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세팅 1 - 기상!
제주에 와서 좋아진 걸 꼽으라면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게 '수면의 질'이다.
우리 나이의 대부분이 늙어가면서 호소하는 불편함 중 하나가 불면증일 것이다.
초저녁에 막 졸음이 쏟아질 때를 넘겨버리면 밤새 공연한 잡념에 시달리다가 새벽녘에서야 잠들고, 늦게 일어나서는 기분 나쁘고......
(친구들 만났을 때 이 화제에 집착하는 애들이 넷 중 하나는 된다. ㅎㅎㅎ)
더군다나 내 경우는 서쪽으로 한 달 넘게 여행을 다니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생체리듬이 완전히 깨져버려 새벽까지 말똥말똥,
겨우 잠이 들어도 깊이 못 자다가 낮에 비실거리기 일쑤고 그래서 푹 자지 못했다는 생각이 불면증 자체보다 더 큰 스트레스였는데 ^^
제주에 온 뒤로는 중간에 한 번도 안 깨고 정말 푹 잔다. 꿈도 없이 잔다. (한 달간 머물렀던 11월에도 그랬다)
시간대는 약간 뒤로 이동을 했다. 내가 즐겨보는 TV프로가 거의 11시대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ㅎㅎ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정 넘어까지 TV 앞에 앉아 있는 게 마음 편치 않았다.
잘 시간 넘기면 엄습해올 불면증 스트레스도 있고 아마 오랜 세월 몸에 밴 '아침형 인간 컴플렉스'도 조금은 작용을 했을 거고...
하지만 백조 생활 좋은 게 뭐냐, 새벽에 잠들면 대낮까지 자면 되지, 배짱을 내밀었더니 새로운 생체리듬이 저절로 생겨나
자정 넘으면 졸립고 겨울 해 뜰 무렵이면 몸이 저절로 깨어나는거다. (시간대가 보통 사람들과 크게 엇나가지 않아 다행이다. ^^)
게다가 낮잠도 필요없이 종일 신선한 컨디션!
촌에 산다고 새벽에 일어나 밭 갈란 법 있나. 제주에 산다고 일출 보며 산책 하란 법 있나.
내 몸이 원하는 '7시간 수면'의 축복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제주섬에 들어온 보람을 말하고 싶으니 나 정말 단순해졌나보다. ㅎㅎ
숙면의 일등공신은 아마도 맑은 공기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아파트 생활보다 아무래도 움직임이 많아진 점?(본격 운동이나 밭일은 아직 시작 전이다)
하나 더 꼽자면 무시무시한 기름값 아끼려고 둥게둥게 싸들고 온 푹신한 솜이불과 전기장판.
침대를 사용하면서 장농 구석 신세가 된 시누이네 솜이불을 얻어올 때만 해도 혹시 이 묵직한 녀석들이 애물단지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사온 첫날, 한 달 넘게 비운 냉골에 까는 순간 내가 보물단지를 업어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특히 요즘 이부자리 시장에서는 희귀아이템이 된 요....
게다가 요 아래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질색하는) 전자파 발생기까지 깔아놓으니 찜질방이 따로 없다. 어찌 푹 자지 않을 수 있으리.
제주는 겨울 밤이라 해도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가 드물긴 하다. 하지만 알려진 대로 정말 바람이......
밤에 창문을 뒤흔드는 바람소리를 듣고 있자면 마치 적군에 둘러싸인 요새에 꽁꽁 숨어 있는 기분이다.
요즘 제주에 내려와 있다는 여행작가 변종모의 페이스북에 이런 멘션이 올라왔다.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앓아누웠다.
꼼짝 않고 집 안에서 나만 생각한다
창 너머 동백나무가 심하게 흔들려도 나는 안전하다.
갇혀 있는 모든 것은 안전하지만 나약하다'
나도 자려고 누으면 똑같은 생각을 한다.
하지만 머지 않아 숙면. 그리고 부르지 않아도 어김없이 찾아와 나의 창을 밝혀주는 아침햇살!
나도 멘델스존의 사중주 종달새나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 같은 걸 크게 틀어 화답하며 단순한 하루의 시동을 건다.
갇혀 있는 모든 것은 나약하지만 안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