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허씨 일기 15 - 뒤풀이
전셋집 예약으로 제주허씨 제주 한 달 체류 시리즈를 끝내려고 했는데
정식 계약날까지 며칠 남아 있다 보니 깨알같은 사건사고가 또 튀어나온다.
뒷날 기억하려고 적어두는 입도 26일째의 스토리.
때이른 살림장만
월요일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수요일 아침까지 그치지 않는다. 그 상냥하던 하늘이 잿물처럼 고약한 낯빛을 하고 있다.
오, 제주에서 산다면 이런 울적한 비요일에 대한 대책을 충분히 세워놔야겠는걸!
미친 비바람 안 맞으려고 칩거한 지 사흘째, 우산 쓰고라도 좀 거닐어야겠다 하는데 하늘이 갑자기 말짱하게 갠다.
사실 어제부터 계약한 집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었다.
부동산이 제주시에 사무실을 두고 있으니 계약한 뒤 다시 와서 뭔가를 살피기에는 배 시간까지 너무 다급하고
아무래도 지금 살고 있는 분을 만나 그 집 사용설명을 듣고 공과금 등등도 미리 처리해놓는 게 좋겠다 싶어 애월읍으로 달려가는데......
우와~~~ 구름의 공습!!
하늘이 넓게 열려 있으니 날씨에 따라 변화무쌍한 구름의 모습을 정말 실컷 감상할 수 있다.
내가 여행 다니면서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지우느라 애를 먹는 게 바로 구름과 길 사진이다.
찍어봐야 똑같은데도 거의 미쳐서 찍고 또 찍고....
역시 왠지 모르게 자꾸 땡기더라니.....40킬로가 넘는 길을 멀다 않고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마침 개스를 철거하려고 하는 찰나였다.
철거하지 말고 제게 파시라고 꼬드겨 개스순간온수기와 개스레인지, 개스가 가득 담겨있는 통까지 적당한 값에 구입 성공.
개스레인지와 개스통은 어차피 사야 하는 것이고 순간온수기는 생각 못한 아이템이었으나 비싼 기름값보다 저렴하게 쓸 수 있을 테니
2년이면 본전은 빼고도 남는다. 나갈 때 팔아도 되는 것이고...... 설치하고 철거하는 번거로움도 줄일 수 있지만 그보다도
기름보일러와 온수꼭지를 연결하는 공사를 안 해도 되니 (그건 정말 생각도 안 해봤던 번거로움이다) 역시 발품이 최고다.
밭에 심어둔 건 두고 가신다고 뽑아먹으라는데 무와 배추 말고는 뭐가 먹는 거고 뭐가 잡초인지 알 수가 없네.
마침 근처에 사는 언니 되시는 분이(70세는 넘어 보이신다) 자주 와서 일도 가르쳐주고 대신 여기 채소 뽑아먹겠다고 하신다. 아유 그럼요 얼마든지......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바닷가 산책로. 곽지곽물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3킬로미터 길이다.
멀리 어느 오름인가 너머 한라산까지 보인다.
곽지과물해수욕장이 코앞에 있으니 여름에 해수욕하고 싶은 손님을 데려갈 수 있겠다.
그리고 올레길과는 별도로 개척된 곽금8경 걷는길 약도도 기대를 갖게 한다.
공포의 뒷풀이
돌아오는 길에 한번쯤 들러봐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산방산 탄산온천에 들렀다.
시설은 같은 가격대의 서울 용산 드래곤힐 보다 나을 건 없는데 확실히 물은 좋다. 노천탕에서 밤드리 노닐다가 돌아오는데......
확실히 내가 뭐에 홀렸던 것 같다. 대유랜드쪽으로 해서 1115도로를 거쳐 산록남로에 들어오긴 했는데
제주국제대학 근처 로터리에서 그만 방향을......
경로에서 이탈한 것을 알았을 때 차머리를 돌렸어야 했다.
하지만 돌아가기 싫어하는 나는 6.5킬로 전방에서 우회전 표시를 보여주는 네비 말만 믿고 계속 올라간다.
공교롭게도 지금은 기름통에 빨간 불이 들어온 상태. 계기는 75킬로 남았다고 하는데 집까지는 20킬로라니 좀 돌더라도 갈 수는 있을 꺼야.
하지만 6.5킬로 전방 우회전 지점에는 길이 없었다. 네비는 9킬로 전방에 또 우회전 길이 있다고 알려준다.
이걸 어째, 또 한번 믿고 keep going......(고집에는 약도 없다)
오, 길 입구가 보이긴 한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갈 수 있는 길 같지는 않다. 이걸 어쩌니, 환한 길 나올 때까지 또 가야지.
서귀포 자연휴양림을 지나고 영실을 지나고.... 이제 1100고지를 향해 올라간다.
길은 꼬부랑꼬부랑 아리랑 고개. 조금도 쉬어주지 않는 오르막길. 아무래도 산록남로로 빠지는 길은 없어보인다.
내가 사전에 지도를 봐놨으면, 노란 중앙선이 그어진 왕복 2차선길이라 해도 일찌감치 차를 돌렸을 텐데......(오가는 차량도 한 대 없는데말야)
1100고지 전망대 주차장에 도착해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제 기름통은 53킬로 남았다고 알려준다. 아직은 괜찮아. 돌아갈 수 있다!
전망대 주차장에 차가 한 대 세워져 있는데 희한하게도 차량 옆에 한 사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뭐하는 양반이지? 이 깊은 숲속, 노루도 잠이 들 깊은 어둠 속에서......
속은 쓰리지만 돌아내려가는 길. 급한 내리막, 액셀 안 밟아도 되는 길이니 핸들만 이리저리 돌리는데 머리는 빈 기름통 걱정으로 가득하다.
결국 경로에서 이탈했던 로터리까지 내려와 한숨 돌리고는 주변검색으로 주유소를 찾아보는데......
정상경로는 11킬로 지점인데 거리상으로 4킬로 되는 코스가 뜬다. 운행가능한 거리를 알려주는 계기판은 이미 꺼진 상태.
마음이 급하여 4킬로 코스를 찍고 어두운 숲길로 들어선다. 일방통행이긴 하지만 콘크리트 임도이니 얼마 가다가 큰길로 연결되겠지.
그.런.데.
3킬로 지점에서 전방에 물웅덩이가 나타난다. 산넘어 산이로군.
웅덩이 상태를 보려고 차 밖으로 나오니 사방은 인적은커녕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마구 엉클어진 검은 숲 속이다.
그 와중에도 공기는 어찌나 단지. 검은 하늘에 그믐달이 또렷하다.
이럴 때~ 당황하지 않고~~ 차를 돌려~~~
초조한 마음을 억눌러가며 원점으로 복귀한다. 지름길 좋아하다 프로미 서비스 부르게 생겼다. ㅋㅋ
우여곡절 끝에 주유소에 도착, 기름 꽉꽉 눌러담아달라고 하고서야 한숨 돌렸다.
제주허씨 공연히 배짱 자랑 하다가 체류 뒷풀이 한번 거하게 했다. ㅎㅎㅎ
내일 드디어 제주허씨, 제주 체류 28일의 막을 내리며 목포행 밤배를 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