苦中作樂 14- 애들레이드
추수를 마친 넓은 밀밭과 바다를 번갈아 끼고 달리는 길이 끝없이 이어지고
Two Wells라는 작은 마을을 지나니 잘 가꿔진 푸른 가로수길이 나타나면서 서서히 도시의 느낌이 다가온다.
아들레이드. 도시스러우면서도 시골의 정다운 느낌이 충분히 남아 있는 아기자기한 도시.
지금까지 다녔던 호주의 그 어느 도시보다 내 취향에 가장 가깝다.
대도시에서는 호스텔에서 묵는다. 호텔급 호스텔 YHA에 체크인.
캔버라 YHA는 4인실 39불인데 여기는 35불, 시설도 시스템도 캔버라 YHA보다 훨씬 낫다.
아침식사 포함이고 금요일 저녁마다 이벤트성 파티를 열어준다.
탁구대와 포켓볼대도 있고 지하에 작은 수영장도 있고.... 숙박객들이 엄청 많다는 얘기지.
센트럴마켓에서 간단하게 장을 봐다가 점심을 해먹고 10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Mt. Loft 전망대에 다녀왔다.
절벽을 끼고 올라가는 길이 멋졌다. 일행들이 남산길이다, 북악스카이웨이다 하는데 나는 남한산성길이 생각났다.
막상 올라가니 전망은 올라가는 길만 못했다. 시내가 멀기도 했고 구름이 너무 짙게 드리웠다.
산불과 싸우다 순직한 소방관들의 추모비가 시선을 붙든다. 산불이 빈번한 호주에서 소방관들은 최고의 영웅.
전망대에서 돌아와 식사 법석을 시작한다.
이 여행의 주제는 '삼시세끼'. 도착하면 밥 해먹고 밥 해먹고 나면 다시 다른 도시로 밥 해먹으러 달린다. ㅋㅋ
고기 간 것에 의지해서 양배추와 감자를 넣고 쌈장을 된장 삼아 정체불명의 국을 끓이고
당근채, 양배추채, 쇠고기볶음에 계란 후라이, 고추장과 참기름으로 마무리한 푸짐한 비빔밥을 올리니 외국애들 눈이 휘둥그래진다.
그것도 모자라 100g에 70센트 하는 수박을 통째로 들고와 자르니 자기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속으론 그랬을꺼야, 조그만 애들이 엄청 먹네!
식사 후에는 패딩도 없는 빳따 가지고 맥주 내기 탁구대회. 오랜만에 여유있는 저녁시간이었다.
아들레이드에서의 둘째날은 자유롭게 시내를 돌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결국 뭉쳐서 다닐 게 뻔하길래, 요 사진 한 장 찍고 슬그머니 '일탈 만옥'이 되었다.
거리는 온통 자전거 물결. 자전거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참가가 가능하면 자기도 하겠다고 대회본부석까지 찾아갔다가 유니폼만 얻어입은 박쌤. ㅋㅋㅋ
빅토리아 광장 건너편에 있는 경찰국 쪽에서 무료 트램이 운행한다길래
시내 지리도 익힐 겸 일단 그걸 타고 돌다가 보타닉 공원 근처에서 내렸다.
소풍 나온 아이들이 바글바글하는 공원을 가로질러 강을 따라 걷다가 컨벤션 센터를 지나치니 남호주박물관과 아트갤러리가 나온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두 시간 가까이 걸었다.
컨벤션센터 옆은 Rowing Club
이 클럽 멤버인 할머니들이 얼마 후 열리는 요트대회에 출전할 작품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다. 멋진 노년!!
아들레이드는 다른 도시에 비해 애보리진이 많은 곳. 그래서인지 그들의 문화적인 영향이 도시 곳곳에 드러난다.
공사중인 기차 역사.
배가 고파서 아케이드 지하상가에 들어가 간단히 점심 때우고
아트갤러리로 들어가니 일행들이 와 있다.
헤헤, 그럴 줄 알았지. 이곳은 이 도시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관광명소 아닌가.
전시 작품들은 기대보다 훌륭했고 전시작품수도 많았고 모던했고...... 특히 여성주의적 작품들이 많아서 좋았다.
페미니즘이 물씬 풍기는 이 작품은 뭔가 사연이 많은 부부 예술가의 아내 작품인데(남편 작품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음)....
이름도 사연도 전혀 생각나질 않는다. 우화적인 느낌과 몽환적인 색채가 맘에 들었다.
내 친구 누구와 분위기가 너무나 흡사한 여인
이 원주민 여인은 추장의 아내.
그냥 추장이 아니라 뭔가 호주 정부와 뭔가가 있었던 특별한 추장이었던 것 같은데 안 적어둬서 모르겠다.
확실히 호주에서는 여성들의 활동이 활발하고 사회적 지위도 높다는 것을 거리만 걸어봐도 알겠다.
양성평등 캠페인이나 여성을 위한 직업훈련 공고 포스터도 곳곳에 보이고, 건국 영웅 동상들 중에도 여성 동상들이 적잖이 눈에 띈다.
총리도 여자고......(우리나라도 영수가 여자이긴 한데에?)
의회 등 정부건물을 지나 도착한 이민자박물관.
이민자국가인 호주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는 흥미로운 곳이었다.
일단 탐험가 존 스투아트의 호주대륙 개척 얘기가 나온다. 브로큰 힐에서부터 많이 들었던 이름,
백호주의를 고수하던 시절의 이민절차를 비꼰 전시물
당신이 아시아인이라면 이 버튼을 누르시오 (답은 정해져 있다.)
당신이 모르는 단어 50개 받아쓰기를 합시다. 틀렸다고요? 그럼 당신은 이민금지대상자이니 입국할 수 없소이다.
이것은 원주민인 애보리진들을 그들의 땅에서 내쫓아버린 데 대한 사과와 그들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는 성명이다.
국민의 절반 가량이 다인종의 이주민이고, 선주민들이라고 해도 역시 원주민들을 내쫓고 자리를 잡은 이주민이다 보니
그렇게 이루어진 '국민'들의 선택을 받은 정부로서는 수많은 합의와 양보와 약속들을 이끌어내야 할 터.
섬세하고 겸손한 자세, 그리고 인권에 대한 철학이 절실히 요구될 것 같다.
다민족국가답게 각 민족그룹 커뮤니티가 튼튼하게 자리잡고 있는 듯.
헌데 Korean Community Group의 심볼마크는 보이질 않네. 왜, 왜, 왜?
한국인 커뮤니티가 없을 리가 없는데.... 그룹이 너무 작은가? 아니면 해외에서도 콩가루?
이 박물관 건물은 원래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구빈원이었다고 한다.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돌아오는 길.
(빈부 인종 그 차이가 뭐가 됐든) 인간에게 함부로 하지 않고 인간을 아끼는 정치, (빈부 인종 그 차이가 뭐가 됐든) 인간이 기댈 수 있는 사회......
그게 정말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꿈 꾸는 것조차 순진하게 여겨질 만큼?
다시 숙소로 모이고 나니 이미 저물녘.
하루 왼종일 도시를 헤맨 일행들이 저녁을 나가서 먹자고 한다.
공금에서 처리하는 식사비용이니 가장 저렴하고 가장 푸짐한 음식을 찾아 나간다. 정답은 차이나 타운.
여전히 쌩쌩한 몇몇이 호주 애들 어떻게 노는지 구경가자고 잡아끄는데 나도 기운이 옛날 같진 않단 말이지, 손사래를 치고 일찍 들어왔는데
다녀온 사람들 얘길 들어보니 한 잔 켜놓고 밤새 춤만 추더란다. 밴드도 좋고 나이 많은 사람이라고 눈총도 안 주고....
아웅, 딱 내 스타일인데, 내가 갔어야 하는 건데...... ㅋㅋㅋ
아들레이드에서의 마지막 날. Elder's Market에 갔다.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피렌체에서 만났던 토요시장과 비슷했다. 자기가 키우고 만든 좋은 제품을 판다는 자부심이 보이고 거래에도 여유가 있다.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일을 위해 바자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느낌.
꼬마들의 참여도 활발하다. 타투. 요리체험 하는 애들도 예쁘지만 부모님을 도와 열심히 판매를 하는 모습도 어찌나 깜찍한지.
바이올린 피치카토가 눈부신 햇살 아래 화려하게 부서지는 장터에서 플럼주스 마시며 앉아 있고 싶은데, 일행은 허둥지둥 돌아다니자고 한다.
가격 갖고 품질 갖고 떠들면서 이 느긋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은데......
오후에는 바로사 밸리라는 마을로 와이너리 구경을 갔다.
미식가로 산다는 걸 그리 미덕으로 여기지 않는 나로서는 굳이 혀를 델리케이트하게 만들고 싶진 않지만
삶에서 아트를 추구하고 사는 것도 멋지겠다는 또다른 작은 목소리 역시 내 것이기에 잠시 혼란에 빠진다.
나를 이 여행팀에 끼워준 셋째시누이 내외. 워낙 다정한 커플이라 언제 어디서든 영화 같은 분위기를...... ㅋㅋ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아들레이드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준비하려고 Fishermen's Wharf market(부두시장)엘 갔는데 시간이 너무 늦어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대신 화장실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만난 노인밴드. 노년이 추레하다고 누가 그랬나. 정말 멋진 옵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