라, 뭐 그런 오디오장치였는데.... 뭐였더라?
중국인 룸메이트가 입이 닳도록 추천한 '음악의 집'을 찾아가느라고 발품 엄청 팔았다.
칼 막스 플라자를 거쳐 걷고 걷고 또 걷고......
요한스트라우스, 모짜르트, 쇼팽, 리스트... 등의 육필악보와 애장품들, 당시의 포스터 등이 전시되어 있고
당시의 (살롱) 연주회를 재현한 미니어처들이 있고 등등 전시는 뭐 그저그랬다.
아픈 다리도 쉴 겸 구석자리에 죽치고 앉아 비엔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몇 년도인가 새해맞이 연주회 실황을 듣다가 깜빡 졸기까지 했음.
마지막에 있던 전시물이 쫌 웃겼다.
모니터에 나오는 비엔나 필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지휘봉을 휘두르게 하고는... 연주가 끝나면 저런 메시지가 나온다.
혹시 음악에 지휘봉이 잘 안 맞았거나 하면(지휘봉에 음악이 따라와야 하는 거 아닌가?) '당신의 지휘는 정말 형편없군요.." 그런 메시지가 나오기도 한다. ㅋㅋ
숙소와 숙소에서 만난 친구들
연주회 보고 자정이 가까워 돌아간 A & O의 mixed dorm에 다행히 두 명의 아가씨가 들어와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서둘러 움밧으로 짐을 옮겼다.(서역에서 좀 가까운 1호점이 아니라 거기서 5분 정도 걸어 주택가로 들어가는 2호점이다)
뮌헨 움밧과 비슷한 시설, 비슷한 분위기.
룸메이트들이 괜찮아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 숙소다.
좌 : 평소에는 스카프 안 쓰고 다니는데 나와의 기념촬영을 위해 써준다고 했다. 헌데 수첩이 없어지니 나는 기억도 못한다. 정확히 어느 나라 아가씨였는지.
드물게 만나는 중동권 아가씨라 호기심이 발동해서 이러저러 많이 묻기도 하고 그랬는데.....
우 : 내 옆 침대를 쓰던 친해도 너~~무 친한 커플.
그리고 중국 골드미스 Zh양.
선쩐에서 음악학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빈에는 출장차 왔다는 이 아가씨와는 비록 사흘 밤이었지만 꽤 소란스럽게 지냈다.
새로 산 아이팟 기능 실험한다고 내가 알고 있는 중국노래를 대라고 하더니 검색창 뒤져 선창을 하고(로비에서 그러니 민망해서 혼났다. ㅋ)
이미 저녁을 먹고 들어온 나를 끌고 옆 건물 지하에 있는 주방(숙박객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으로 데려가 어디서 났는지 짜파게티 끌여먹자고 법석.
내가 이 여행 마치면 상하이로 이주한다고 하니까 이메일 뿐 아니라 주소 따고 전번 따고 아무튼 엄청 친한 척 하더니
막상 여행 끝나고 내가 같이 찍은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줬건만 감감무소식이다.
이 주방에서도 여럿 만났다. 한국 유학생들도 만났고 한국에 와봤다는 애들도 만났다.
세계일주중이며 도중에 한국에서도 한 달 가까이 지냈다는 호주 총각이 광화문에서 이순신 장군을 손바닥에 올려놓은 듯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한국 물가, 특히 숙박비가 너무 비싸서 다시 못가겠다고 이구동성으로 불평을 하는데 진짜 할말 없더라.
동네 레스토랑에서 만난 동갑내기 아줌마.
한국 아줌마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영어를 하길래 미국 교포인가 했더니 몽골인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