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1 - 시라쿠사 가는 길
20181214
한 달로 예정한 몰타 체류기간중에 바닷길로 100킬로밖에 안 떨어진 시칠리아섬에 다녀오는 계획도 포함시켜놨는데, 아무래도 성탄과 신년이 끼면 이것저것 비싸질 것 같아서 일단 포짤로 가는 배를 예약했구만...버스로 45분 잡았던 버스길이 두 시간으로 늘어나는 바람에 그만 배를 놓치고 말았다.
믿을 수 없지만 어째볼 수도 없다는 몰타 교통지옥에게 호되게 당하고 어질어질하고 있는데 공짜로 내일 표로 바꿔준단다.
역시 믿을 수 없는 친절. 참 이상하고 아름다운 몰타.
새벽 다섯 시 배니까 네 시까지 오라는데 도저히 그 멀고 먼 부지바로 갔다 다시 온다는 것도 엄두가 안 나고, 대합실에서 개겨볼까 해도 아무도 없는 대합실을 혼자 지킨다는 것도 엄두가 안 나고.....결국 가장 가까이 있는 숙박시설을 찾다 보니 발레타까지 왔다. 사전정보 없이 돌아다니려니 팔자에 없는 50유로짜리 호텔에 짐을 풀고 차로 불과 10분 거리에 있는 페리선착장행 택시를 25유로나 주고 불러놨다. 어이가 없다.
그 와중에 발레타 야경 본다고 씽씽 돌아다니고 있는 나, 비정상인가효? http://blog.daum.net/corrymagic/13755261
새벽 세 시에 일어나 서두르느라고 빈 속이 요동을 치는데 어째 이 동네엔 음식점은커녕 가게도 하나 없나,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는데 비가림할 데도 없어 달달 떨며 이 난국을 어찌 헤쳐나갈까 궁리하고 있을 때...
시커먼 애 하나가 터덜터덜 발을 끌며 텅 빈 기차역으로 들어오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굶어죽지 않으려고 고향 말리를 떠난 지 4년, 알제리 리비아 프랑스 등지를 떠돌며 겨우 목숨만 부지하다가 어렵게 이탈리아 비자를 얻어 시라쿠사에 정착했으나 문제는 일자리.... 워킹비자를 갖게 됐지만 일자리가 없어 몰타로 건너가 불법노동을 하다 단속에 걸려서 엊저녁 배를 탔단다.
나도 배를 놓치지 않고 어젯밤에 도착했다면 이 불안한 교통편 때문에 이 마을에서 자게 되지 않았을까 싶어, 이 마을에 호스텔이 있더냐, 어디서 잤느냐고 물으니 세상에... 남의집 처마 밑에서 비에 젖어가며 날밤을 깠다네.
요 며칠 단속 피해다니는 사람들 얘기를 끊임없이 들어온 끝이라 남의 일 같지 않기에 레모나라도 꺼내 나눠먹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 반이 훌쩍 지나갔다.
기차에 올라 (역무원이 없으니) 차비를 내는데 아니, 얘가 차비가 없다네. 그 얘기를 듣자마자 승무원 아저씨가 사납게 등을 떠밀며 당장 내리라고 호통을 친다. 비 맞아가며 두 시간 가까이 기다렸는데 이렇게 밀려나면 어쩌라고!
동지애가 발동해 울컥 화가 나고 슬프기도 하고... 대신 차비를 내주면서 죄없는 승무원 아저씨를 막 미워했다. 아,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어찌 이런 대접을 무시로 받고 살아야 하는지. 헌데 막상 얘는 오늘 럭키하다고 싱글벙글, 비관은커녕 가는 내내 휴대폰 게임에 빠져 있다. 그래, 산 목숨인데 어떻게 비관만 하고 살겠니. 뭐라도 해야지. 이 가난한 마을에서도 오늘이 산타 루치아 축일이라고 아침부터 축포를 쏘아대는데.
시칠리아 도착지점을 포쫄라로 잡은 게 잘못인 줄 알았다.
배에서 내리면 시라쿠사로 가는 합승택시가 많다는 말만 믿고 관광지로 직접 가는 루트보다는 난민 배들이 많이 온다는 항구를 거쳐보자 했던 건데, 물론 난민들을 실은 배가 날마다 오는 것도 아닌 데다가 하선한 사람들을 기다리는 건 카타니아 가는 전세차량뿐 대중교통은 전무하네. 택시 대절은 65유로, 혼자 독박 쓰기 싫어서 (대책도 없으면서) 고개를 쌩 돌리니 기차 역까지 데려다줄 테니 기차 타고 가란다.
오잉, 기차? 더 좋지, 새로운 교통수단이잖아!
그런데 기차역이라고 가보니 폐허에 가까운 간이역, 근무하는 사람도 없고 시간표만 붙어 있다. 현재 시각 7시 40분인데 기차는 9시에 온단다. 딱 여기까지가 포쫄라를 선택한 것이 잘못인 줄 알았던 이유....
그렇게 도착한 시라쿠사는 쇠락하고 무기력해 보였다.
오죽하면 어렵사리 이탈리아 취업비자를 얻고도 일자리가 없어서 불법체류할 수밖에 없는 몰타로 건너갔을까.
놀라운 게, 시라쿠사 내의 버스는 모두 무료다. 모두가 기본 복지를 필요로 할 만큼 사정이 어려운가보다.
18유로짜리 숙소도 텅 빈 거리도 후줄근하기가 짝이 없었고 나도 공연히 후줄근해져서 레스토랑 찾아다닐 기분이 아니었다.
배가 찢어지게 고팠지만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수퍼에서 6유로에 두 끼꺼리 장만해가지고 벤치에 나앉아 있는데...
갑자기 10여년 전 눈에 힘주고 다니며 가난한 배낭여행자를 자처하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엄습해온다.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까, 포쫄라로 들어오길 잘했다는 이 반전의 심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