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언약식
촌촌님 또 흉보시겠다. ㅎㅎ 못참고 또 쓴다.
이건 순전히 촌촌님 탓이다. 촌촌님이 오랜만에 돌아와서 내 손가락에 불을 질렀다.
암튼... 시작합니다.
지난주 일요일밤... MBC였나 KBS였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프로그램으로 기억한다.
'우리시대의 진보 3부작'이라는 기획으로 제1탄 '공장으로 간 지식인들'이라는 다큐를 내보냈다.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더라. 우리의 청춘과 신혼이 바로 그 다큐멘터리 한가운데 있었다.
정말 '이제는 말할 수 있는' 때가 된 것인가?
우리 내외가 결혼을 한 것은 그 다큐멘터리의 배경이 된 시점으로부터 3년 전쯤이니 소위 '위장취업자'였던 남편감의 신분은 당연히 밝힐 수가 없었다. 자라면서 '거짓말하는 재주'를 제대로 못배운 순진한 우리 오빠들에게 경찰이 들이닥쳐 다그치기라도 하면 몇년 고생이 도루묵이 된다....
'연좌제'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절이었다.
대기업 임원이던 큰오빠는 '직장도 못 가르쳐주는 건 뻘갱이기 때문 아니냐', '나 해외출장 못가게 만들일 있냐'면서 펄펄 뛰었고, 한평생 냉전논리에 오금을 못 펴고 살아오신 부모님들도 '괜히 허락했다 뒷날 책임 못질 일 만들지...' 싶으셨는지 아예 입도 뻥끗 못하게 하셨다.
하긴 편지 한장 달랑 남기고 가출했다가 2년만에 신분도 불분명한 노총각을 데리고 와 결혼하겠다는데 어느 부모가 선뜻 동의해주겠나.
(ㅎㅎ 엉뚱한 오해는 금물... 나는 대학 그만 다니고 공장에 들어가려고 가출했던 거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늦춘다거나 해서 이해가 될 문제는 전혀 아니었다.
나름대로는 확신에 찬 결정이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정면돌파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 나는 남편 될 사람에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냥 가자'고 했다.
가족은 커녕 당시에는 친구들과도 연락을 완전히 끊고 있었으니 신부쪽 하객 좌석은 텅텅 빌 모양이었다. 사실 '가문의 영광' 격인 남편은 조촐하게라도 공공연한 결혼잔치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과감하게 예식장 예약을 취소하고 각자 증인으로 친구 두 명씩만 부르자고 했다.
1982년 찌는 듯한 8월의 어느 토요일 저녁, 남편 가족들(당시 시부모님이 다 돌아가셨기에 망정이지 안그랬으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과 친구 네 명 등 열두 명이 이 맹랑한 한쌍의 앞날을 축복해주기 위해 모였다.
나는 친구에게 빌린 한복을 입었고 약속의 표시로 14K 반지를 받았다.
당연히 혼수는 없었다. 각자 갖고 있던 자취살림을 합치니 신혼 깨소금 볶기에 충분하였다.
그래도 섭섭하여 신혼여행이라고 챙긴 것이 1박2일 무주구천동 등반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좀 황당하다... 텐트를 꾸려가지고 떠난 것이었다.
앗, 그런데 야영을 못하게 한다... 늑대가 나온다나 곰이 나온다나...
할수없이 산을 내려와 호텔인지 여관인지 알아보니 마침 성수기라 방이 하나도 없공... 궁리끝에 산 중턱에 있는 송어횟집으로 돌아가 방을 간신히 하나 빌렸는데....
나 아직도 잊지 못한다. 신혼 첫날밤을 함께 했던 그 더러운 이불...ㅋㅋ
일 년이 지난 후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면서 친정식구들과 화해를 했다.
다시 결혼식을 올리라는 성화도 있었지만 우리에겐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규모가 작아서 그렇지 우리는 이미 결혼식을 올렸고 법적으로도 부부로 인정받았다. 왜 그래야 하는데?
집안 어른들에게는 기회 되는대로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면 된다. 구질주질하지만 신혼여행도 다녀왔고 밥 끓여먹을 기구도 이부자리도 다 있으니 우리 사는 게 궁금한 친척이나 친구들은 시간 내어 놀러오면 된다. 뭐가 부족한가...
(ㅎㅎ 요즘같은 세상에선 '말도 안되는' 강짜요 명분없는 궁상일 게다. )
올 여름으로 우리는 결혼 23주년을 맞는다.
'슬픈 언약식'이라는 노래도 있지만 그 여름의 언약식에 가까운 결혼식은 결코 슬프지 않았다.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가슴이 벅차오를 뿐이었다.
당시에는 철이 없어서 그랬을른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적 책무가 끝나고 세상살이가 변하고 나도 이제 세상물정 뻔히 아는 여우가 됐지만.... 살면서 고생도 있었고 화통 터질 때도 있었지만 아직까지 그때의 그 맹랑한 결정을 후회해본 적은 없다.
결혼식장에 눈부시게 피어난 신부를 보면, 지금보다는 그래도 봐줄 만했던 시절에 이쁜척하고 찍어둔 사진이 한장도 없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 정도?