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허씨 일기 9 - 일상여행
11월 14일
날도 흐리퉁탱하고 바람도 사납다.
이런 날은 오름에 올라도 전망이 별로일 것이고 바닷물 색도 곱지 않을 테고.....
밀린 일기도 쓸 겸, 연 며칠 오르기를 계속하여 뻑뻑한 다리도 쉬어줄 겸...... 오늘 여행의 목적지는 방콕.
하지만 세상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침대에 폭 파묻혀 들고온 책 다 끝내고 늦은 점심을 먹는데 집 주인 아주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죽하면 언니에게 전화했겠어요, 하며 무조건 와달란다.
사연인즉슨, 자기가 가끔 가서 돌봐주는 암 투병중인 후배가 있는데 서울에서 치료받고 어젯밤에 내려왔단다.
이번엔 입원기간이 길어 집을 오래 비웠는데 남편 혼자 간수한 집안이 너무 엉망진창이라 함께 내려온 여동생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SOS를 쳤단다.
헌데 어제부터 자기도 두통이 너무 심해 병원까지 다녀온 끝이라 도저히 못 도와주겠다고, 일당을 지불할 터이니 나더러 대신 가봐달라는 것이다.
헉, 이런 황당이!
놀러온 사람더러 파출부 알바를 하라고? 뭐라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웃기만 하고 있는데
형편이 너무 딱해서 그런다고 막무가내로 조르던 아주머니, 자기도 갈 테니 와서 조금만 도와달라고 거의 애원이다.
자기가 못 도와주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내가 얼마나 백조건달같이 보였으면......
그런데 계속 얘기를 듣다가 듣다가, 결국 이 물탱이,,, 넘어가고 말았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위미라는 동네에 지어진 그림 같은 집.
아주머니는 벌써 와서 냉장고를 털기 시작했다. 일하는 솜씨가 보통은 넘는다.
내 집안 일도 견딜 수 없을 지경까지 몰았다 하는, 시간이 남아돌아도 집안일에 투자할 시간이 아깝다고 여기는 이 게으름뱅이 장여사도
억지춘향, 고무장갑 끼고 행주를 빨아대기 시작한다. ㅋㅋㅋ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사실 뭐 일이라고 별 건 없었다. 엉터리라도 주부생활 삼십 년 경력인데...... 두 시간 만에 끝내줬다.
일이 끝나니 장에 갔던 여동생이 돌아와 이 두 아주머니 모두에게 일당을 챙겨준다. 그게 뭐 일이라고...... 아무리 손사래를 쳐도 소용없다.
사실 날 부른 건, 주말에는 돌아가야 하는 여동생이 이 환자를 하루 몇 시간만이라도 돌봐줄 사람을 구하고 있어서였던 것 같다.
점심 때 잠깐 와서 식사시중도 들고 부축해서 좀 걸려주고 간단한 집안일을 처리해주는, 요양보호사 같은 일이다.
친정 식구들이 다 외국에 있고, 남편은 바쁘고 출장도 많고...... 몸도 잘 못 가누는 환자를 도저히 혼자 둘 수가 없다고
돈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봉사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느냔다. 아주머니는 감귤 철이라 눈코뜰 새 없으니 돌아가는 날까지만이라도 좀 도와달란다.
하면 못할 꺼야 없지만 왜 하필 나냐고......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병간호는 이제 안 할 꺼라고......
환자는 재발에 전이에, 이미 복수까지 찬 상태라는데, 가슴은 아프지만 더 가슴 아프긴 싫다고.
하지만 마음 약한 장여사, 그 자리에서는 딱 부러지게 말도 못하고 결국 돌아와서야 전화로 거절. ㅠ.ㅠ
나 아니라도 나보다 더 좋은 분 만나실 꺼예요. 부디 좋아지시길 바랄께요.
11월 15일
며칠 전 귤밭에서 만난, 집 구하러 온 아주머니 집을 보러 갔다.
이 집의 소유자는 내가 묵고 있는 숙소의 주인인데 이 아주머니에게 두 동짜리 집을 년세로 내어준 것이고
남편이 현직이라 서울로 왔다갔다 해야 하니 아주머니가 혼자 지내기 무섭다고 두 동 중 창고로 쓰던 건물을 수리하여 한 집을 들이겠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이 소식이 필요할 만한 후배에게 전하니 딱 좋다고, 같이 살자고 반색이다.
둘이 산다면 서울에서 아파트 관리비 내는 정도만 내도 되겠다 싶어 나도 급솔깃.
텃밭도 있고 귤밭도 있으니 흙을 만지며 사는 걸 내가 과연 좋아하는지 어떤지 알아볼 기회도 되겠다. 1년이라는데 뭐......
위치도 좋다. 구하려고 해도 물건이 없다는 아름다운 관광지 논짓물 근처, 버스도 들어오는데다 양지바르고 오목한 동네 한가운데.
귤나무와 돌담으로 둘러쳐진 울타리 안에 세 동이 있는데 나더러 들어오라고 하는 집은 왼쪽 한구석에 있는 검은지붕 집이다.
이 울타리 안에서 가장 크고 번듯한 이 집은 현재 한 가구가 살고 있다.
신구간에 이사를 나가면 근사하게 리모델링을 한다고 한다. 판다고만 하면 이 집을 사고 싶네.
내게 들어오라고 하는 집은 현재 수리중이다.
방 두 개, 부엌, 욕실이 일자로 붙어 있고 화장실은 촌집답게 뒷뜰에 있다.
난방이라고는 온수매트뿐이지만 천장이 낮고 해가 잘 들어 그리 추울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정 추운 날엔 전기난로로 잠깐 데우면 되겠지. 기름값 안 들어서 오히려 좋을 수도......
현재 마당에는 쇄석을 깔고 있다.
내게 집을 빌려줄 새끼주인 아주머니 집은 우리에게 빌려주겠다는 집에 비하면 저택이다.
주방도 욕실도 모두 실내이고 방이 네 개에 거실까지 있다.
차라리 이 울안의 집을 몽땅 사서 두 동은 민박을 치고......
내 맘대로 집을 막 세웠다 부쉈다 해본다. ㅋㅋㅋ
후배더러 나 있는 동안 놀겸 볼겸 한번 내려오라고 기별해뒀다.
11월 16일
여전히 어두운 일요일. 오랜만에 TV를 켰다.
TV 동물농장을 비롯하여 몰아뒀던 수퍼스타 K 재방송, 일요시네마, 수퍼맨이 돌아왔다, 1박2일까지 하염없이 보고 있자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서울에서는 그렇게 일요일을 보냈던가? 새삼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