苦中作樂 15 - 누드비치에서 생긴 일
다음 행선지인 포틀랜드까지는 600킬로도 넘는 길이라, 중간 지점에 있는 윌링가 비치에서 하룻밤 쉬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곳이 누드비치란다.
이 대목에서 귀가 번쩍 하실 분이 있으실지 모르겠지만, 호주에서 누드비치라고 하면 자연주의자들이 정부에 청원하여 지정받은 해변으로서
애용자들이 대부분 60~70년대 히피세대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라 연령대가 꽤 높다고 한다.
관습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은 우리들은 옷 입은 게 실례가 될까봐 갈 때는 차를 타고 윗길을 돌아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놀았다.
하지만 분위기를 파악해보니 그쪽은 물론 그렇고, 우리 역시 그리 민망해할 게재는 아닌 것 같아
돌아올 때는 지름길(그쪽 해변을 거치면 바로 숙소까지 걸어갈 수 있다)을 택해 태연하게 걸어돌아왔다.
가까이 보니 정말 99%가 중장년층, 그리 야릇할 것도 흥미로울 것도 없는 분위기였다.
등이 굽고 조글조글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너무나 시원하게도 바람과 파도를 즐기고 계시는 모습이 좀 낯설긴 하지만 살짝 귀엽기까지....ㅋㅋㅋ
정작 사단이 난 것은 해질 무렵이었다.
저녁 메뉴가 닭곰탕인데 닭이라면 냄새도 맡기 싫어서 샌드위치 하나 만들어가지고 혼자 해변 쪽으로 나왔다.
마침 해가 질 무렵이라 빛의 향연이 절정이었다.
사진찍기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발길은 일몰 찍기 좋은 누드비치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침 해변이 텅 비어 있길래 아무 거리낌도 없이 해변으로 가는 계단에 들어섰는데......
갑자기 계단참에 한 남자가 불쑥 나타나서 나를 불러세운다.
카메라를 내밀면서 자기 사진 한 장 찍어달라는데 헉, 나체였다. 게다가 사타구니 사이에 대들보처럼 우뚝 서 있는 것이 한 눈에 들어왔다.
아니, 조금 아까까지는 아무도 없었는데 어디서 나타난 거야? (그러고 보니 계단참에 샤워시설이 있었군)
이 상황을 어쩐다지? 무시하고 지나가면 간단한 것을...... 그만 타이밍을 놓쳤다.
어쩌면 호승심이 작용한 건지도 모르겠다. 성희롱에 놀라 달아나는 겁 많은 동양여자로 보이기 싫었달까. 사진 찍어주는 게 뭐 별거라고......
마치 어마어마한 물건을 자랑이라도 하듯 태양을 바라보고 가슴을 한껏 내밀며 폼 잡고 있는 양이 가소롭기도 하고....
셔터 몇 번 눌러주고 엣다 모르겠다, 내친김에 내 카메라로도 한 장 찍었다. 이건 돌아가서 여선생들에게 내놓을 전리품이야.
해변까지 거반 다 내려왔지만 벌거벗은 녀석이 배회하는데 텅 빈 해변으로 내려갈 순 없어서 궁시렁거리며 숙소 쪽으로 돌아올라가는데,
녀석이 계속 따라온다. 사진 찍는 거 좋아하냐, 내 사진 보여줄까, 여기 자주 오는데 빛은 지금부터 20분 정도 후가 가장 좋다, 예술사진이 어쩌고 저쩌고......
웃기는 건 여전히 벌거벗은 채,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고개 빳빳이 치켜든 녀석을 꺼덕꺼덕 흔들며 예술사진을 논하다니......(세상에, 저게 사람이냐 말이냐)
그림으로 보면 말도 안 되지만 얘기만으로는 말이 되는 얘기를 한다. (카메라도 전문가용이더라고..)
그렇다고 내가 벌거벗은 너에게 사진 강습을 받으랴?
계속 지껄이는 말 끊기도 쉽지 않고 갑자기 튀어 달아나기도 우습고, 그렇다고 내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따귀를? 내게 무슨 짓을 했다고....
끙끙대다 결국 가장 쉬운 말을 했다. 옷좀 입으라고, 불편하다고...ㅋㅋㅋ
녀석 하는 말, '불편할 게 뭐 있냐, 몸은 그저 몸일 뿐이다'.... 이거 너무 심하게 쿨해주시는 건지 뻔뻔한 건지.
어쨌든 나는 불편해서 이만 가봐야겠다고 잽싸게 언덕을 향해 뛰어올라갔다.
짜식 때문에 막 절정에 다다를 일몰을 못 보겠구나, 화도 나고 아쉽기도 해서 주차장 벤치에 잠시 앉아 있는데
어느새 간단하게 옷을 걸친 녀석이 함박웃음을 날리며 주차장 쪽으로 올라오더니 같이 저녁을 먹겠느냐고 묻네그려.
친구들 기다린다고, 그래도 그 와중에 도망가는 행색은 보이기 싫어서 손까지 흔들어주며 침착하게 도주. ^^
돌아와 여자일행들에게 사건의 전말을 얘기했다가, 간이 부었느냐, 미쳤느냐고 엄청 야단 맞았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