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유럽

먼 길 떠나기 전에.... 장광설

張萬玉 2017. 5. 2. 17:33

새천년 무렵부터 세계일주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원래 낯선 곳을 동경하고 모험을 즐기는 편이긴 했지만 전형적인 정착민의 삶을 살고 있던 내가 그 꿈을 실행에 옮기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은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참 대단한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중국에 살 때였다. 일주일 이상의 삼대 법정휴가(춘절, 노동절, 국경절)를 보내기 위한 가족여행을 기획하면서 내게 여행가의 유전자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는데,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내 동갑내기 한비야의 여행기와 5불생활자까페(세계일주를 하고 있거나 계획하고 있는 저예산 배낭여행자들의 동호회)가 이런 자신감에 불을 질렀다. 해외주재원이었던 남편을 따라 상하이로 이사하면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본 게 해외여행의 전부였지만, 시간과 경비만 확보한다면 안 될 것도 없지. 당장은 어렵지만 여건을 만들어보자고 마음먹고 당시 일하던 직장에서 받은 달러를 몽땅 저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8년....

그 사이에 아이는 대학 진학을 했고 남편은 본사로 복귀하면서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너무 빠른 은퇴자가 되었다. 내 나이 52세, 무엇을 새로 시작하기도 어정쩡해져버린 내 등을 떠밀어준 것은 남편이었다.

당시 348만원에 나와 있던 one world ticket(1년 안에 세계일주를 하는 조건으로 거리와 상관없이 20회의 비행을 할 수 있는 항공권)을 들여다보며 눈만 뜨면 ‘항공 구간, 육로구간’ 루트를 짜고 있던 내게(사실 나는 그저 ‘계획놀이’를 하고 있었던 건데...ㅎ) “한번 나가 1년씩 집을 비우는 건 좀 그렇고, 세계일주 구간을 몇 개로 나누어 매년 석 달 이내로 다녀오면 어떻겠느냐”고 권한 것이다. 모든 조건이 무르익었으니 떠날 일만 남았네.


그렇게 시작한 것이 2008년의 멕시코 - 과테말라 - 니카라과 - 파나마 - 페루 - 볼리비아 - 아르헨티나 - 콜롬비아 - 쿠바 - 멕시코로 이어진 석 달 여행. 2009년 태국 - 미얀마 - 캄보디아 - 베트남 - 라오스 - 태국 - 타이완으로 일주한 두 달 반의 여행. 2010년 이탈리아 - 프랑스 - 포르투갈 - 스페인 - 모로코 -스위스 - 오스트리아 - 체코 - 헝가리 - 독일 - 네덜란드 - 벨기에 - 영국으로 돌아온 두 달 반의 여행이었다. 1년의 1/3을 준비하고 1/3을 여행하고 1/3을 review하는 데 바친, 그야말로 여행에 혼을 내어준 3년이었다. 그만큼 여행은 나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고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주었다.

그러나......

배낭여행 시계는 거기서 멈추었다. 그 사이에 나는 홀로가 되었고 만사가 의미를 잃어버린 무기력한 상태와 싸우기 위해 습관적으로 여행길에 올랐다. 달라진 게 있다면 혼자의 상태가 견딜 수 없어 ‘배낭 친구들’에 의지했던 것.

배낭전문여행사 단체여행팀에 끼어 대략 3주 일정으로 돌아다녔다. 이란, 남인도 및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지인의 멤버십에 끼어들었던 호주 자동차 일주, 피지섬 한달 살기.... 동행이 여의치 않아 북유럽 일주 패키지와 일본 알프스 패키지까지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외롭고 무의미하고 타성에 젖은, 떠나는 즉시 마음 한켠에서는 돌아가버리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했던 이상한 여행길.

그러다 다시 ‘내 발로 걷는 여행’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난 것은 단체배낭으로 떠난 아프리카 종단여행 마지막 구간에서 개별적으로 에티오피아로 빠지면서였던 것 같다. 이제 그만 떠돌고 어딘가 마음 내려놓을 곳을 찾아야겠다는 현실적인 판단에 밀려나기는 했지만 꿈은 현실보다 힘이 센 모양이다. 제주로 이주하여 내 둥지를 틀고 나니, 미진하게 끝나버린 내 인생 프로젝트를 복원해보자는 미련한 미련이 다시 나를 충동질한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동기는 매우 다양하다. 틀에 박힌 일상, 혹은 자신을 옥죄는 삶의 여건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떠나는 이는 유목민처럼 떠돌기를 원하지만, 이미 많은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나의 경우는 ‘살아있음’을 스스로에게 입증하는, 삶에 대한 열정을 일떠세우는 풀무질이 될 것이다.

내가 계획하고 내 마음의 속도에 따라 걸어본 지 7년 만이다. 어느새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다리 힘은 예전 같지 않지만 내 마음의 근육은 훨씬 단단해졌다. 이 근육을 유지하려면 좀 움직여줘야 할 것 같다.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장담은 못하지만 최소한 70세까지는 매년 한두 달 정도 ‘나만의 여행’을 이어가려고 한다. 타성에 젖어 편한 길로 다니며 다른 사람들의 삶을 ‘구경’이나 하다 돌아올 가능성이 높지만 아무래도 좋다. 낯선 거리와 낯선 사람들 속에 자리잡고 낯선 것들과 사귀며 얻는 다채로운 깨달음을 지레 포기하고 싶지는 않기에...... 다시 용기를 내어본다.


이번 여행은 터키와 인근의 그리스. 예전 여행길에서 루트 등의 이유로 빼놨던 곳이다.

이스탄불에서 동쪽으로 진행해서 도우베야짓까지 갔다가 중부와 남부를 거쳐 쿠사다스에서 배편으로 그리스에 들어간다. 그리스 구간은 거의 ‘관광’ 쪽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지만 경유도시를 최대한 줄이고 크레타섬 시골마을에 다만 며칠이라도 머무를 생각이다. 길 위에서의 여러 변수에 몸을 맡겨보려고 이스탄불 왕복 비행기표와 첫날 묵을 숙소, 크레테~아테네 간 국내선 항공권만 예약해두었다. 선거날 밤에 출발하여 6월 28일에 돌아오는 50여일의 일정이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레임에 팔 다리에 솟는 힘! 이 맛에 떠난다.


가끔 안부 전할께요~ 부럽다는 말보다는 응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