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4 - 몹쓸 숙소
외국에 있는 한인민박들 중 당국에 영업신고를 하지 않고 운영하는 경우가 아마 태반일 것이다.
그래도 예약 페이지에 주소를 알려놓지 않고 근처에 와서 전화하라는 경우는 처음 보았다.
런던시가 단속을 엄격하게 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이 민박 쥔장이 뭔가 구린 데가 있어서 그러는 걸까?
어쨌든 (여느 숙박을 예약할 때처럼) 대략 위치와 가격만 확인하고 쉽사리 예약부터 한 게 잘못이었다.
뒤늦게 주소나 약도 없는 걸 발견하고 갸우뚱하긴 했어도 그렇다고 예약까지 취소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는 그냥 넘어가버린 거다.
도착해서 전화하면 데리러 나온다니 그럴 만하니까 그러겠거니 하고......
환전하면서 나온 잔돈으로 1일권을 사는 바람에 잔돈이 바닥 난 다음에야 비로소 '도착해서 전화하는 방법'이 번거롭다는 걸 깨닫게 됐다.
잔돈을 바꿀 데도 마땅히 보이지 않고 해서 두리번거리다가 지나가던 청년에게 굽신거리며 휴대폰을 빌렸다.
잡음이 많아 제대로 듣지 못햇지만 그쪽에서 기다리라고 지시하는 곳이 눈 앞에 보이길래 대강 응, 응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개미새끼 얼씬 안 한다.
20분쯤 기다리다가 이제 어째야 하나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앞에 있는 자동차판매점에서 아랍계 신사가 나오더니 길 잃었냐고 묻는다.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고맙게도 휴대폰을 내어준다.
첫 만남부터 이렇게 번거롭기 시작하더니 그곳에 머무르는 4박5일 동안 내내 나를 괴롭혔던 몹쓸 숙소 얘기,
여행하면서 단 한 차례도 숙소 가지고 욕한 적 없는 (벌레 물렸다고 투덜거린 적은 있어도) 내가 숙소 욕을 하려고 포스팅 하나를 할애하게 될 줄이야.
4년을 묵혀뒀으니 이제는 해도 되겠지.
아랍계와 동양인, 인도인들이 대부분인 서민아파트였는데(주소만 있어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위치였다.).
숙박비가 싸니까 좁다거나 지저분하다거나 등등의 불평은 관두고......
1. 예약 취소 불가 사태
체크인을 하면서, 에딘버러에 가기로 계획을 바꿨기 때문에 27일 밤 예약을 (도착한 날이 24일이었다) 캔슬하겠다고 했다가 단번에 거절 당했다.
보통의 경우 사람이 나타나서 계획 변경을 얘기하면 그냥도 캔슬해주고
대개의 약관에 의하더라도 70시간 이내에는 패널티 없이 캔슬해주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캔슬이 될 꺼라고 생각했는데.....
자기네 약관은 다르다고, 안 읽어봤냐면서 절대 환불은 안 된단다. 예상 밖의 거절에 이 손님 당황했다.
끈질기게 설득도 해보고 사정도 해봤지만 알바생으로 보이는 이 어린 스탭, 요지부동이다.
자기에겐 권한이 없다고 하길래 사장님께 내가 직접 전화해보겠다고 하니까 전화는 안 되고 메일로 하란다.
요 대목에서 확 열 받았다. 아니, 얼마나 높으신 양반이길래......
차라리 나가겠다고 하니 그러라고 한다. 참 사람 어를 줄도 모르는 고지식한 친구. 그렇다고 내가 저 큰 가방 메고 갑자기 어디로 간다냐.
한참을 씩씩거리다가 그냥 주저앉았다.
다른 데 가도 이곳에서 떼일 돈보다 비싼 숙박비를 지불해야 할 터......안 그래도 짧은 일정을 숙소 찾으러 다니는 데 허비하기도 아깝고.....
에휴, 숙박비 싼 맛에 내가 참는다. 게다가 기를 쓰고 찾아온 숙소가 아니더냐.
2. 거미여인과의 악연
4인실 방에 들어가니 침대 하나에 짐이 있었다. 짐 주인은 토모꼬, 일본 아가씨로 한 달째 투숙하고 있는 장기여행자란다.
저녁에 들어와 보니 얼굴은 강문영인데 팔다리가 길쭉길쭉하고 머리가 허리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게 딱 '거미여인'이다.
영어를 잘 못한다고 눈인사만 건네더니 저녁 내내 자기 침대에서 노트북만 들여다보고 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자정이 지나도록 불 끌 생각을 안 한다.
나는 불 켜면 못자니 이제 불 좀 꺼달라고 하니까 자기는 밤새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불을 끌 수 없다고 한다.
로비로 나가라니까 태연자약 도리질만. 아니, 같이 방을 쓰면서 저렇게 당당할 수가......
말문이 막혀 스탭을 불렀다. 이런 일은 스탭이 해결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아까 예약 껀으로 열받게 했던 스탭, 이번에도 자기가 낄 일이 아니고 룸메 당사자들끼리 협의할 일이라며 레게머리 무라이를 불러낸다.
내 참 어이가 없어서......무라이는 어차피 일본인이고 토모꼬와는 같은 장기투숙자 입장이다. 결국 토모꼬의 대변인 아닌가 말이지.
무라이의 통역에 따르면 토모꼬의 일은 시차 때문에 밤에밖에 할 수 없는 일이고 보안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에 로비에서 할 수 없다는 거다.
무조건 나더러 이해해달라는 거지. 스탭도 한자락 거든다. 나이 드신 분이 이해 좀 해달라고.....
자정(심한 경우에는 열 시) 이후에 공동침실은 소등을 해야 하고, 더 볼 일이 있는 사람은 로비로 나와야 하는 게 게스트하우스의 상식 아닌가?
하지만 이 숙소에는 정해진 룰이 없고 투숙자들끼리 협의해가면서 생활한다나.
밤은 깊어가고 입씨름은 길어지고...... 결국 나이드신 분의 노여움이 이겼다.
하지만 소등 후에도 토모꼬는 이불 뒤집어쓰고 손전등에 의지해서 여전히 따닥따닥...... 으휴, 저걸 가지고 또 실랑이 벌일 수도 없고.......
3. 샤워 난민
방의 불은 껐지만 마음의 불은 끄지 못하고 밤새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일어났는데
씻으려고 화장실에 가보니, 이건 또 뭐야? 욕조와 세면대를 다 뜯어놨다.
아직도 자고 있는 스탭을 깨워 이게 다 무슨 상황이냐고 물어보니 오늘부터 사흘간 화장실 공사를 해야 한단다.
아니, 그런 사정이 있으면 내가 체크인 할 때 얘길 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사흘 후의 사정으로 캔슬 해달랄 때는 딱 잡아떼더니 바로 다음날에 있을 자기네의 계약 위반에 대해서는 입 싹 닦고 마는 건가?
내가 자기네 문제 때문에 예약을 캔슬하는 경우에는 패널티 없이 캔슬해줄 껀가?
어쩌면 좋으냐고 했더니 3층에도 자기네 숙소가 있다고 그곳 화장실을 쓰란다.
목에 수건 두르고 치솔에 치약 묻혀가지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도 웃기지만
그 집엔 손님들이 없나? 안 그래도 게스트 하우스의 고충 중 하나가 화장실 차례 기다리는 건데 그 집 손님들 눈치를 또 얼마나 봐야 할까.
왕짜증 폭발이지만 그러기에는 아침시간이 너무 일러 나이 드신 내가 참는다.
그 집 손님들이 한밤중이라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왕 묵기로 한 거 열 내면 뭐하나. 그냥 머릿속에서 만화를 그리면서 픽 웃고 만다.
덫을 쳐놓고 한 놈 걸리기를 기다리는 찌질한 사냥꾼 같은 사장놈.
4. 스탭2 때문에 내가 참는다
셋째날 아침에는 거미여인과 눈 맞추기도 싫고 동네 목욕탕 행각도 짜증이 나길래 밥도 안 먹고 싱크대에서 고양이 세수만 한 채 튀어나갔다가
대영박물관 보고 한국 김밥집에서 한끼 때우고는 숙소로 돌아왔다. 간밤의 불면을 못 견뎌서......
한숨 자고 일어나서 라면이나 끓여먹자고 주방에 들어갔더니 거미여인이 샐샐 웃는다. 누가 예쁘달까봐.
새로운 스탭이 그간의 사정을 전해들었는지 "불편하셨죠? 제가 볶음밥 해드릴 테니 마음 푸세요." 그런다.
솜씨도 좋고 입심도 좋은 이 총각, 뚝딱뚝딱 김치볶음밥을 만들더니 토모코까지 불러 먹인다. 화해하라는 뜻인가보다.
오늘밤도 방에서 컴퓨터 할 꺼냐, 나는 술 마시면 곯아떨어지니까 오늘밤에 맥주나 실컷 마셔야겠다고 하니까
자기도 오늘 작업 안 해도 된다나. 얄미운 토모코.
새 스탭이 화장실 공사 미안하다고 오늘밤 맥주는 자기가 내겠다고 한다. 전에 있던 녀석보다 훨씬 융통성 있군.
그리하여 뮤지컬 보고 돌아온 저녁에 로비에서 벌어진 맥주 파티.
숙소에 토모코랑 무라이만 있는 줄 알았는데 자기 방에서 우리 싸우는 소리 다 듣고 있었다며 리투아니아 총각도 나오고
오늘 체크인 한 한국 아저씨도 합류하고...... '몹쓸 숙소 대소동'은 그렇게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5. 거미여인의 마지막 개그
별 거 아니다. 하지만 웃겨서......
에딘버러 가는 비행기에서 샴푸를 뺏겨버려 마지막 한 줌의 샴푸가 필요했다.
에딘버러에서도 머리를 안 감았는데 두 달 반 만의 귀향길에 암만해도 머리는 감고 가야겠기에
그나마 룸메라고 토모코에게 샴푸 한 번만 쓰게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는 말씀,
자기 샴푸는 일본에서 가져온 천연샴푸로 엄청 비싼 것이고 영국에서도 구할 수 없는 것이라 안 되겠단다.
아니, 내가 몇날 며칠을 같이 쓰자고 그랬니? 허허허! (당시엔 너무 어이가 없었는데, 요즘 한국에서도 드물긴 하지만 이런 아이들이 보인다.)
사실 게스트하우스의 묘미는 이런 것이다.
일단 객실로 들어가면 다른 사람 볼 일이 없는 편안한 숙소와 달리 별별 사람들, 별별 경험들과 얽히게 되고
그래서 별별 세계에 대한 직간접 경험들을 갖게 해주는 달콤쌉싸름한, 나의 일상과는 다른 별미.
일상이 복잡해서 쉬러 간다면 모를까 나처럼 밋밋한 일상에 변화가 필요해서 떠나는 사람 같으면 게스트하우스가 정답이다.
좋지 않은 상황에서는 한발 빼고 그 상황을 즐겨보라. 그 '재수없는' 경험조차도 내 좁은 시야를 넓히느 데 보탬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