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가는 길(~2014)/재미·취미(펌 글)
[스크랩] 사랑의 변증법
張萬玉
2005. 3. 26. 10:18
인간관계에 있어서 서로 알고 지내는 기간이 오래되다 보면 서로에 대한 호기심이나 기대, 경탄 등이 반감되고 또 나를 상대방에게 알리고 보여주고 싶은 생각도 이완되기 쉬운 것이 보통이다.
이런 현상은 특히 부부나 연인관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어떤 연구 결과에 의하면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이 지속되는 생리학적 기간은 30개월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설명으로는 서로 간절히 보고 싶어하는 것, 사랑을 확인하기 위하여 애태우는 것 자체가 심리적으로 대단히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서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일종의 마취호르몬이 분비되고 그 작용에 의해 결국 감정이 냉각되는 기간이 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과학적인 근거를 가진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단적으로 이런 과학의 무식함을 경멸하는 편이다.
그것이 근거없는 이야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 과학적 설명에는 고민이 없고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다. 그래서 출구가 없다.
마취호르몬의 작용이 입증되었다면 어쩔 것인가? 체념을 하란 말인가? 아니면 기왕의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하여 항마취호르몬제제라도 투여하라는 말인가?
확실히 그런 현상은 있다. 그것은 경험상으로도 증명되는 일이다. 필연성은 모르겠지만 개연성은 있다.
그러나 마취호르몬 따위의 이론으로 접근할 일은 아니다.
설혹 그런 호르몬의 존재가 입증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현상에 대한 동어반복밖에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런 현상에 대하여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출구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접근해 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먼저 서로 알고 지내는 기간이 오래 되다보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의 인간관계가 협소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것은 사실 대단히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놓치기 쉬운 문제가 아닌가 한다.
인간은 집성(集成)된 존재다.
하이데거의 존재 이론을 떠나서라도 인간은 본질적으로 세계 내 존재다.
나의 모습은 세계를 배경으로 한 것이고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 배경과의 관계가 없으면 나도 없다.
서로를 오래 알다보면 상대방이라는 익숙한 존재와 그 상대방을 있게 한 배경이 서로 분리되기 쉽다.
그 사람을 있게 한 모든 사회적 관계가 그 사람 안에 응축되고 매몰된다.
아니 더 나아가 그런 모든 관계가 해소되고 사라져 버린다.
특히 두 사람의 관계가 평범한 결혼생활처럼 두 사람만의 관계로 단순하게 진행될 경우 그런 매몰과 해소는 더욱 촉진된다.
이를테면 아브라함 링컨이나 톨스토이는 그들의 아내들의 눈으로 볼 때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존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사랑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한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저 값싸게 회자하는 말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완전한 상호 정면응시는 결국 서로를 무화(無化)시킬 뿐이다.
비근한 예로 부부간의 경우도 경제적 목표나 자녀양육의 목표가 뚜렷한 기간 중에는 서로의 사랑도 이러한 현실적 필요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가정경제가 안정되거나 반대로 완전히 기대 무망하게 될 때, 거기다가 자녀들도 어느 정도 독립성을 가져 더 이상 매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될 때, 부부도 서로의 모습으로부터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위기를 맞기 쉽다.
이 때문에 건강한 인간관계, 건강한 애정관계에 있어서는 오히려 약간의 거리가 필요하다.
가까워지기 위해서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거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 거리에 의해서 시야가 확보되고 이 시야에 의해 이른바 이원시(離遠視)라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원시는 어떤 목표물을 볼 때 목표물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목표물의 주변을 종합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오히려 목표물의 윤곽을 더 정확히 보는 방법이다.
우리는 실생활에서 그것을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다.
이를테면 배우자를 가정이 아닌 장소에서, 동료를 직장이 아닌 장소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종종 다른 느낌을 받는다.
그 같은 효과의 연장선에서 훌륭한 애정 영화는 애정만을 직접 다루지 않는다.
애정만을 직접 다루면 애정이 더 잘 보이고 더 잘 부각될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애정만을 보면 애정이 보이지 않는다.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애정은 사라지고 물큰한 감정의 덩어리만 남는 것이 즉자체(卽自體)로서의 애정이다.
애정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영화로 내 기억에 떠오르는 영화는 『러브스토리』나 『메디슨카운티의 다리』 정도인데 바로 그런 이유로 이들 영화는 삼류 영화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러브스토리』는 죽음이라는 변수가,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는 짧고 기묘한 인연과 추억이라는 계기가 있었기에 그 정도의 작품성이나마 가능했던 것이다.
성공적인 애정영화는 애정을 삶의 전체 지평에서 확보하고 있다.
이를테면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폰 트랍 대령과 산골처녀 마리아와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히틀러에 의한 오스트리아 합병이라는 역사적 긴장 가운데에서 제시되고 있다.
폰 트랍 대령의 유니크한 조국애가 없었더라면 그들의 애정은 얼마나 물큰한 것이 되고 말았을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닥터 지바고』등등의 걸작들도 모두 남북전쟁이나 러시아 혁명이 개입하여 주인공들의 인격과 개성을 창조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랑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의 사랑은 일대일의 대응구도가 아니라 시대상황이라는 또 다른 변수와 3각구도를 이루고 있다.
상황이라는 넓은 시야에 맞추어 시선이 이원(離遠)될 때 사랑은 오히려 제 자리와 제 모습을 찾는 것이다.
사랑은 상황이 엮어내는 구도 속에서 생명력을 얻고 들판의 풀처럼 무성하고 길게 이어지는 무엇이 된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 있어서 무료한 일상생활은 모든 상황을 정적으로 고착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세월이 만들어내는 상호간의 감정 냉각 문제는 더 복잡한 배경을 가지게 된다.
연인들 간에 서로 감정 싸움을 하거나 상대방에 대한 탓을 하게 되는 것도 대부분 너무 가까워짐으로써 폐기 상태에 이른 〈인간적 거리〉를 재확보하기 위한 본능적인 노력의 하나다.
실로 그 거리는 인간관계가 적정하게 지속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인간적 거리다.
연인이든, 부부든, 나아가 친구든 우리는 서로에 대하여 기지(旣知)가 아닌 미지(未知)로 남아 있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는 원래 미지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원래 미지다. 그리고 미지 속에는 알 수 없는 신성(神聖)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우리를 기지로 만드는 모든 인간적, 사회적 메커니즘에 맹렬히 저항한다.
모든 서로 알력하거나 다투는 연인들을 관찰해보면 상대방이 나에게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거나 내가 상대방의 인식범위 안에 들어 당연시되는 것을 거부하는 몸짓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집요함은 생명의 집요함이고 생명의 집요함 속에서 우리는 영원히 인간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으려고 달아나는 신성의 뒷모습을 포착할 수 있다.
이 문제는 결국 인간적 사랑의 영원성 문제에 이어진다.
사랑이 영원하냐 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값싼 질문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열에 뜬 청춘남녀들의 숨가쁜 맹세에 가닥을 맞추어 이해한다면 사랑은 결코 영원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겨냥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상대방을 관통하고 있다.
이것이 사랑이 가진 본래적인 모순성이다.
그래서 인간적인 사랑의 가장 완전한 모습은 대부분 죽음과 결부되어 있다.
많은 연애소설이 순애보(殉愛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다.
죽음에 의하여 사랑에 영원의 이미지가 주어지지만 실로 그것은 인간적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입증하는 셈이다.
그러나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을 관통하고 있다는 것은 동시에 사랑이 본래적으로 영원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유한한 대상에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은 삶의 모순이고 동시에 삶의 신비다.
그래서 인간적 사랑이 영원한 것이냐 하는 질문도 결국은 모순된 결론에 이른다.
마치 영원성의 척도를 사용하면 사랑은 유한하고 유한성의 척도를 사용하면 사랑은 영원한 것처럼 보인다.
프랑스의 작가 프랑소와 모리악은 사랑의 이런 성격에 주목하고 있는 작가다.
그는 인간에 대한 사랑 안에서 영원에 대한 사랑, 신에 대한 사랑, 종교적 사랑을 본다.
그래서 그가 소묘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은 늘 쓸쓸하다.
사랑은 달콤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쓸쓸한 것이다.
사랑의 쓸쓸함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랑을 알고 사랑의 모순성을 안다고 할 수 있다.
서로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관심과 열정이 사라진다는 이 쓸쓸한 일도 우리가 시각을 가지기에 따라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다.
시선이 목전의 이것저것에 현혹되기 쉬운 자에게 있어서는 관심과 열정의 소멸뿐만 아니라 관심과 열정 그 자체도 아름답지 못할 수가 있다.
그러나 사랑의 모순, 더 나아가 인간의 모순을 보고 이해하고 그 운명을 사랑하는 자에게 있어서는 그 모든 것이 다 아름다울 수가 있다.
그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만해(萬海)의 시구처럼 만남 속에 헤어짐이 예비되어 있고 헤어짐 속에 다시 만남이 예비되어 있는, 그 자체로서 결코 끝나는 일이 없는 거대한 원환을 그리면서 비로소 하나의 차원을 더 뛰어넘어 비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