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5 - 크레타 1
혼자 장기여행을 떠나면 첫 도착지 숙소 외엔 예약하지 않는다.
어디어디서 며칠쯤 묵겠다는 윤곽이야 갖고 떠나지만 여행지와의 인연이란 게 알 수 없어서 예약에 맞춰가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즐겨 쓰는 건 일단 도착해서 삐끼에게 잡혀주는 방법이다. 삐끼들 몇몇과 천천히 흥정을 하다 보면 그 동네 숙소 적정가격도 알게 되고 더 편한 건 숙소까지 데려다준다는 점. 단 조급한 마음으로 덤빌 경우 에러가 날 수 있다.
하지만 삐끼가 안 나오는 동네는?
가이드북은 대중교통으로 닿을 수 있는 트레블러급 숙소가 많은 동네 숙소들을 주로 소개한다. 직접 눈으로 보고 가격을 흥정할 수 있고 돌아볼 곳들로 가는 교통이 편리하다는 장점도 있지만 세계 어딜 가나 뻔한 여행자 거리에 묶여버릴 가능성이 높다는 게 흠.
그런데 후배가 합류하면서 나의 이 타성적인 방법들이 수정을 요구받게 되었다.
혼잣몸이 아니니 '아무데서'나 잘 순 없는데... 성수기를 맞은 이 세계적 휴양지의 방값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다는 점을, 다음 정거장 숙소를 웹사이트에서 미리 뒤져보는 바지런한 후배가 지적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예약시스템은 약간의 문제점과 그보다 더 큰 장점을 경험하게 해주었다.(어쩌면 그리스 섬마을의 특징일 수도 있다.)
우선 장점은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민박이라 한갓지고 때로는 작은 정원이나 풀장을 누릴 수 있고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다는 점, 그 때문에 가격이 저렴하고 프로모션 반값세일도 자주 한다는 점. 반면 장점의 이면은 바로 단점이 되는데 장거리 버스나 배가 도착하는 시내 중심과 멀리 떨어져 있어 캐리어를 질질 끌며 엄청나게 걷거나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예전에 내가 도미토리를 전전하던 시절에 가끔 이용하던 호스텔즈닷컴의 경우 시내 중심에서 숙소까지 거리는 얼마나 되며 대중교통으로 어떻게 도착하는지를 잘 설명해주어 몇 자 메모해서 들고다니면 큰 문제 없이 산넘고 물건너 잘 도착했는데 요즘의 부킹사이트들은 구글맵을 턱 던져놓고 끝.
집에서라면야 맵 화면을 인쇄해서 들고나왔겠지만 (와이파이만 사용하겠다고 데이터를 막아놓은 채) 주소와 지도에 나타난 거리 이름만 메모해가지고 길 찾겠다고 덤비니... 이 땡볕에 더위먹기 십상이다. 그런 무모한 시도는 결국 택시를 타는 것으로 끝난다. 싼 숙소 찾았다고 좋아해봐야 거기서 거기다. 그러나....
산토리니에서 시작된 '예약 민박집 찾아가기' 소동은 이라클리온을 거치며 '남산에서 김서방 찾기' 확률을 높여갔고 하니아에 이르러서는 민박집과의 비싼 '국제전화' (장기여행이라 로밍도 안 해놨다) 한 통도 쓰지 않고 택시의 도움도 없이 해냈다! (무책임한 동네아주머니의 불필요한 친절 때문에 헛걸음은 좀 했지만...ㅎㅎㅎ) 그렇게 찾아낸 숙소들은 저렴한 가격과 함께 현지 생활인들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즐거움을 안겨주었으니, 산토리니 섬 메사리아 마을의 카발라리스, 크레타 섬 이라클리온 시 아무다라 마을의 살로스트로스, 하니아 시 칼라마키 마을의 알렉산드라... 찾아내느라 이동하느라 고생은 좀 했지만, 여행길 고생은 사서도 하는 세상공부임을 믿는 우리에게 큰 즐거움으로 되갚아준 고마운 숙소들이었다.
매일 소주보다 살짝 약한 그리스 전통주 라끼 한 잔씩 돌리시는 나랑 동갑내기 주인아주머니. ㅎ
우리도 질세라 매일 밤 숙소에서 와인 한 병씩.... ㅎ
이게 수학공식이냐 포도주 라벨이냐.... 온 사방 글씨가 수학공식 투성이지만 기본적으로 영어가 되는 곳이라 까막눈의 설움은 면함.
<크노소스 궁전 유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