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허씨 일기 2 - 벼락치기 가이드
11월 2일
내가 움직인다는 소문이 어찌나 빠른지, 오랫동안 적조했던 친구에게서 기별이 왔다.
너와 함께 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거였다.
사느라고 바빠 어렵사리 빼가지고 온 2박3일이니 그녀의 소중한 휴가는 암만해도 내가 책임져야 할 터.
젖은 모래처럼 고요히 가라앉아보려던 계획이 초전박살나는구나. ㅋㅋㅋ
그래 좋다, 재작년에 제법 차근하게 일주일간 유람했던 밑천을 가지고... 마침 차도 있으니
제주가 낯선 친구에게 내 우정의 에센스만 딱딱 뽑아 보여주리라.
우선 아침밥 밥 먹기 전에 숙소와 바로 이웃한 돈내코 계곡의 원앙폭포 한번 들여다보고
이끼로 가득한 어두운 숲길이 마음에 들었지만 뒷날 천천히 즐길 요량으로 냄새만 맡고 돌아나와서
오늘은 서귀포 남쪽 해변을 돌아보기로 한다. 시동 걸고 네비 찍고......자, 본격적으로 달려보세!
쇠소깍 찍고 새섬 찍고 정방폭포 찍고 천지연 폭포 찍고 성게미역국으로 어느새 늦은 점심 먹고......
외돌개 찍고 찬란한 제주 바다를 굽어보며 올레 7코스 좀 걸어주시다가
쓸쓸한 강정마을 들러 씁쓸하게 한 대 꼬실러주시고 대포항 들러 주상절리 확인하고...... 그러는 와중에도 우리는 정말 해묵은 수다 보따리 풀기 바쁘다.
오랫동안 적조했지만 내 겁없던 시절의 초입에서 함께 첫발을 내딛었던 친구이자 단 두 명만 초대되었던 내 결혼식 하객 중의 한 명이기도 하다.
일일이 지난 안부를 묻지 않아도 서로의 정신적인 현주소를 짚을 수 있는 친구...... 정말 흔치 않은 소중한 친구임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고독한 바위는 고독할 수가 없다. 이 동네 너무 시끄러워,
허이구, 어째 그리 나랑 닮았냐. 내 사진이라고 우겨도 되겠구나야. ㅎㅎㅎ
11월 3일
오늘은 동쪽 해안.
성산으로 가는 길목 온평리 해변에서 물질 할 준비를 하는 해녀 아주머니들을 만났다.
오늘의 작업지시, 오분자기는 작은 것 잡지 말고 전복은 일체 잡지 말란다.
엔화가 자꾸 떨어지는 데 대한 걱정과 소라 값이 얼마 이하가 되면 잡지 말자는 의논도 오간다.
어찌나 똑소리나게 의견들을 개진하시는지 일제하 해녀들의 항일운동 현장을 보는 기분이었다.
이어 차가운 바다 속으로 주저없이 풍덩! 아, 진심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제주의 어머니들......
아들놈 대학 시험 끝나고 온가족이 제주도로 여행왔을 때 분명 와본 곳인데, 이름만 빼고 아무 기억도 남아 있지 않은 곳, 섭지코지.
넓은 평원과 억새가 인상적인 이곳에 중국인 관광객만 우글우글.
드라마 올인을 찍었다는 세트장이 달콤하우스로 바뀌었다.
며칠 후 뉴스를 보는데, 이 건물에 대해 상당 지분을 갖고 있는 정부기관과의 협의 없이 (주)올인하우스측이 달콤하게 리모델링해서 문제가 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어째 좀 쌩뚱맞더라니......
성산 일출봉도 2002년에 받았던 인상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일출을 보러 와서 엄청 떨었던 기억, 그리고 여기서 내 생애 처음 장만한 카메라를 잃어버렸지.
그때는 정상까지 낑낑 기어올라가 일출을 기다렸지만 오늘은 편한 계단을 두고도 쳐다만 보고 간다.
제주시에 사는 친구가 더운 점심 해놓고 기다리고 있으니......
오후 시간은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ㅋㅋㅋ 수다 떨고 장 보고.....
이틀밤 신세 졌다고 청국장에 계란에 두부에...... 꼭 자기 식구 먹일 장 보는 것처럼 골고루 챙겨서 안겨주는 친구.
제주 사는 애는 또 걔대로 마트에서 조금씩 사기 어려운 품목들을 세심하게 한 보따리 챙겨준다. 혼자 있을수록 잘 챙겨먹어야 한다는 당부와 함께...
원래 남은 사람이 떠나는 사람 챙겨주는 게 맞는데 어째 남은 사람이 집중적으로 챙김을 당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