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허씨 일기 6 - 812계단 물영아리
11월 10일
사려니 숲에 단풍이 들었다길래 서둘러 갔더니 단풍은 뭐......그냥 아련하다고 해두자. ^^
조용한 숲은 여전히 좋았다. 재작년에 입산통제되어 못 가본 물찻오름이 오늘의 목표였는데 올 여름부터 또다시 입산통제,
나랑은 인연이 아닌가보다.
왠지 조금은 아쉬운 마음을 채우려 발(타이어) 가는 대로 이리저리 달리다 보니 가시리 정석비행장 있는 길로 가고 있다.
이 길이 억새보다 코스모스로 유명한 길이라는데 코스모스는 벌써 왔다간 모양이다.
집으로 가려고 산록남로로 들어섰는데 물영아리오름 표지판이 눈에 들어오길래 차를 세웠다.
사려니숲길 왕복 10킬로를 걷긴 했지만 4킬로, 왕복 1시간 반이면 된다니 오늘의 대미를 여기서 장식해볼까나.
너 노루냐?
시작은 순조로웠다. 그런데......
계단이 시작되었다.
누군가 계단에 새겨놓은숫자가 300을 넘어섰을 때 발을 잘못들였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걸어올라온 공이 아까워 중간중간 쉬며 계속 올라갔다.
새긴 숫자가 500을 넘어섰을 때 눈앞이 캄캄해졌다. 오르기도 되돌아가기도 힘겨운 상황.
이를 악물고 끝까지 갔다. 연속 812계단, 왕복 1642계단......하지만 병든 내 무릎이 해내고 말았다.
위를 보지 않고 가끔 쉬어가는 전략이 이룬 쾌거!
뒷탈이 걱정되지만 후회는 없다.
경치는? 모른다. 숲은 좋았던 것 같은데 정신없이 올라가느라고 양 옆은 살피지 못했다.
812계단을 오르고 나니 분화구로 내려가는 계단이 또 나타났다.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계단의 끝은 습지였다.
물영아리오름. 오래도록 기억될 예쁘고도 무서운 이름. ㅋㅋㅋ
11월 11일
오늘은 주인집 아주머니 귤밭에 갔다.
지난번에 체험활동차 갔다가 서울에 몇 박스 올려보냈더니 반응이 좋아 몇 집 더 보내주려고......
오늘은 귀농 1년차이지만 귤밭은 처음이라는 아주머니 친구분 내외와 귀농하려고 집을 구하러온 서울 사는 내외분이 일손에 합류했다.
주인집 내외분은 어제 딴 것 포장해서 보내시느라 바쁘고 객들만 귤밭에서 가위질을 하는데
그래도 내가 한번 해봤다고 선배 노릇을 한다. ㅋㅋㅋ
두 시간쯤 따고 나니 주인아주머니가 고구마야 막걸리야 참을 내오시고 그때부터 귀농에 관한 얘기판이 벌어졌다.
집을 구하러오신 분은 아마 아저씨가 서울 왔다갔다 하실 텐데 혼자 지내기 무섭다고 두 채 중 한 채를 나더러 빌려 쓰란다.
하하, 이러다 정말 제주도민 되는 거 아냐?
주인 내외분이 정색을 하고 꼬이신다. 안 될 거 뭐 있냐고, 봄에는 고사리 꺾고 여름에는 낙지 잡고 소라 따고 겨울에는 귤 따고,
더군다나 중국어를 할 줄 알면 제주도에서 할 일 많다고......
주인집 내외는 귀농 5년차.
아주머니가 루프스병이라 서울 살 때는 시름시름 앓기만 했는데
물 맑고 공기 좋은 데서 힘 닿는 데까지 부지런히 움직이다 보니 지금은 아주 건강해졌다고 하신다.
귀농 1년차 아주머니도 텃밭 가꾸는 사이사이로 전에 배워둔 제빵기술로 빵을 구워 내다팔기도 하면서 너무 재밌게 지내신다고 한몫 거드신다.
놀러 내려온 사람은 1년을 못 버티고 올라가지만 소일거리 삼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다 보면 천국이 따로 없다나.
분위기에 휩쓸려, 세를 내놓겠다는 집을 일단 구경가기로는 했다.
집을 얻는다고 해봐야 겨우 1년, '제주에서 살아보기'일 뿐인데 왠지 마음이 제주에 정착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처럼 묵직해지니 참 나답지 않구나.
서울을 떠나면 안 되는 이유가 없어졌으니, 게다가 '제2의 인생'을 운위할 나이가 되어서 공연히 심각해지는 건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